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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다 (유시민 강연록 중에서)

강산21 2010. 8. 7. 02:29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다


<유한계급론>이라는 책을 쓴 소스타인 베블런은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미국에서 발생한 이른바 제도주의 경제학파의 창시자에 해당합니다. 이 사람은 빈부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인간이 보수적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제도 속에서 살아가는데, 제도라는 건 종국적으로 공인된 인습적 사고방식이라는 겁니다. 날 때부터 계급이 있다는 인습적 사고방식이 형식으로 만들어진 게 계급제도겠죠. 모든 시대의 제도는 해체해보면 종국적으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인된 인습적 사고방식이 구체화된 것입니다.


제도는 끊임없이 진화하죠. 사람들은 모두 현재의 제도 속에 살기 때문에 그 제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제도는 제도를 진화시키고 바꾸는 거죠. 제도가 만약 인습적 사고방식이라면 제도의 진화는 인습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갖는 겁니다. 귀찮죠. 무엇인가를 바꾸는 데는 비용이 듭니다. 신경도 써야하고 머리도 아프고 옛날에 하던 일도 못하게 되죠. 인습적 사고방식을 바꾸는 데는 굉장히 불편하고 때로 고통스러운 정신적 적응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진보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보수적인데 생활환경의 변화 때문에 더 이상 인습적 사고방식을 고수하는 게 고통스러워지면 어쩔 수 없이 정신적 적응을 하는 게 진보라는 거죠. 그러니까 부자들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에 보수적이 된다는 것은 매우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겁니다. 인간은 누구나 보수적인데, 노동하지 않는 유한계급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덜 노출돼 있기 때문에 새로운 적응을 해야 할 강제를 덜 느껴서 보수적일 뿐 기득권을 지키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유한계급은 본의 아니게 보수적이라는 겁니다.


위안이 됩니까? 저는 위안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왜 자기 집도 없는 사람이 종부세 폐지에 찬성할까, 왜 강북에서 전셋집 살면서 종부세를 비판할까. 이런 게 다 이해됩니다. 종부세를 매긴다는 것, 보유세를 무겁게 매긴다는 것은 제도의 진화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없던 제도거든요. 그러니 오로지 부자만 이것에 반대하는 게 옳고 가난한 사람은 찬성해야 맞나요? 아니죠. 이른바 저소득, 저학력, 고령층이 한나라당의 핵심 지지기반 아닙니까. 저소득, 저학력, 고령층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잖아요. 그런데 왜 한나라당을 지지할까요? 인간이 원래 보수적이어서 그런 겁니다. 생활환경의 변화에 많이 노출될수록, 생활환경의 변화를 민감하게 느낄수록 사람들은 진보적이 됩니다. 그러니까 섭섭해하지 말라는 거죠. 보수가 기본이라는 겁니다. 진보는 그저 가끔씩 이기는 거예요. 이것이 진보의 처절한 운명이죠. 보수가 엉망으로 만들어서 완전히 아비규환이 되었을 때,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졌을 때 비로소 잠깐 진보가 승리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보의 슬픈 숙명입니다.


<10명의 사람이 노무현을 말하다>(2010) 가운데 유시민 강연 내용 중. 71-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