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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국의 연대기 (일부)

강산21 2020. 6. 10. 10:16

(1948년 즈음 미국에 생긴 일)

해외에 군대를 주둔시킨다는 마셜의 계획은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겠다. 군인들의 가족은 하원의원들에게 엄청난 투서를 했으며 의회 사무소는 "아빠를 집으로'와 같은 문구가 쓰인 태그가 달린 아기용 신발에 거의 파묻힐 정도였다. 12월에는 단 하루만에 트루먼의 집무실에 군대의 귀환을 요구하는 6만 통의 엽서가 쏟아진 적도 있을 정도다.

정치인들은 선거 결과에 악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연줄을 동원했다. 그러자 육군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트루먼은 “이처럼 단기간에 군대가 해산하는 속도라면 우리 요구 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위험한 속도로 '미군 병력 해체'가 이뤄지는 것을 염려하여 1946년 1월 해산 속도를 늦추라고 명령했다. 미군 부대 귀환에 필요한 군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해외에 계속 주둔하게 되었다.

대다수는 이를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겼다. 트루먼 대통령의 발표가 나온 지 며칠 후 2만 명의 미군은 마닐라를 행진해 의사당 잔해에 집결했다. 물론 그들은 귀환을 원했고, 그것이 주요 이유였으며, 유일한 이유인 사람도 있었다. 고위급 지휘관을 비롯한 일부는 '아시아의 봄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귀환을 연기하는 데 맹렬히 반대했다. “중국인과 필리핀인들이 자국민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도록 내버려둡시다.” 한 사람이 외쳤다. “필리핀은 우리 동맹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맞서 싸우지 않을 겁니다!" 다른 사람이 소리쳤다. 시위대는 필리핀민주 동맹으로부터 온 지지 서한을 읽었다. 한편 시위 주동자들은 필리핀 게릴라와의 연대를 선언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서태평양의 미군 사령관이었던 W. D. 스타일러 중장은 라디오를 통해 병사들에게 연설했다. 그는 미국이 아시아에서 떠맡아야 하는 방대한 양의 새로운 과업을 들먹였다. 그러나 병사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이 야유하고 휘파람을 부는 소리에 스타이어의 연설은 거의 묻혀버렸다.

마닐라 시위로 인해 다른 곳에서도 연달아 시위가 일어났다. 호놀룰루에서 2만 명, 한국에서 3만 명, 캘커타에서 5만 명이 시위에 나선 것이다. 괌에서는 군인들이 전쟁장관의 조각상을 불태웠고 3만 명 이상의 수병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중국과 버마, 일본, 프랑스, 독일, 영국 및 오스트리아에서도 시위가 일어나면서 워싱턴과 시카고, 뉴욕에서 이를 지지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대체 뭐 이런 정부가 다 있어?" 한 군인이 말했다. “세계는 자유로워야 한다고 엄숙하게 외치더니 우리는 쏙 빼놓는 게 어디 있어?"
그런 정서는 완강한 시위자들을 더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한 군인은 동양에서는 자유의 물결이 밀려드는데, 우리는 제국주의에 매달려 있다며 불평했다. 흑인 부대였던 버마의 제823 미 공병 항공대대 전원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비민주적인 미국 외교 정책에 염증을 느낀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그들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총격과 폭격으로 짓밟는 일에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총검과 폭격기로 중국을 '통일'하고 싶지 않다.
수만 명의 군인이 거리를 행진하며 사령관에게 야유를 퍼붓고 게릴라군과 연대를 선언하면서 전쟁장관의 조각상을 불태웠을 때, 바로 이런 말이 나왔다. 트루먼 대통령이 비공개 석상에서 표현했듯, 이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군법에 따라 항명하거나, 항명을 목격했으나 이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은 장교와 병사는 모두 사형에 처해질 수 있었다.
“제군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은 GM 같은 기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부대의 마닐라 사령관이 꾸짖었다. “제군들은 아직 육군 소속이다.

그러나 육군은 실제로 수만 명의 군인을 군법회의에 회부할 생각이었을까? 정말로 모두 처형시킬 작정이었을까? 반란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렸다.
육군 수뇌부는 주동자 9명에게 가벼운 벌금을 부과했다. 그들은 군인들이 그저 심한 향수병에 시달렸던 것일 뿐 “원래부터 군율을 위반하거나 군 당국에 저항하려던 것은 아니었다"는 맥아더의 너그러운 판단을 인정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남자들이란 원래 그렇다는 식이었다.

군 수뇌부는 군인들의 반란을 수습하고자 했으면서도 그들의 요구에는 굴복했다. 군인들은 귀환했고 군병력은 1945년 5월 당시 800만 명 이상에서 1947년 6월 말에는 100만 명이 채 안 되는 규모로 줄어들었다. 전쟁부가 요청한 250만 명에 훨씬 못 미치는 수였다. 육군은, 한 관료가 기록한 표현에 따르자면, “태엽이 풀려 시간이 늦게 가는 시계처럼 동력을 잃은 기구"가 되어버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일부 그리고 일본 군정을 위해 충분한 수의 병력이 해외에 주둔했다. 그러나 루스벨트가 40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한국 군정은 3년에 그치고 말았다. 트루먼은 “중국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전 세계적인 영향력은 수백만 명의 미군이 제대하면서 약해졌다"고 개탄했다.

이는 과장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군함과 항공기, 군사기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평시 육군의 규모는 전 세계 6위로서 전 지구를 식민지로 삼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미국, 제국의 연대기> 대니얼 임머바르, 글항아리, 2020. 34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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