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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평화체제와 사회 대통합(이해찬)

강산21 2008. 10. 18. 19:22

동북아 평화체제와 사회 대통합

 

                                                      

 

            전 국무총리 이해찬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어느덧 29주년이 되었다. 1979 10 16,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교내시위에서 발화된 민주화 시위는 곧이어 부산과 마산, 창원 지역의 시민들이 합세한 대중적인 반독재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10 18일 자정, 부산지역에 위수령이 선포되고, 곧이어 마산 창원 지역에까지 군대가 투입됨으로써 부마 민주항쟁은 막을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부산과 마산 지역의 민주항쟁은 결코 붕괴될 것 같지 않던 유신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는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나침반이 되었다. 

안타깝게도 부마항쟁의 성과는 국민들이 열망하던 민주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신군부에 의한 권력 찬탈이라는 비극적 운명을 맞고 말았다. 그러나 부마항쟁과 같은 민주화 운동의 축적된 전통이 있었기에 신군부의 시대는 박정희의 시대만큼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87 6월민주항쟁으로 우리는 정치적 민주화를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고, 마침내 97에는 민주공화국을 수립한 이래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 

29주년을 맞은 지금, 청년세대에게 부마항쟁은 먼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부마항쟁은 독재정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그리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최소한의 권리를 얻어내기 위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세대는 독재로부터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밑바탕에는 이전 세대의 피와 땀과 눈물이 서려 있다. 이들의 고결한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길고 험난했던 민주화 운동의 결과 민주개혁 세력은 지난 10년 동안 집권이라는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민주 세력의 집권은 진보진영의 역량이 그만큼 성숙해서라기보다 선거에서의 전술과 기획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수십 년간 지속된 보수 정권에 대한 환멸, 권력자들의 부패와 강압적 통치체제에 대한 반발,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민주 세력에 대한 기대가 국민적 지지로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이 모두 지역적 구도를 선거 전략으로 활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한계를 안고 출범한 민주정부는 당장 IMF 금융위기로 부도 상태에 빠진 한국경제를 되살려야 했다. 권위주의 통치체제를 탈피하고 민주주의를 더욱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했다. 또한 냉전시대의 시각에 얽매여 보수 세력이 파행과 교착의 상태로 끌고 온 남북관계에 평화의 기틀을 마련해야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지난 민주정부 10년 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한층 성숙하여 사회 각 분야에서 다양성과 자율성이 신장되었다. 남북관계에 평화와 상생협력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금융위기를 빠른 시간 내에 극복하고 어느 정도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10년의 성과가 만족스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민주개혁 세력은 집권 기간 동안 수구보수 세력으로부터 집중적인 비판에 직면해 있었다. 비판의 표적 중 하나는 경제 분야였다. 보수 세력은 남북문제뿐 아니라 경제 분야에서도 그들의 유일한 무기인 이념적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특히 보수 세력은 1980년대부터 전 세계에 파급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를 등에 업고, 경제 분야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들의 논리가 정당성을 획득하고 있느냐의 여부를 떠나, 보수 세력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명박 정권의 출범이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다.    

진보 세력은 지난 대선에서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민주개혁 진영의 일시적 승리를 과대평가하고 거기에 안주해 온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97년과 2002년의 선거에서처럼 전술과 기획을 통한 승리만으로는 진보진영의 지속적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진보진영의 새로운 프레임이 필요하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최근 보수 세력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유를 프레임(Frame) 이론으로 설명한 바 있다.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 할 수 있다. 상대편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말할 때, 코끼리는 하나의 프레임이 된다. 우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코끼리’를 떠올림으로써 상대편이 만들어낸 프레임에 걸려드는 것이다. 상대의 프레임을 사용하면 결코 우리의 프레임을 만들어낼 수 없다. 더구나 한 번 만들어진 프레임은 상식으로 통용되기 때문에, 우리가 만들어내는 반대 프레임을 억제한다. 이때는 상대편의 프레임을 부정하는 행위도 그 프레임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으로 생각하고, 대응해온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보수주의자들은 ‘반시장주의, 좌파, 규제 완화, 작은 정부, 민영화, 효율성, 성장’ 등과 같은 프레임을 생산해냄으로써 진보진영을 효과적으로 공격해왔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 가장 성공한 것은 ‘세금 폭탄’이라는 프레임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프레임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이 용어들은 결국 ‘시장에 의한 지배, 서민 복지의 축소, 생태환경의 파괴, 가진 자들에 대한 편의 제공, 소유권의 극대화, 공공서비스의 축소, 무한경쟁, 사회적 약자의 도태’를 의미한다.       

