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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문제와 교육문제는 죄의 문제

강산21 2009. 2. 21. 11:59

토지문제와 교육문제는 죄의 문제
입력 : 2009년 02월 18일 (수) 14:20:58 [조회수 : 566] 고영근 (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우리나라의 토지문제 해결을 위해 토지정의 운동을 하면서 한 가지 깨닫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남들이 부동산 투기를 하면 곧잘 그런 사람을 욕하곤 합니다. 특히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들은 자기 주위에 '누구누구가 부동산 투기를 했다더라'하는 말을 들으면 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정죄하거나,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왠지 은혜가 떨어진다고 느낍니다.

“부동산 투기나 하면서 무슨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그런데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을 보고 이런 분노를 느끼는 사람의 마음이 과연 불의를 미워하는 ‘거룩한 분노’일까요? 사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의 마음 바탕에는 ‘거룩한 분노’보다는 대부분의 경우 ‘질투에서 나온 분노’가 깔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은 괜찮지만 남이 하는 것은 못 봐주겠다는 마음입니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질투해서 그런 것이고, 누군가를 질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이나 하는 것을 내가 못 가졌거나 못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부동산 투기자를 미워하는 우리 국민의 마음속에는 “너 같은 사람 때문에 내가 가난하다”라는 피해의식과 함께 “나도 너처럼 부유해지고 싶다”라는 질투와 시기가 깔려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부동산 투기를 한 그 사람들처럼 부유하지 못하고 그 사람들로 인해 내가 피해를 받는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들에게 분노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질투라는 이러한 감정의 뒷면에는 교만이라는 죄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질투는 본질적으로 교만과 동의어입니다.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살 때에는 열등감이나 질투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인간을 유혹했을 때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과 비교하게 되었고 곧 자신에 대한 열등감과 함께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질투와 교만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피조물인 자신이 오히려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고 싶어 하는 질투와 교만의 원조 ‘대(大)마왕’입니다. 따라서 열등감 혹은 질투는 교만과 같습니다. 

 

교만은 본질적으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거나 더 높아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건 얼마나 높건 상관없이 무조건 다른 사람보다 더 많거나 높아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자기보다 많이 가졌거나 높은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만족할 수도 없고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사실 열등감과 질투, 교만은 타락한 우리 인간 모두에게 있는 원죄입니다. 

 

토지문제와 교육문제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그렇다면 이런 열등감과 질투, 교만을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불의를 미워하는 제대로 된 ‘거룩한 분노’를 느낄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교만의 대마왕이 사탄이라면 겸손의 대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열등감과 질투로 인해 높아지고 싶어 하는 교만한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때론 분노하셨습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도 불같이 분노했고, 선지자들도 분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을 보면 베드로도 바울도 모두 분노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비롯해 이들이 분노하는 것과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에는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이지만 인간의 분노는 이기적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과 선지자들, 제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절대 분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되고 어그러져 가난하고 연약한 우리의 이웃들이 고통당할 때 예수님과 선지자들, 제자들은 불같이 일어나 분노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거룩한 분노’는 분노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더 가깝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시기와 뽐냄, 교만에서 나오는 분노는 사랑에서 나오는 거룩한 분노가 아닌 원죄에서 나오는 죄의 모습입니다. 또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의 이익 때문에 분노하고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가 아니라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불타는 심장으로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새 비교하고 열등감에 빠지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분노하는 죄 된 모습의 초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배부른 돼지’를 부러워하면서 질투와 분노로 인해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배고픈 돼지’같은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배부른 돼지’처럼 잘 살지도 못하면서 질투와 교만으로 인해 미워하고 분노하는 비참한 모습의 ‘배고픈 돼지’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이 세상만을 생각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걸었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고전 15:19> 

 

토지문제와 교육문제를 사로잡고 있는 죄(罪) 

우리사회에서 절대로 해결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토지문제와 교육문제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런 비교와 질투, 교만이라는 죄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죄가 얼마나 뼈 속 깊이까지 파고들어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속담입니다. 이러한 죄의 문제는 구원받았다고 자칭하는 우리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나보다 다른 사람이 잘 사는 꼴을 보지 못하고 내 자식이 남의 자식보다 뒤처지는 것을 참지 못한다면 교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바보)’와 ‘배부른 돼지(도둑)’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비극적인 사회적 강요는 없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배부른 돼지’를 부러워하는 ‘배고픈 돼지’와 머리는 진보이지만 뱃속은 속물인 소위 강남좌파와 같은 ‘배부른 소크라테스’도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면 우리 모두 ‘하나님 안에서 그날그날 배부르고 행복한 소크라테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모두 질투와 교만의 치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있어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서 겸손과 낮아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영혼도 쉼을 얻고, 다른 사람들도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에 쉼을 얻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 우리나라의 토지문제와 교육문제를 사로잡고 있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나라도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최종편집 : 2009년 02월 18일 (수) 17:3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