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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인생파산을 감수한 이유-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추천의 글

강산21 2010. 4. 24. 11:43

그가 인생파산을 감수한 이유-김용철 "삼성을 생각한다"- 추천의 글

 

삼성 이건희 일가와 가신들의 비자금, 로비, 경영권 불법 승계 등 이른바 삼성사태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지 한참 되었지만 '김용철'이라는 이름 석 자는 여전히 기억하고 계실 줄 압니다. 그는 대한민국 서울지검 특수부 수석검사를 거쳐 글로벌 기업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재무, 법무팀장을 지낸 사람이니 누구나 부러워할 '엄친아'의 전형입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이분을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10월 중순께의 일이었습니다. 천주교 사제들과 전직 검사 혹은 대기업 변호사의 만남이라니 각자 중시해 온 가치를 생각하면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신부들도 삼성이라는 기업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었고, 김 변호사 역시 사제단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 즈음 김 변호사는 만삭의 아내를 위해 근방의 여관을 전전하며,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는 성경의 어느 사나이처럼, 외롭고 위태로운 신세였습니다. 사제단은 아마 그 남자가 가까스로 찾아낸 마구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언감생심 병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산파를 부를 수 있는 여관이었다면 다행이었을 텐데 갈 곳이 마소들의 처소뿐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한민국 사회의 비정상과 부정부패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보니 이 사건에 등장했던 여러 배역들이 왜 그토록 비겁하다 못해 비굴하게 처신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해주는 일종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사제단의 등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공연히 세상사에 관여하는 모습으로 보였는지 걱정하는 말씀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먼저 불편하고 슬펐습니다.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세상은 어째서 자기들도 어쩌지 못하는 골치 아픈 문제를 교회에 맡기려 하는가! 안개 자욱한 새벽을 틈타 누군가 슬며시 갓난아기를 성당 입구에 맡겨놓고 감쪽같이 사라졌다고 합시다. 누가 나서서 맡아주면 고맙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신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젖먹이를 사제관에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곤란하고 불편한 일들, 혹은 이상한 오해까지 더해지겠지만 그렇다고 내쫓을 수야 없는 노릇 아닙니까. 박종철 대학생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을 밝히던 일도 그랬습니다. 지금 그 일을 두고 사제단을 나무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열린 사회에 부정적인 언론들조차 그때의 일만큼은 민주화에 크게 기여한 사건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제들의 눈에는 삼성문제나 그때의 일이나 똑같아 보입니다. 사건의 발단부터 그랬습니다.

 

1987년 겨울이 갔어도 꽃 하나 피지 않던 봄, 감옥에서 누군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진상을 작성하고 이를 기적적으로 세상에 내보냈습니다. 쪽지는 손에서 손으로 은밀히 전해졌습니다. 읽어 본 사람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독재정권의 만행을 국민에게 전해야 할 텐데 누가 그 일을 해줄지 고심하다가 사제단을 찾았습니다. 너무 위험한 일이라 선뜻 나설 사람이 없다니 신부들마저 꽁무니를 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덥석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신부 역시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여서 함께 기도했고, 사제들의 역사적 소명에 대해서도 생각했습니다. 결론을 내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우리는 무섭고 괴로웠습니다. 결국 어두컴컴한 세상에 진실의 불씨를 당겼고, 그해 여름 사람들의 마음에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뜨겁게 불타올랐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의 한 핵심임원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세상이 모르는 진실의 전모를 생생하게 담고 있는 쪽지였습니다. 박종철 사건처럼 그는 파놉티콘을 연상케 하는 그룹의 심장부에서 탈출하여 이곳저곳을 헤맸지만 그 어디서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찰은 물론이고 방송사와 주요 일간신문 데스크, 시민단체를 찾아갔지만 대한민국의 신흥독재자인 재벌기업의 범죄사실을 귀담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검사 출신의 기업 변호사가 자신이 손수 꾸민 일과 직간접으로 가담하거나 목격했던 일들을 낱낱이 자백하고 증언하겠다고 했지만 수사와 감찰의 권능을 가진 국가기관들은 일찌감치 가당찮은 일이라며 손사래를 쳤고 더러는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말라고 다독였습니다.

