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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백범 서거 60주년과 얼치기 세상 / 김삼웅

강산21 2009. 6. 27. 00:42

[시론] 백범 서거 60주년과 얼치기 세상 / 김삼웅
한겨레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6월 26일은 백범 김구 선생 가신 지 60주년. 백범과 여운형은 암살되고, 조봉암은 사법살인, 장준하는 의문사, 노무현은 ‘죽임당한 자살’, 인물 죽이기 현대사의 배경에는 ‘얼치기 보수’가 작동한다. ‘얼치기’ 표현은 본령인 민족·자주·자유보다 사대·독점·독재의 탈을 쓴 까닭일 터이다.
 

얼치기들은 심지어 백범에게도 좌파의 딱지를 붙인다. 백범은 일제 패망을 내다보면서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묶고자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한국독립당)과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조선민족혁명당), 아나키즘 세력까지 끌어들여 좌우 연합정부를 구성했다. 부주석에 3·1운동의 불씨를 지핀 민족혁명당 위원장 김규식을 선임하고, 군무부장에는 일경이 이름만 들어도 오줌을 지렸다는 의열단장 김원봉을 임명하는 등 많은 인재를 모았다.

 

이것은 시대적 요청이었고 국량이 그만큼 컸음을 보여준다. 해방 뒤에는 신탁통치와 단독정부를 반대하고 남북 협상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했다. 단정이 되면 동족상잔이 내다보이고, 한번 갈라지면 해양·대륙세력의 대립으로 다시 합치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이를 두고 좌파 운운은 색맹이고 그래서 초상화 담긴 10만원권의 제작을 기피한 것은 용렬함이다. 백범이 있었기에 광복군이 창설되고 이를 바탕으로 일제와 나치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장제스(장개석) 주석과 인간적 교분까지 작용하여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케 만들어 일제의 족쇄를 벗었다.

 

얼치기들이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귀축영미 박멸하라”는 거품을 물 때 백범과 독립운동가들은 1일 2식도 못하면서 ‘자주독립’에 목이 매었다. 얼치기들이 새 나라의 주류가 되어 “분단만이 살길이다”고 게거품을 물 때 백범은 조용히 쟁족(爭足)운동을 벌였다. 대가리 싸움, 헤게모니 싸움으로 나라 잃었고 다시 두쪽인데, 머리보다 발이 되자는 실천운동이었다. 실천의 천(踐) 자에 발 족(足) 자가 들어 있음을 일렀다. “백 개의 다리를 가진 벌레는 죽어도 쓰러지지 않는다”는 가르침, 백범의 아호, 임시정부 문지기 자원, 주석 추대에 겸양했던 모습 그대로다.

 

얼치기들은 백범의 그림자가 두려웠다. 장덕수 암살 사건과 여순사건 배후로 지목하면서 해괴한 언법으로 둘러씌웠다. 그래서 백범은 “그들은 우리와 다른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개탄하고, 친일·분단세력과 보수신문을 “태양을 싫어하는 박테리아”라 비판했다. 그 ‘박테리아’들이 긴 세월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짓밟으면서 주인 노릇을 해오고 오늘 다시 권력의 실세가 되고 주류 언론이 되어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곡필을 휘두른다. 젊은 문인들이 얼마나 분통했으면 ‘6·9 작가선언’에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민주주의의 조종을 울린 종지기”라 했을까.

 

일제가 만금의 현상금을 걸고도 죽이지 못한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는 6·25 때 북한군이 서대문형무소를 점거하기 직전 수많은 수형자 중 유일하게 석방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피란 가는 경황에도 안두희를 꺼내어 가는 ‘동지애’를 발휘했다. ‘국부 이승만론’의 실체다.

 

백범의 길, 눈 덮인 길이라도 뒷사람을 위해 바르게 걸으라 이르고, 사도(邪道)를 배척하고 정도를 택하라 가르쳤다. “나의 정치이념은 자유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여야 한다”고 역설했던 백범, “일개인에서 오는 것을 전제 또는 독재라 하고, 일계급에서 오는 것을 계급독재라 하고 통칭 파쇼라고 한다”(<나의 소원>)고 갈파했던 백범이 오늘 북한의 3대 세습과 남한의 ‘1% 부자 권력’을 보고 편히 잠들 수 있을까. 백범이 그립다. 백범의 길이 그립다. 거기 노무현이 겹친다.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