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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과의 만남]“외교안보·경제 ‘컨트롤 타워’ 약해 정책 신뢰 흔들려

강산21 2008. 10. 21. 11:05

[경향과의 만남]“외교안보·경제 ‘컨트롤 타워’ 약해 정책 신뢰 흔들려”
입력: 2008년 10월 20일 18:00:23
 
ㆍ정치일선 떠난 뒤 첫 인터뷰 이해찬 前국무총리

정권이 교체된 지 8개월 가까이 지났다. 지난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정부·여당은 한국 사회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개조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 결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파문, 남북관계 경색, 부동산 관련 세제 개편, 미국발 금융위기에 대한 대처, 쌀 직불금 문제까지 각종 현안에 대한 신·구 국정운영 세력 사이의 책임 다툼이 계속되고 있다.

이해찬 전 총리가 지난 19일 여의도의 재단법인 ‘광장’ 사무실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평가, 한반도 평화체제의 전망 등에 대해 밝히고 있다. <박민규기자>
격렬한 공방전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맨 앞자리에 있음직한데도 빠져 있는 이름이 있다. 참여정부 최대 ‘실세’였던 이해찬 전 총리다. 이 전 총리는 지난 1월 대통합민주신당(열린우리당의 후신이자 민주당의 전신)을 탈당, 자신이 만든 연구단체 ‘광장’에 머물며 말을 아껴왔다.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를 사절해온 이 전 총리를 지난 19일 만났다. 이 전 총리는 신·구 세력 사이의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는 현안을 두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과 조언을 섞으며 의견을 피력했다. 참여정부의 공과, 민주당의 현주소에 대해서도 날것의 입장을 토로했다.

-이명박 정부 8개월을 평가하신다면.

“이제 일들을 개시한 수준 아닙니까. 아직 평가하긴 이릅니다. 다만 정책에 대한 신뢰 문제가 크게 우려됩니다. 정책이 신뢰를 얻으려면 균형·일관성과 함께 내용이 견실해야 하는데 부실한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특히 외교안보 분야와 경제 분야의 컨트롤 타워가 약합니다. 그러다보니 부처마다 손발이 안맞고 방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정부가 방향을 잘 잡았다고 보는 부분이 있습니까.

“행정구역 개편 같은 것은 아주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오랫동안 잘못된 행정구조를 가지고 있어 폐해가 많습니다. 그걸 바로잡으면 행정제도뿐 아니라 지역주의라든가 지방자치단체 자율성까지 크게 개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만 해결해도 국가적으로 큰 업적을 쌓은 것이 될 것입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국내 경제가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엄밀히 말하면 ‘수출주도형 재벌중심 경제’입니다. 수출의존도가 매우 높은데 중소기업과 내수기반은 아주 약합니다. 따라서 세계경제에 의존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그게 우리 경제 실정입니다. 경제위기라고 하는데 갑자기 내수경기가 부양되는 것도 아니고 세계경제 위기가 갑자기 약화될 순 없는 것 아닙니까. 참여정부에서 역점을 뒀던 것 중 하나가 북한과의 남북경제협력의 비중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우리 기업들이 자원도 확보되고 북한 노동력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특히 우리 토목건설업은 북한의 사회간접자본(SOC) 건설 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활로를 열어나갈 수 있습니다. 10·4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음 정부가 집행할 것을 사전에 조성해준 것이죠. 그걸 거부하고 남북관계가 경색된 것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10·4정상회담을 합의하는 방향으로 잡아서 중소기업이나 건설사들을 더 많이 진출시켜야 합니다.”

-종합부동산세 등 부동산 관련 제도 입안의 책임자였는데 이 문제가 정기국회 최대 쟁점입니다.

“종부세 같은 경우는 기왕 이렇게 된 것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그냥 모른 체 하고 가면 됩니다. 그러면 지방정부 재원도 2조원 정도 유지되는 것이고, 더구나 종부세 개정하라는 국민여론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욕먹으면서 해놓은 것이 자기들한테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종부세 중에서 불합리한 요소가 있다면 그건 개선하면 됩니다. 가령 1가구 1주택자가 다른 소득이 없어서 종부세가 부담이 된다고 하면 과세이연을 해 주면 됩니다.”

-남북관계의 냉각기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부가 남북관계에 관해 노태우 전 대통령 때부터 해온 정책 기조를 거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남과 북이 함께 합의할 수 있는 사항을 해야 합니다. 북의 요구가 뭔지 확인을 하고, 우리가 그 요구 가운데 무엇을 수용할 것인지 제시를 해줘야 합니다. 북측이 계속 요구하는 게 10·4정상선언을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정상회담 합의 이행에 관해 협의를 해야 합니다. 바로 이행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고 일정한 조건이 있어야 이행할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초기의 판단과 정책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에 빨리 수정해야 합니다.”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고 북한도 핵불능화 재개를 선언했습니다.

