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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증과 천재

강산21 2009. 4. 28. 17:56

정신분열증과 천재


정신장애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독특한 증상을 나타내는 장애가 정신분열증이다. 정신분열증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내는 매우 독특하고 비범한 사고양상이 때로는 위대한 창의성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있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위대한 창조적 업적을 남긴 천재 중에는 정신분열증적 증상을 지녔던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 학자로는 Issac Newton, Ludwig Wittgenstein, John Forbes Nash 등이 있으며 문학가로는 Friedrich Holderlin, Fleb Ivanovic Uspenskij 등이 있고 예술가로는 Vincent van Gogh, Nizinski 등이 있다. 정신분열증을 지녔던 천재들이 양극성 장애를 지녔던 천재들보다 훨씬 더 독자적이고 비약적인 창의적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양극성 장애를 지닌 천재들은 현실세계로부터 유리되어 자폐적 세계 속에서 자유로운 공상과 더불어 기상천외한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극단적인 고립에 의한 현실세계와의 단절, 단조롭고 메마른 생활 속에서의 집중적 작업, 자폐적 세계 속에서 자유로운 공상에의 몰두, 기존의 이론체계를 무시한 기상천외한 발상 등이 창의적 업적을 남기도록 할 수 있었다.


정신분열증적인 증세를 보였던 대표적인 천재는 Newton이다. Newton(1642-1727)은 미적분법과 색채이론뿐 아니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여 고전물리학의 체계를 확립한 위대한 천재이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매우 메마르고 고립된 생활을 하였으며 교수가 된 이후에는 병적인 발표기피, 인간에 대한 불신과 의심, 피해의식적 사고를 보였다. 특히 두 차례의 심각한 정신적 위기상황에서는 정신분열증적인 증상을 나타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Newton은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3세에 어머니가 재가하여 할머니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메마르고 고립된 아동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진학할 당시에 내성적이고 별난 학생이었던 Newton에게서 학문적 재능을 발견하고 따뜻한 관심을 베풀었던 사람이 바로 Barrow교수였다. 그는 Newton에게 지나칠 정도의 호의를 베풀었으며 그를 조교로 채용하고 학자로 양성하였고 자신의 교수직을 물려주었다. Barrow는 Newton이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맺었던 최초의 사람이었다. 23세경에 Newton은 페스트의 창궐로 고향에 내려가 있던 시기에 풍부한 지적 창조성이 발현되어 만유인력, 역학과 광학 법칙, 미적분학을 직관적으로 발견하였다.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의 존재를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이러한 <창조적 휴가>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Barrow로부터 27세에 교수직을 물려받고 왕성한 연구활동을 보이던 Newton은 30세에 <빛과 색채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왕립학회에서 발표하였으나 Hooke의 격렬한 비판을 받고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후 Newton은 대인관계를 피하는 은둔생활이 강해졌으며 지나친 의심과 피해의식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그의 강의는 난해하고 지루했으며 출석자가 한 명도 없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빈 강의실에서 강의를 하거나 엉뚱하게 지리학에 대한 강의를 하는 등 부적절한 행동을 나타내었다. 이 시기부터 40세에 이르도록 Newton은 창의적인 업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창조적 휴가> 이후 20여 년 간 잠들어있던 Newton의 창조적 사고를 일깨운운 것은 핼리 혜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Halley였다. 그는 Newton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Newton에게 지적 물음을 통해 창의성을 일깨워 주었으며 천문학적 관측자료를 제공하고 대외적인 일을 도맡아 하면서 Newton의 대표적 저서인 『프린키피아』가 1684년에 완성되도록 도왔다.


1688년에 영국의 명예혁명이 일어나 대학이 정치적 혼란에 휩싸이고 1689년에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Newton은 두번째의 정신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때는 피해의식적 생각과 환청을 보였으며 학문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자택의 화재로 연구자료가 소실되는 일이 Newton에게 더욱 큰 충격을 주었는데, 이 화재사건은 당시 Newton의 혼란스러운 정신상태에 의해 유발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시기에 Newton은 자신의 연구가 외부로 새어나가거나 다른 사람이 훔쳐가는 것에 대한 피해의식을 지녔으며, 접촉하는 모든 사람을 의심했고 심지어 친한 사람도 자신에게 함정을 파고 있지 않나 하는 병적인 의심을 보였다고 한다. 이 당시 Newton은 망상형 정신분열증과 유사한 상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Newton은 약 2년여 동안의 정신적 위기에서 회복되었지만 말이 거의 없어지고 전과 달리 사고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고 한다. 1696년경부터는 평생 해왔던 연구와 교수직을 그만두고 연금술과 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귀족출신 Montague의 도움으로 조폐국장이 되어 관료세계에 몸담게 된다. 이후 Newton은 Montague의 후원 아래 조폐국 소장과 왕립학회장이 되는 등 학계의 원로로서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누리며 말년을 보낼 수 있었다. Newton이 정신적 위기 속에서도 창조적 업적을 남기고 명예로운 노년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은 Barrow, Halley, Montague와 같은 정신적 지지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을 지녔던 현대의 인물로는 199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수학자 John Forbes Nash가 있다. 그가 21세기에 쓴 논문은 게임이론 분야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Nash는 청년기부터 20여년 동안 망상형 정신분열증으로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 왔으나 부인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회복되었다. Nash가 정신분열증을 나타내고 그로부터 회복하여 노벨상을 타기까지의 과정은 2001년에 개봉된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현대이상심리학> 권석만, 학지사, 2003, 291-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