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진시황식 법치'로 가는가?

강산21 2009. 3. 30. 19:03

'진시황식 법치'로 가는가?

[박동천 칼럼] 지금 국민은 사법부의 행보를 주시하고 있다

기사입력 2009-03-30 오전 11:48:06 프레시안

 

한국말에서 법치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하나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에서 재사 노릇을 했던 상앙과 이사의 통치술을 가리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서양 사회에 자리 잡은 사회조직원리를 가리키는 의미이다.

전국시대의 법치는 왕이 백성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수단으로서 형정을 말한다. 일벌백계를 통해 군주의 권위를 높고 굳게 세워서 누구도 감히 대들지 못하게 만든다는 엄벌주의이다. 괜히 장바닥에 금을 그어놓고 넘으면 죽인다고 선언한 다음, 영문을 몰라 금을 넘은 사람에게 불복의 죄를 물어 죽이는 식이었다. 군주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 간혹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말을 들을지 말지는 결국 군주의 변덕에 달려있었다. 이때 법치란 '법으로' 다스린다는 뜻이 된다. 법은 질서유지의 수단이고, 적용대상은 일차적으로 백성이다. 따라서 이 시각에서 백성은 항상 잠재적 범죄자가 되고, 법이 보호해 줘야 할 권리 같은 것은 없다.

근대 서양에서 법치란 사회질서의 기본 원칙으로서, 무엇보다도 권력의 범위와 한계를 획정하는 의미가 핵심이다. 사회계약론, 시민혁명, 대의정부 등의 이념과 실천이 다듬어지고 자리를 잡으면서, 사회질서는 개인들에게 평화롭고 건강한 삶을 보장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합의가 생성되었다. 정부란 개인들에게 봉사하는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정부의 권력은 언제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법은 누가 정하는가? 신의 뜻, 자연의 법칙이라는 차원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조항이 있다면 법이 되는 것이고, 그런 것이 없을 때는 인민 사이에 명확하게 이루어진 합의가 법인데, 대개는 의회가 인민을 대표해서 법을 만들도록 했다. 이는 '법이' 다스린다는 뜻이다.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권력이 법보다 상전이라는 뜻이고, 법이 다스린다는 것은 법이 정치권력의 원천이라는 뜻이다. 근대 이후 서양에서는 힘(might)과 옳음(right)이 같은지 다른지를 따지는 오래 된 논쟁을 거치면서, 이런 구분들이 자연스럽게 사회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에 우리사회에서는 이런 문제에 관한 논쟁이 크게 일어난 적도 아직 없고, 또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설익은 비판까지 겹치면서, 두 가지 의미가 법치라는 하나의 단어 안에서 지독한 수준으로 혼동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에 진시황식 법치가 느닷없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이를 깊게 따져 묻는 공론이 일어날 기미가 보인다.

따져 볼 만한 주제는, 동양의 법치와 서양의 법치가 상극적으로 서로 다른지 아니면 서로 섞어도 될 만큼 별 차이가 없는지이다. 이는 다시 우리가 서양의 법치이념을 추구해야 할지, 아니면 진시황의 법치와 서양의 법치가 뒤범벅이 된 형태에 만족할지에 관한 실존적 화두로 이어진다. 우리사회에서는 법학, 정치학, 철학, 역사학을 비롯해서 기타 모든 방면의 지식인 대다수가 이런 실존적인 질문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회피하면서 살아왔다.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소리일수록 발언했다가 모진 꼴을 당할까봐 몸조심하는 비겁한 육두품 근성을 가치중립이라는 야릇한 문구로 포장하는 위선에 우르르 동참한 셈이다.

그러나 "법이 다스리다"와 "법으로 다스리다"가 상극적으로 다르다고 보는 입장과 토씨 하나가 다를 뿐 별 차이 없다고 보는 입장이 대치할 때 가만히 구경만 하면 중립이 될까? 힘과 옳음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입장과 같다고 주장하는 입장이 대치할 때 방관하는 것이 중립일까? 이걸 중립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웃집에 강도가 들어도 구경만 하는 것이 중립이라는 말과 같다. 힘이 옳음을 잡아먹어도 중립을 지킨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중립은 강도가 내 집에 들어와 셋방 사는 젊은이를 털어도 구경만 하는 것이고, 내 딸 아이를 겁탈해도 구경만 하는 것이며, 마침내 나를 죽여도 구경만 하는 것과 같다.

동양과 서양의 법치가 다르다는 입장에는 둘 중 하나를 사회의 기본원리로 채택해야 한다는 함축이 깔린다. 그리고 민주공화국이라는 둥,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는 둥, 법관은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한다는 둥, 헌법의 조문들을 보면 서양의 법치이념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애당초 입헌주의라는 발상 자체가 서양에서 법치주의의 한 계기로 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 거울에 비친 대법원 모습. ⓒ뉴시스

제헌헌법에서 제5공화국헌법까지는 입헌주의를 향한 인민의 주권적 결단이 빠져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87년 헌법은 인민의 적극적이고 명시적인 의사에 따라서 만들어진 소산이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87년 헌법을 깡그리 무시하고 사법제도 전체가 진시황식 법치의 도구로 전락하는 일대 퇴행이 줄을 잇고 있다. 광우병 이야기가 불안하고 기분 나빠서 촛불을 들고 나선 사람들을 진압하겠다는 발상부터가 그랬다. 헌법에 보장된 언론의 자유를 반대자에게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배짱이었던 셈이다.

