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노무현식 정치 그 '비움'의 힘

강산21 2005. 8. 13. 14:10
 

노무현식 정치 그 '비움'의 힘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 대통령의 역할 모델은 박정희나 전두환이었다. 대통령의 언짢은 표정 하나에 국내 굴지의 재벌이 무너지던 그 무소불위의 권력 그것이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주는 힘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노무현은 전혀 그러지 못했다.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가보안법 폐지도, 과거사 청산도,사립학교법 개정도 지리멸렬인가? 노 대통령은 과연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제대로 쓰고 있기는 한 것인가?

그러나 사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법이 정해준 그 한계 내에서 정확하게 행사하고 있었다. 실제 대통령의 권한은 생각처럼 강력하지 않다. 합법적 권한 내에서 대통령은 검찰과 경찰을 통제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에게서 기득권을 빼앗기는 용이하지 않고 입법부(심지어 여당의원까지)와 사법부의 경우 더 어렵고 언론은 더더욱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이 '약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가 '과한' 것이다.

우리가 당연시해 온 그 무소불위의 권력은 애당초 대통령에게 주어진 합법적 권력이 아니라 돈과 정보를 통해서 만들어진 탈법적,초법적 권력이었다. 이번 도청 사건은 그 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었다. 도청을 통해서 은밀하게 수집된 사생활에 대한 정보는 이해 당사자를 옭아매는 올가미로 작용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이 대통령의 지시를 따르고 재벌들이 돈을 싸들고 오는 것은 대통령의 그 합법적 권력이 무서웠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 초법적, 탈법적 권력이었고 사실 그것은 생살여탈의 권력이었다.

노무현은 국민들의 개혁에의 강렬한 열망을 안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그 개혁이라는 것이 해방 후 수십년 동안 고착된 기득권층의 양보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개혁의 과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일단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개혁독재이다.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수사기관을 강력히 틀어쥐고 완강한 수구 기득권층을 솎아내고 새 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악을 악의 수단으로 치는 것은 결국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끝나고 구질서의 반동을 불러올 뿐이라는 것을 역사는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한 발상의 전환은 차라리 대통령으로서의 비합법적 권한을 모두 놓아 버리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검찰의 통제도 사라졌고 국정원의 보고도 사라졌다.

얼핏 위험천만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움의 전략,이 허허실실의 전략은 구질서를 스스로 자멸의 함정으로 몰아넣는 방법임이 입증되었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 유례없는 대통령 탄핵을 가져왔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합법적으로 의회권력을 접수할 수 있었다. 이제 이것을 의회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시킬 수 있는 전기가 찾아왔다. 대선 불법자금 모금 모의를 도청한 테이프가 불거져 나온 것이다. 불법자금 모금도 도청도 그 하나하나는 구악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 둘이 종래의 대통령을 무소불위의 권력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이제 이 둘이 서로를 파괴시키고 있다. 이 모두가 '비움'의 정치의 결과이다.

이것은 악이 몰락하는 것은 선에 의해서 응징되기보다는 하나의 악이 또 다른 악을 지우면서 서로 자멸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다. 또 다시 도청만을 문제삼고 그 내용은 비공개로 하고자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흘러가고 있고 공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제 누구도 그런 권력을 갖고 있지 않고 그것은 대통령이 모든 비합법적 권한을 놓았을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구질서의 마지막 자살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있다.

개혁은 혁명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새 판을 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그림 위에 새 그림을 덧입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혁명은 그 급진성으로 해서 폭력을 수반하고 결국 청산하고자 하는 그 수단에 스스로 의존함으로써 파멸하고 만다. 노무현식 개혁은 만일 성공한다면 거의 혁명적 수준의 개혁이 강압적 권력에 의존하지 않고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보여주는 세계사에 그 유례가 없는 유니크한 모델이 될 것이다.

 

부산일보 시론  조용현 인제대 인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