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마을운동의 허상
많은 사람들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을 칭찬한다. 집권 초기에 그가 농어촌 고리채를 정리하고 부채를 탕감한 일은 있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그의 농업정책은 실패하였다. 그 결정판은 바로 새마을운동이었다. 이 운동으로 인해, 농촌과 어촌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사회가 철저히 붕괴되었다. 또, 풀뿌리 민주주의와 닮았던 재래의 자치제 역시 사라졌다.
일제강점기까지도 마을 이장은 주민들이 선출했다. 자연스레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은 주민 다수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자 변화가 찾아왔다.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는 관청의 명령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주민을 감시하는 말단기관으로 바뀌었의 간부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마을의 대표자가 아니라, 말단행정기관을 장악한 독재정부의 일꾼이 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간절히 바랐던 소망이 드디어 이뤄진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고유한 자치의 전통을 말살한 흉악범이었다.
새마을운동은 표방하는 바와는 달리 대기업의 경제적인 이익을 보장했다. 국내의 경제성장이 한계에 도달하자, 박정희 정권은 내수경제를 촉진하기 위한 한 가지 묘책을 새마을운동에서 찾았다. 시골길을 시멘트로 덮고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는 것은 정부가 선전하는 주도한 ‘환경미화’라기보다 사업이기 전에 재벌기업의 이익에 봉사하는 내수경제 살리기에 더욱 가까웠의 일환이었다. 가령 슬레이트 지붕은 여름에는 더욱 덥고 겨울에 더욱 추운 불량주택을 양산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사용된 막대한 경비는 모두 국고와 농민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으나 경제적 이득은 기업의 몫이 되었다.
박정희의 통치가 장기간 계속되자 농가소득은 더욱 줄어들었다. 농촌의 위상은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도시의 내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예컨대 충남 홍성은 1950년대만 해도 충남 서부의 중요한 거점지역이었다. 그러나 대도시 중심의 산업화정책이 전개되자, 개발 소외지역이 되어 궁벽한 시골로 전락했다.
재차 강조하지만 박정희의 산업화정책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것은 대다수 농민이었다. 노임 따먹기가 목적이었던 만큼 박정희는 저곡가 정책을 밀어붙였다. 게다가 미국산 잉여농산물을 마구 수입해 국내 시장의 교란을 가져왔다. 그런데도 박 정권은 물가안정과 과중한 군사비 부담마저 농민들에게 떠넘겼다. 농촌에는 다시 고리대가 성행할 정도로 생활기반이 파괴되었다. 80퍼센트도 넘는 농민들은 정부의 수매가가 생산비에 못 미친다며 비판했다.(<동아일보>, 1970년 1월19일치)
희생을 강요당한 농민들은 이농의 벼랑으로 내몰렸다. 이농가구의 7할은 경작규모 1정보 미만의 소농들이었다. 공룡도시 서울과 수도권의 탄생은 참담한 농촌붕괴의 결과였다. 산업노동자가 된 것은 젊은 여성들뿐이었다. 가장을 비롯한 나머지는 노점상과 막노동판으로 밀려났다. 박정희 정권은 스스로 산업화의 공적을 추켜세우며 ‘한강의 기적’이란 말을 만들어냈으나, 농촌의 비참한 실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마을운동은 특유의 기만술책일 뿐이었다. 초가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꾸고 골목길을 시멘트로 포장하는데 그친 이 운동은 재벌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 으로 직결되었다. 그리고 유신체제의 말단관리인에 불과한 ‘새마을운동 지도자’를 전국에 배치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하는 것. 독재자에게는 이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이다.
출처: 백승종, <<생태주의 역사강의>> (한티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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