촛불이 일단 잠잠해지자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촛불 시위관련 재판에 대해 압력이 있었고, 집시법 제10조가 위헌 아니냐고 제청한 판사는 결국 사표를 냈고, 광우병 의혹을 보도했던 MBC의 피디는 체포되었다가 국내외의 거센 비판여론 덕택에 석방되었다. 낙하산 인사로 KBS와 YTN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종이신문으로는 종말이 훤히 내다보이는 우익신문사들에게 방송으로 변신해서 살아남도록 물꼬를 마련해 줄 미디어법을 시도하면서, 이에 항의하는 YTN의 노조위원장을 체포했다. 용산참사에 관한 국민참여재판은 검찰의 사보타지에 중립을 지킨 법원 덕분에 무산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집회는 두 달 넘게 원천적으로 봉쇄당하고 있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 한다"고 명시한 헌법조문이 있는 나라에서 실정이 이와 같다.

촛불에 덴 대통령의 심중을 미리 헤아려서 법조계가 권력의 방패막이 노릇을 자처하고 나선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 법조인력 양성 시스템이 진시황식 법치이념을 기반으로 삼고 있어서 그런지, 또는 어떤 다른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흘러가는 방향이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법치가 아니라 2천3백년전 상앙이나 이사의 법치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고 할 때 나쁜 징조와 좋은 징조가 하나씩 떠오른다.

나쁜 징조는 주로 우리 사법부를 지금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에 해당한다. 정치적 논쟁, 이념에 관한 논쟁이 곧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도덕적 가치에 관한 논쟁임을 보지 못하고 기계적인 중립만을 고수하던 사람들이 점점 정치공방의 한 가운데로 말려들어가는 모습이 딱하다는 뜻이다. 요새 국민들은 바보가 아닐 뿐 아니라 기억력도 좋아서, 2004년에 "불문헌법"을 창시해낸 우리 헌법재판소의 놀라운 상상력을 잊지 않고 있다. 미네르바의 글에서 "인과관계"를 발견하고 용산에서는 "배후조직"을 투사하고 피디수첩에서는 "명예훼손"을 구성하는 검찰에서부터 "성문헌법 국가에서 불문헌법을 개정할 때 거쳐야 할 절차"를 세계 최초로 정리해서 가르쳐준 헌법재판소에 이르기까지, 사법 권력을 인민주권으로부터 위임받은 율사계급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점점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내가 보기에는 좋은 징조이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해서 아주 좋은 징조라는 말이다. 사법 권력에 대한 의심과 관심과 검토가 정치담론에서 주요 의제로 떠오른다는 것은 경찰과 군대라는 무력으로 권력이 상징되는 시기가 지난 다음에 반드시 자동적으로 찾아오는 역사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쟁점이 벌거벗은 무력대결로 결판나던 시대가 지나고 법정공방으로 가름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표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장자연 리스트나 박연차 리스트도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미네르바에게 걸린 소위 "허위사실유포죄", 용산 참사 관련 피의자가 뒤집어 쓴 "과실치사죄" 등에 관한 재판은 물론이고, 전여옥 의원에 대한 "폭행" 사건, 신영철 대법관의 "재판관여" 혐의에 대한 대법원 윤리위원회의 재판, 야간옥외집회 금지에 관한 위헌제청사건, 피디수첩의 광우병 보도에 관한 "명예훼손죄" 사건 등에서 어떤 판결이 나고 사회적으로 어떻게 수용될지에 더욱 눈길이 간다. 재판은 오래 걸리기 때문에 언론의 끈질긴 추적보도가 절대로 필요하다.

그나저나 진 효공에게 법치를 바친 상앙은 거열형으로 사지가 찢겨 죽었고, 진시황에게 법치를 팔아먹은 이사는 요참형으로 허리가 두동강나서 죽었다. 반면에 서양식 법치를 실천하는 대법관들은 당대에 세상의 도덕과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죽어서도 대개는 높은 존경을 받는다.

일례로 미국의 27대 대통령을 지낸 태프트는 퇴임한 지 8년 후인 1921년에 연방대법원장직을 맡아 필생의 꿈을 이루고, 죽을 때까지 나름대로 법치의 파수꾼 노릇을 했다. 연방대법원장으로서 봉직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대통령을 지냈다는 기억도 없다"고 말했다는 전설이 있다. 자기가 대통령이었다는 사실도 기억이 안 날 정도라면 당시 현직 대통령이 누군지에도 별로 신경 안 쓰고 "양심"대로, 즉 선례와 조문의 범위 안에서 본인의 도덕과 가치와 정치적 신념에 따라 판단을 내렸기가 쉽다. 우리나라의 경우 역대 대통령 중에는 대법원장이 안 된 것이 훨씬 다행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대법원장 편에서라도 대통령 눈치 따위는 안 본다고 장담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정치적 신념이라고는 없이 권력에게 "중립적으로" 순응하는 인종들에게 그 귀중한 자리가 돌아가서는 그런 날이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법이 다스린다"는 의미의 법치주의가 확립되지 않은 나라에서는 법치주의라는 가치야말로 무엇보다도 소중한 정치적 신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법으로 다스린다"는 소리가 무슨 신념이 될 수 있는지는 그런 것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알 일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은 없다. 법치를 "법으로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는 소리를 입에 담는 사람 중에 법과 권력과 민주주의에 관해 형편에 따라 입장을 바꾸지 않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강자에게 굴종해서 불법과 불의와 악행이라도 앞잡이노릇을 하겠다는 노예근성일 뿐이다.

/박동천 전북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