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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란님의 주례사

강산21 2008. 11. 25. 14:49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지난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사람 하나가 세상에 나아가 제 몫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에 숙연해 질 때가 많습니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역량은 세상의 가파른 변화만큼 달라지지 않습니다. 여전히 사람이 약한 존재로 세상에 내 던져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어쨌든 아이들은 자라나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기나긴 과정을 겪습니다. 복잡한 현대사회 안에서 한 사람이 어른으로 입문하는 과정은 윗사람들의 기준보다 훨씬 더 힘들고 벅찰 것입니다.


여기 두 사람의 아름다운 젊은이가 이제 어른이 되어 먼 길을 함께 걸어가겠노라는 약속을 하기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중략)

 

오랜 시간 신랑 되시는 분을 지켜보면서 참으로 아름다운 젊은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빛나는 인품을 가지고 있으되 나서는 법이 없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궂은일은 항상 앞장서서 행하며 생색을 내는 법이 없습니다.  세상의 불의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며 사람에 대한 배려와 따뜻함을 잃는 법이 없었습니다.

 

(중략)


제가 결혼식 주례라는 제 인생에 있어서 절대로 맞게 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역할을 즐거이 떠 맞게 된 것은 이 두 젊은이의 아름다움에 진실로 반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두 젊은이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나 결혼이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혼은 환상이 아니라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안에서 두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은 대단한 지혜와 관용을 요구합니다.

 

이제 두 젊은이는 혼자 따로따로 있을 때 아름다웠던 상태를 둘이서 함께 있으면서 유지시키고 고양시키기 위해서 인생의 실험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대학원 실험실과는 사뭇 다를 것입니다.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각오 단단히 하십시오.


저는 때로는 다른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은 왜 사람을 여자와 남자로 만드셨는가? 그 때문에 온갖 복잡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냥 딱 하나의 성만을 만드셨더라면 서로 그리워하는 일도 없을 터이고 또 만나고 헤어지는 고통도 없지 않았을까.

 

그러나 달리 짚어보면 하느님께서 이렇게 사람을 여자와 남자로 만드신 데는 심오한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말해줄 마지막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타인의 존재를 보고서야 비로소 완성해 가는 개념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존재의 결핍이 사실 완성을 향한 눈부신 계기라는 것을 숙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결핍의 신비 그것이 결혼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역설적인 신비입니다.

 

또한 그것은 신앙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결핍에 대한 겸손한 깨달음을 통해 하느님의 완성에 대한 날카로운 메시지를 완성합니다.


“두 사람의 앞날에 빛나는 길만이 함께 합니다”라고 말했으면 좋겠지만 그런 덕담이 사실 이루어지기 힘든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마세요. 내가 운명보다 강해지면 운명은 내 손안에 들어오니까요.


저는 “고통을 주지 마십시요”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고통을 이겨 낼 힘을 주십시요”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편이 만인에게 공평 하셔야 할 하느님을 덜 괴롭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서로에게 결코 양보하지 마십시오.

 

한사람이 한사람에게 양보하면서 한사람만 살고 다른 사람은 죽는 부부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면서 함께 성장하는 부부가 되길 바랍니다. 안일한 부부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합리적인 소통이 이루어지는 관계로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기만적인 평안보다는 갈등을 통과하면서 이루어지는 진실한 소통이 훨씬 더 낫습니다. 저는 희생과 인내보다는 경쟁과 대화를 권하고 싶습니다. 서로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지적 자극을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서로주고 받으며 내면에서 끊임없이 새로움이 필요하며 나도 쓰고 남편과 아내에게 퍼주고도 남는 풍요로운 농원을 가꾸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가정만의 이기적인 닫힌 가족이 되지 마시고 공동체의 고통에 끊임없이 마음을 기울이며 보다 나은 세상을 가꾸기 위해서 대범하게 걷어 부치고 나서는 열린 가족을 이루기 바랍니다.


세상이 아파할 때 아파할 줄 아는 가족, 고작 백년도 못되는 덧없는 현세의 시간에 목매달지 말고 인간세상을 멀리, 그리고 깊이 있게 바라볼 줄 아는 시간의 세로축과 가로축을 관통할 줄 아는 가족을 이루기 바랍니다.


한 가족이지만 능히 한 마을의 역할을 하는 가족을 이루기 바라며.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앞날을 축하하면서  제가 만든 시 “눈 내리는 마을”의 한 구절을 읽어 드리려 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이런 마을의 모습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눈 내리는 마을

 

김정란

 

일년 내내 눈 내리는 마을이 있어요

거기선 눈물을 흘릴 수 없지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가슴의 깊고 끈적거리는 물이

희고 가벼운 날개로 바뀌어 버리거든요


그 마을의 하늘엔 늘 해 두 개 달 두 개가 떠 있어요

밤도 낮도 없어요 그리곤 반짝이는 눈이

하루종일 조용히 조용히 내려요

눈은 쌓이지 않아요 한 번 있었던 걸로 족하다는 듯

바닥에 닿으면 아슴하게 사라져요

마을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아요 그냥 조용해요

그 마을은 어떤 빛으로 빛나는데요

저절로 빛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어디서 빌려온건데

아무도 어디서 빌려왔는지 몰라요

아마 가슴의 상처 밑에 고여 있던 걸까

그 상처가 이상한 말의 통로라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거든요

그 통로를 통해서 그 마을 사람들이

천 년 전과 천 년 뒤로 말을 보내고 받는다고들 하거든요

그 말들이 어쩌면 맥락과 맥락 사이에서 빛을 만들어낸 걸까

아주 먼 곳에서 시작된 빛을 받아서?

아 그래요 아직 공식화된 건 아니구요

 


그 빛은 안에서 밖에서 빛나요

아주 이상한 빛이에요

그건 먹을 수 있어요

먹으면 배가 부르냐구요 아뇨 그렇진 않아요

그냥 진실에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죠

 

그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집 안에서 살면서 집 밖에서 산 답니다

모두들 너무나 사랑해서 그래요

그 마을 사람들 살을 보셨어요?

만지면 살짝 지워져요 만지는 사람을 받아들이느라고 그래요

그리곤 다시 생겨나요 다시 주기 위해서요

내가 당신 어깨에 머리를 올려놓으면

내 머리에 맞게 당신 어깨가 안쪽으로 물러서요

그리곤 당신 팔이 내 허리를 안으면

내 허리는 툭 잘려요 소리까지 들리는걸요

싸래기 눈 바삭바삭 소리내며 동구 밖에 찾아오는 것처럼


그 마을에 살러 가시지 않을래요?

흰 눈 종일 조용조용 내리고

상처들이 비밀스럽게 편지를 주고받는 곳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상한 빛을 생산하는 기이한 발전기가 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