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라는 이름이 종교개혁에 영원히 결부돼 있다면, 토마스 뮌처는 교황의 착취뿐만 아니라 속세의 억압에도 맞선 이들의 영적 지도자였다.
학식이 높은 사제였던 뮌처는 1518년에 루터의 사상에 매료됐다. 이후 몇 년간 그는 교회의 성인 숭배와 가톨릭교회 서열 구조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그는 작센의 츠비카우에서 주임 사제로 봉직했는데, 이 소도시는 광부들과 상층계급의 첨예한 갈등으로 유명했다. 뮌처는 주저 없이 상층계급에 맞서 광부들의 편에 섰다. 점차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서열 구조뿐만 아니라 루터의 개혁 강령에도 대항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1521년에 츠비카우에서 쫓겨난 뒤에 그는 후스의 영향을 받은 타보르파의 남은 무리에게 지지를 얻으려고 보헤미아로 길을 떠났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는 루터와 그 추종자들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입장이 됐다. 보통사람들이 신의 진정한 도구라고 믿으면서 그의 신학은 점점 혁명의 어조를 띠었다. 뮌처는 루터에게서 등을 돌리면서 그를 ‘거짓말 박사’라 불렀다. 그는 루터가 부자와 권력자의 대변자라고 확신했다 “당신(루터)이 보름스에서 신성로마제국 앞에 당당히 선 것은 당신이 코에 입 맞추고 꿀을 발라 준 독일 귀족계급 덕택이었다. … 악마가 당신을 집어삼킨 게 분명하다. … 당신의 살은 당나귀 같아서 천천히 요리돼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뮌처의 저작은 신학적 강조점 대신 좀 더 세속적인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농민들이 제시한 요구는 분명 구원의 본성을 둘러싼 모호한 논쟁과 달랐다. 1525년 3월에 독일어를 쓰는 평민들이 모여서 12개조를 합의했고, 12개조의 인쇄본이 두 달 안에 2만 5000부 넘게 유포됐다. 요구 중에는 십일조의 10퍼센트 이상을 공공 목적에 쓸 것, 주임 사제의 생계비로는 적정 금액만 공제할 것 등이 포함됐다. 또한 농노제 폐지, 낚시하고 사냥할 권리의 회복, 세금, 소작료, 강제노동의 제한, 일체의 독단적 사법과 행정 종식도 있었다.
이 반란의 동기가 종교였는지, 아니면 경제적 억압이 원인이었는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아마도 전자의 신학적 의상을 걸친 후자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평범한 16세기 독일인에게 종교와 일상생활을 어떻게든 떼어 놓는다는 생각은 어불성설이었을 것이다. 결국 실패하기는 했어도 농민전쟁은 대중의 지지를 받은 혁명이었고, 여성들도 참여했다. 기성 권력은 참여 인원이 무려 30만 명을 넘보던 이 운동에 화들짝 놀랐다. 평민들은 전투 경험은 물론이고 대포와 기병도 없었다. 많은 반란자가 평화주의를 신념으로 삼아서 전투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1524년에 콘라드 그레벨이 뮌처에게 쓴 것처럼, 무리의 많은 이는 “일체의 살인을 금했기 때문에 세속의 칼을 사용하거나 전쟁에 뛰어들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운동은 민주적 성격이 강해서 전면적 계급전쟁의 요구에 잘 들어맞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루터는 강도떼 농민들을 더 폭력적으로 짓밟으라고 선동했다. 루터는 협상을 통한 해결로 평민들의 희생을 줄이려 하기보다는 상층계급 군대가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둘러야 한다고 부추겼다. 유대인 이웃을 공격하는 저서에서 그가 쓴 언어는 비열하기 이를 데 없으며 살인 교사에 가깝다. 속세를 바꾸려 한 기독교인 농민들조차 루터에게 자비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에 루터는 기사들에게 외쳤다. “누구든 찌르고 때리고 죽여라. 그리하다 사망하는 이에게 복이 있을진저! 그보다 더 축복을 받은 죽음은 없을지니 … (이 살육이) 하느님을 기쁘게 함이라. 이게 내가 아는 바다.” 군대가 지배자의 편에서 질서 회복 임무를 완수할 무렵, 독일 평민 중 학살된 이는 10만 명으로 추산됐다. 오늘날 독일 인구로 환산한다면, 희생자는 100만 명 이상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독일 농민의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독일 농민들이 반란의 패배에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를 사망자 수뿐만 아니라 생존자에게 닥친 경제적 충격 면에서도 이해해야 한다. 봉기를 최종 진압한 지배자들은 진압에 동원한 용병들에게 대금을 지급하느라 어떻게든 막대한 자금을 모아야 하는 처지가 됐다. 농민 진압 작전에 직접 지불한 비용을 충당하기에는 현금 잔고가 넉넉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단기 대출을 받으려고 손을 벌렸다. 대출 속도는 느리기만 했고, 이러저러한 도시 유대인 공동체에서 강제로 뽑아낸 헌금은 학살을 뒷받침할 자금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이 때 빌린 자금을 상환하려고 영주들은 반란이 일어난 지역에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농민을 쥐어짠 덕분에 실제 전쟁 비용의 약 두 배가 걷혔다. 이를 한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진압 작전 비용을 댄 것은 대부분 반란자였다. … 농민의 사회, 정치, 경제 권리를 인정하라는 요구로 시작된 투쟁이 더 심한 예속으로 끝난 셈이다.”
<유럽민중사 – 보통사람들이 만든 600년의 거대한 변화> 윌리엄 A. 펠츠, 서해문집, 2018. 5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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