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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텅 빈 말, 넘치는 말 / 고명섭

강산21 2009. 3. 25. 01:18

 
[한겨레프리즘] 텅 빈 말, 넘치는 말 / 고명섭
한겨레프리즘
한겨레  고명섭 기자 

 
정치인 유시민씨의 <후불제 민주주의>가 베스트셀러가 됐다. 유시민씨야 과거에도 인기 있는 작가 축에 속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치인의 책이 베스트셀러 목록 최상단에 오른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 책은 요약하자면, 말에 관한 책이다. 말의 욕망에 관한 책이자 말의 패배에 관한 책이다. 유시민씨는 자신을 실패한 정치인으로, 자신이 가담한 참여정부를 실패한 정부로 인정한다.

 

돌이켜보면, 참여정부 좌초의 근본 원인은 ‘일관된 우왕좌왕’에 있었다. 당시 대통령이 공공연히 발설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형용 모순의 사고 안에 깃든 정신적 혼란과 실천적 파행이 정부 실패의 근본 원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덜하지 않은 원인이 있었으니, 바로 말이었다. 쓸데없이 공격적이었고 쓸데없이 격정적이었다. 오래 배앓이한 말들이 마구 쏟아졌다. 말이 넘쳤다. 말의 과잉 때문에 국민은 질렸고 민주파는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는 반민주의 복귀와 활보다.

 

말은 기표(시니피앙·겉말)와 기의(시니피에·속말)의 결합이다. 소리 안에 의미가 담겨야 말이다. 참여정부의 말이 기의가 기표를 뚫고 터져나오는 과잉 언어였다면, 다시 말해 내 참뜻을 알아 달라는 절규였다면, 지금 정부의 말은 말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겉과 속이 어긋나고, 소리와 의미가 따로 논다.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가 없다. 기의 없는 기표의 텅 빈 언어가 이 정부의 말이다. 말이 의미를 잃으면 신뢰도 함께 잃는다. 이 점에 관해 유시민씨가 정확하게 썼다. “이명박 대통령은 말이라는 중요한 무기를 잃어버렸다. 대통령의 말을 믿는 국민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정부의 텅 빈 말은 숱한 곳에서 거품처럼 터진다. “선거 때 후보가 무슨 말을 못 하느냐.”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기간 중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의지를 밝힌 것을 두고 대통령이 한 말이다. 권력을 잡을 수만 있다면 무슨 소리든 해도 괜찮다는 발상이 여기서 얼떨결에 드러났다. 대한민국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로 시작하는 선서를 한다. 이 다짐이 먼지처럼 부유한다. 헌법의 기본권 조항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표현의 자유가 눌렸고, 집회의 자유가 막혔다. 대통령은 “존경받지 못하는 국민이나 국가가 되지 않을까 두렵다”는 말도 했다. 존경받는 나라가 되려면 먼저 인권이 선 나라가 돼야 한다는 건 상식이다. 대통령이 그 말을 하는 중에도 정부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어떻게든 우그러뜨리려 하고 있다. 최소 인권이라 할 철거민의 생존권이 난폭하게 철거당했다. 타 죽어 원혼이 된 이들이 아직도 차가운 영안실에 있다. 인권이 망가지는 와중에 ‘존경’을 이야기하는, 말들의 이 자기배반이 대한민국 정치언어의 실상이다.

 

법치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텅 빈 언어를 목격한다. 법치는 본디 인치의 대립어다. 사람이 멋대로 다스리는 상태를 끝내고 사람의 자리에 법을 놓은 것이 법치다. 권력자가 법을 따르는 것이 법치의 출발이다. 대통령이 헌법을 우습게 알면서 국민을 향해 ‘법치 확립’을 떠드는 것이야말로 법치 모독이다. 참된 말은 소리와 의미, 겉말과 속말이 하나를 이룬 꽉 찬 말이다. 정치의 생리상 그 세계 안에서 꽉 찬 말을 찾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꽉 찬 말만이 사람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남길 수 있음도 분명하다. 기의를 잃어버린 기표의 세계, 신의 없는 말들이 만들어 놓은 그 텅 빈 기만의 공간에서 부패가 자란다. 국민이 병들고 나라가 삭는다.

고명섭 책·지성팀장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