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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녹화사업 전두환 지시

강산21 2005. 12. 19. 17:04
대학생 강제징집 전두환 전대통령 지시(종합)
[연합뉴스 2005-12-19 16:41]
허원근 일병의 아버지(자료사진)


1천100여명 이상 징집..녹화사업 심사대상 1천200여명 실미도부대 중정지시로 창설..부대원 민간인

 

(서울=연합뉴스) 김귀근 이상헌 기자 = 1980년대 초 '특별정훈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소위 운동권 대학생들을 강제징집해 가혹행위를 한 것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또 강제징집 인원은 정부가 주장해온 447명이 아니라 1천100여명이 넘는 것으로 확인됐으며, 정신순화계획인 `녹화사업' 대상자는 강제징집자 900여명과 정상 입대자 300여명 등 1천200여명으로 추산됐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해동)는 19일 대학생 강제징집 및 녹화사업, 실미도사건의 진상조사 중간 발표를 통해 이 같이 밝혔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학생 강제징집은 국방부와 병무청을 비롯한 내무부, 문교부, 각 대학에 이르기까지 5공 정권과 관계기관이 총동원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1981년 4월2일 '소요 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조치 하라'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구두지시를 국방장관이 메모를 했고 이 메모는 국방차관에게 전해졌으며, 국방차관은 같은 날 오후 강모 소장을 통해 병무청장에게 전달했다

또 과거사위는 국방부가 운동권 학생들을 '특수학적변동자'라고 지칭하며 이들을 최전방에 우선 배치토록 한 1981년 12월1일의 '소요 관련 대학생 특별조치 방침'이 이틀 뒤인 12월3일 청와대에 구두보고된 사실이 적힌 문서도 찾아냈다.

 

이 같은 문서와 정황으로 미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지시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과거사위는 설명했다.

이와 함께 군부대에서 정신순화 교육을 일컫는 녹화사업 심사 대상자도 애초 265명이라는 정부의 발표와 달리 1천121명이란 사실도 새로 밝혀졌다.

 

지영선 과거사위 대변인은 "조사 결과 1천121명에 이르는 '특수학적변동자' 가운데 900여명과 정상입대자 중 300여명이 심사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지 대변인은 "강제징집한 대학생들의 수가 늘어 다른 군인들에게 영향을 줘 체계적으로 별도로 관리할 필요성 때문에 녹화사업을 한 것 같다"며 "당시 군부대 화장실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비난하는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과거사위는 보안사(기무사의 전신)에서 녹화사업 추진을 위해 작성한 1천121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규모를 확인하고 있다.

정부는 1988년 5공비리 청문회 과정에서 447명이 강제징집됐고 이 가운데 265명이 녹화사업을 받았다고 발표한 바 있다. 과거사위는 이번 조사에서 전체 강제징집자의 명단은 확보하지 못했다.

 

녹화사업은 보안사가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강제징집된 인원을 대상으로 '좌경오염 방지' 목적으로 개별심사를 통해 순화하고 그 일부를 '학원첩보 수집'에 활용하는 등 일련의 과정에서 위장명칭을 사용했다.

강제징집된 6명이 의문사하고 재야 및 야권에서 정치쟁점화하자 1984년 12월19일 보안사 '전담 공작과'(추후 심사과로 변경)를 폐지하면서 사라졌다.

 

과거사위는 앞으로 다수의 녹화사업 대상자를 관리했던 1개 사단을 모델로 사업의 실제 운용과정 및 실태 등을 집중 조명하고,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대책, 가해 및 피해자 화해조처 방안, 재발방지 대책 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실미도부대원 모집과정에서 회유를 비롯한 훈련기간에 인권유린이 있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당시 공군 모병관들은 31명의 부대원을 모집하면서 '교육 수료와 동시에 하사관 및 소위로 임관해 주고, 상당액의 특수수당을 지급하겠다'는 등의 조건을 내세워 유인했다.

지형선 대변인은 이와 관련, "부대원들은 민간인으로 영화에서 묘사한 특수범 등은 전혀 아니다"며 "31명의 부대원 가운데 전과자 7명은 중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고 젊은 시절 일어날 수 있는 가벼운 범행"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약속한 훈련기간 3개월을 넘겨 3년여간 격리된 가운데 혹독한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비인간적 대우와 구타 등 인권유린 행위, 열악한 급식상태, 모집시 약속했던 보수 미지급, 부대 해체설 등이 직.간접적 배경이 되어 1971년 8월23일부대를 탈출했다.

과거사위는 부대원들이 탈출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기간병과 충돌했는 지에 대해서는 발표하지 않았다.

 

부대원 2명은 독도법 훈련을 하다가 길을 잃어 민가로 간 뒤 술을 마시고 복귀해 구타로 숨졌으며, 1명은 기간병과 불화 등으로 구타당해 사망했다.

실미도 인접 무의도 여성에 대한 강간사건 관련해 3명이 숨지는 등 1968년∼1970년 모두 7명의 부대원이 사망했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중앙정부부와 국방부, 공군본부 등의 실미도부대에 대한 조종과 통제 수준, 예산편성 및 지원 등에 대해 집중 조사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에 실미도부대를 창설하도록 당시 지시한 인물은 앞으로 밝혀내야 할 과제로 남았다.

three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