“이게 될 거냐, 말 거냐는 북한이나 미국, 6자회담 관련국들의 이해관계가 맞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테러지원국 해제 자체가 상호간에 어느 정도는 이해관계의 합의에 의해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그 이후 이뤄질 에너지 공급이나 경제지원이 어떻게 이뤄지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결국은 북·미수교까지 가고 그 다음 한반도에 종전선언, 평화체제 수립까지 갈 터인데 시간은 예측할 수 없지만 방향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동북아 평화체제를 역설하고 있는데 구상과 전망을 설명해 주십시오.

“세계가 다극화의 흐름으로 가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체제에서 미국 일극체제로 갔다가 유럽연합(EU)이 등장하고, 속도가 아주 완만하지만 다극화로 이행해 가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북아가 다극 중 중요한 일극이 됩니다. 그런데 주변국들은 다 강대국들입니다.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를 갖추지 못하면 제일 불안한 게 남북한입니다. 우리가 그런 나라들하고 군비경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 주도해서 동북아 다자안보체제를 역설하고 군비를 통제해 평화체제로 가지 않으면 우리 경제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거절할 명분은 없기 때문에 우리가 공감의 폭을 넓혀가면서 지속적으로 추진하면 장기적으로 정착돼 나갈 수 있습니다.”

-민주당 지지율이 침체 상태입니다.

“지난번 대선·총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민주당의 지역성이 오히려 강화됐습니다. 과거 열린우리당 때보다 더 심해졌지요. 충남·대전과 영남에서 후보자를 못 낼 정도로 지지기반이 약해졌습니다. 두 번의 선거과정에서 호남표만 다 모으면 당선된다는 발상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이건 스스로를 지역주의에 가두는 발상입니다. 지지층이 지역적으로도 더 좁아졌고, 개혁 성향 지지층이 이탈한 것입니다. 현재처럼 안주해선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참여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솔직히 평가하신다면.

“성과를 먼저 얘기하자면 정경유착은 거의 없어진 것 아닙니까. 정권 끝나고 8개월간 전방위로 수사를 하는데 정경유착 사례는 안나오고 있습니다. 시장경제도 비교적 정립됐습니다. 특정기업을 위한 편향된 정책을 편 적이 없었습니다. 선거공영제가 확립됐고 남북관계도 우리가 주도해서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만들었습니다. 기초노령연금제·사회보육시설 강화 등 사회안전망도 어느 정도는 체계를 잡았습니다. 지역균형발전 전략도 정립했죠. 한계점들은 우선 사법개혁이 좀 늦었고, 지역구도를 거의 개선하지 못했습니다. 공정보도하는 언론환경도 거의 확립하지 못했습니다. 편향된 보도가 계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민주개혁진영의 역량이 보수진영보다 약한데 지난 5년간 연대라든가 이런 것을 통해 민주개혁진영 역량을 강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갈라졌습니다.”

-탈당 직후 총선을 앞두고 창당을 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습니다.

“당시 창당을 하자는 주장이 일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창당할 만한 역량이 못됐고, 저는 그렇게 창당을 해서 일이 풀어진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점에서 자칫하면 민주당이 더 분열된 모습으로 갈 것 아닙니까. 창당하자는 여론을 일부러 막은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인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계를 은퇴한 것입니까.

“정치라는 게 꼭 정당에서 해야 하고, 정당이 아니면 정계은퇴인 것은 아닙니다. 정치란 게 결국 국가 일에 관여하는 것 아닙니까.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에 필요한 일을 하면 그게 정치입니다. 저는 국회의원을 5번이나 했기 때문에 국회의원 한 번 더 하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하면 출마할 수 있겠지만, 필요치 않은데 구태여 국회의원을 하기 위해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해찬은 누구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중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투옥, 80년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투옥됐던 재야운동권 출신이다. 88년 평화민주당에 입당, 17대 국회까지 20년 동안 서울 관악을에서 내리 5선 의원을 지냈다. 야당과 여당 시절 정책위의장을 세 차례 역임한 것을 비롯해 조순 전 서울시장 당시 정무부시장, 김대중 정부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 국무총리를 지내는 등 ‘정책통’의 길을 걸어왔다.

참여정부 국무총리 시절 천성산 터널, 행정중심복합도시, 방사선폐기물처리장 등 굵직한 갈등 현안들을 처리하며 수완을 발휘했으나, ‘3·1절 골프 파문’을 계기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지난해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계승론을 내걸고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으나 탈락했다.

지난 1월 대통합민주신당 대표로 손학규 전 경기지사가 당선되자 “내 정치 인생은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오랜 맞섬일 수밖에 없다. 손 대표가 이끄는 당은 자신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어떤 정체성도 없이 좌표를 잃은 정당으로 변질될 것”이라며 탈당, 사실상 정계를 은퇴했다.

<김재중기자 herme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