 

결국 그는 사제관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낯선 방문객의 사연을 듣고 우리는 경악하였습니다. 사람이 탐(貪), 진(嗔), 치(痴)의 짐승이라더니 평소 깨끗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과시하던 기업이 그런 비참의 실상에 시달리는 딱한 괴물이었습니다. 그것은 회장 일가와 몇몇 가신들의 문제였지만, 삼성그룹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전체를 심각하게 망치는 해악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알려주어서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치유책을 마련해야 할 중병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사제들은 번민에 시달렸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을 치고 싶었습니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이 원망스러웠지만 역사의 소명으로 받아들이기로 맘먹었습니다. 1987년의 크고 작은 일들이 똘똘 뭉쳐서 철옹성 같던 군사독재를 무너뜨렸듯이, 2007년 삼성 비리에 관한 고백과 증언으로 경제 민주화를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습니다.

 

그 이후 세상이 뒤집혀지기라도 할 듯 떠들썩했던 처음과 달리 그만 흐지부지 끝나버린 사연은 여러분이 알고 계신 대로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사람마다 천양지차입니다. 사람 수만큼 제각각의 하느님이 존재하듯이 삼성 사태를 지켜본 사람들의 입장  또한 다양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에 대한 시선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신자라고도 하는 모양입니다. 참 해괴한 소리입니다.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지배자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부잣집 개가 되기 싫다!"고 소리쳤다고 해서 그런 오명을 붙이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 저 민망한 소리는 사적 이익을 위해 참을 버리고 강자 편에 찰싹 달라붙는 일을 지적할 때나 쓰는 말입니다. 혹시 그의 처신 가운데 맘에 들지 않는 대목이 있었더라도 심각한 불이익과 어지러운 손가락질을 무릅써 가면서 그가 비명을 지르듯 남긴 메시지에 대해서는 모두가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나 나이 오십에 이르면 나름대로 이룩한 삶의 기반과 인간관계 위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좋은 것들을 아낌없이 무너뜨렸습니다. 사회운동가도 아니고 더구나 순교 열정을 지닌 신앙인도 아니었던 사람이 인생 파산을 감수했다면 얼마나 절실한 것이기에 그랬을까 하고 생각해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삼성 특검은 이건희 씨가 꼭꼭 슘겨둔 비자금 4조 5천억원을 찾아내서 그 집안의 재산이라며 돌려주었고, 재판부는 경영권 불법승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매출 200조 원대의 거대 기업집단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데 고작 16억원의 세금만을 물고 만,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그나마 구축한 법질서 마저 완전히 농락한 이 기상천외의 사술"(이계삼, "평형감각을 되찾기 위하여", <녹색평론> 제107호)을 사법부는 끝까지 합법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계면쩍은 얼굴로 판결문을 읽던 재판관들의 얼굴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에 연민을 느겼습니다.

 

최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한양석 부장판사)는 용산철거민 아홉 명에게 징역 6년 등의 중형을 선고했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끝까지 핵심 수사기록 3천쪽을 감춘 검찰의 편을 들어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용산4구역 재개발사업에서 삼성물산 등 대형건설사들이 벌어들이는 예상수익이 자그마치 1조4천억 원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가해자인 국가권력이 반성은 커녕 피해자 국민들을 단죄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이 책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며칠 후 이어진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세상을 웃겼습니다. 심의표결관 침해, 대리투표와 일사부재의 위배 등 입법절차의 위법성을 낱낱이 밝혔으면서도 '과정은 위법이나 결과는 합법'이라고 했습니다. 저런 엉뚱함이 도대체 어디서 유래하는지 김 변호사의 증언은 상세하게 풀어줄 것입니다. 결국 그때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남아 계속 이런 불행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책은 일종의 고백록입니다. 특정인들을 향한 원망이나 미움 때문에 만들어진 기록이 아닙니다. 공연히 남의 치부를 공개해서 망신을 주자는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함부로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부패상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읽으시는 분들께서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로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의 간절했던 꿈이 경제의 민주화로 열매 맺는 날을 고대하며 기도합니다.

 

2009년 11월 12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 전종훈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