부마항쟁 당시 우리의 프레임은 ‘자유, 정의, 반독재, 민주화’였고 이는 성공적인 프레임이었다. 그러나 29년이 지난 지금에는 이 프레임으로 보수 세력에 대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지금 우리는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최근 수십 년간 일어났던 가장 놀라운 변화 중 하나는 진보의 소중한 가치였던 ‘자유’의 개념을 보수주의자들에게 빼앗겼다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자신들의 보루처럼 여기고 있다.  이제 자유는 ‘신체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시장의 자유’로 통용되고 있으며, 보수 세력은 스스럼없이 자신들을 자유주의자로 부르고 있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는 규제 철폐, 무역과 자본 이동의 자유화, 공기업의 민영화를 주창하고 있다. 그러나 시장 지상주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최근의 미국 금융위기에서 쉽게 알 수 있다. ‘규제’라는 말은 잘못된 프레임이다. 보수주의자들이 규제라고 부르는 것은 시장의 실패를 방지하기 위한 질서체계인 경우가 많다. 그들은 관료사회의 경직성으로 빚어진 불합리한 사례들만을 예로 들며 규제 철폐를 부르짖고 있지만, 실제로 노리는 것은 시장과 자본의 통제 받지 않는 자유이다. 이때 사회적 약자들의 자유는 완전히 무시된다.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이후 전 세계로 전파되어 1980년대 영국의 대처 수상과 미국의 레이건 정부에 의해 채택되었다. 영미 보수정권은 ‘작은 정부, 큰 시장’을 모토로 복지정책의 축소, 조세 감면,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신자유주의는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추진한 정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일반적 평가이다.         

신자유주의 이론이 냉전시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지적 대부라 할 수 있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로버트 노직의 자유주의 논리는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시장이 민주주의에 우선한다는 이들의 논리는 사회주의가 한계를 드러내던 시기에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이들은 예언가로 대접받았으며, 시장이 어떤 질서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을 전파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시장 질서를 비판하기만 하면 ‘좌파’로 매도하고 있다. 이들은 진보진영을 반시장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하지만, 실제로 시장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진보진영은 시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질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질서가 없는 시장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무질서한 국제적 금융자본이 어떻게 세계 경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지는 서브 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인한 미국 월가의 붕괴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생존권 못지않게 소유권을 절대적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논리라면 언론의 자유마저도 재산권에 의해 제한될 수 있으며, 평등하게 교육 받을 권리도 재산권 앞에서 무너질 수 있다. 참여정부 시절 사립학교법과 언론 관련법 개정 문제에서 보수 세력이 조직적으로 반발한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우상 중 한 사람인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Capitalism and Freedom)』에서 ‘어느 누구도 평등주의자인 동시에 자유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들이 생각하는 자유의 개념 속에서는 이 말이 전적으로 옳다. 소유권의 자유를 생명의 자유만큼이나 절대적 자유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평등이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개혁 세력이 집권하는 동안 가장 뼈아픈 비판은 진보진영의 비판이었다. 특히 한미 FTA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참여정부가 신자유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했다는 비판을 받을 때는 참으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무역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핵심 이슈이긴 하지만, 수출 위주의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우리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할 때 외면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진보진영에서 주장하듯이 무역 자유화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산업이나 계층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위한 대안과 정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다.

이를 두고 신자유주의에 투항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감이 있다. 일부 진보주의자들은 국민들의 합리적 이성에 호소할 때 정책적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믿지만, 원리주의만으로는 국민적 지지를 얻기가 쉽지 않다. 이제 진보진영도 국민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새로운 프레임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보수정권에 투표하는 서민들이 비합리적이며 비이성적이라는 시각을 버려야 하며, 보수주의자들이 우둔하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보수주의자들은 의제를 선점하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동북아 평화체제의 구축이야말로 한국의 민주주의이고 경제다

 

민주개혁 세력의 집권 10년 동안 가장 뚜렷하게 성과를 보인 분야 가운데 하나가 남북관계이다. 그것은 정치와 사회 각 분야에서의 민주화의 심화와 확대 그리고 발전된 경제력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전된 남북관계를 바탕으로 우리는 미국과 북한을 설득하여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이끌어내고, 최종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에 이르는 프로세스를 설정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외교적 성공이 곧바로 가시적 실리로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중요 선거에서 국민적 선택의 기준으로 작용하지 못해왔다.  

그러나 60여년에 이르는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항구적 평화의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의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에 있어서 가장 관건적인 과제이다. 동북아는 남북간 그리고 북미간의 적대적 대립과 강대국들의 이해 접경 지역이라는 특성 등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군비가 밀집된 지역이다. 이러한 동북아의 군비 경쟁체제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는 늘 심각한 영향을 받아 왔다. 보수와 진보간의 이념의 대결과 적대적 분열, 과다한 군비로 인한 불합리한 자원 배분과 이에 따른 사회적 갈등 등이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에 장애로 작용했다. 그러나 또한 한국의 경제는 이러한 폭넓은 동북아 이해 당사국들의 역내 시장을 배경으로 성장해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지금의 세계정세는 남북과 북미의 대결관계를 종식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으로 전개되고 있다. 북한의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는 광경에서 보이듯이 북핵문제가 한 고비를 넘기고 있으며, 지루한 과정이 되겠지만 곧 6자회담이 다시 열려 핵무기 폐기와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평화체제에 이르는 3단계 과정이 다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북미, 북일 관계가 이처럼 진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의 관계는 꽉 막혀 풀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615 공동선언, 104 공동선언에서 합의한 사항의 이행을 놓고 남과 북의 입장이 달라 충돌의 조짐까지 보인다. 한미 간에도 쇠고기 협상이 잘못되어 어처구니없는 외교적 엇박자를 보이고 있고, 중국 쪽에서는 한미동맹에 치중하는 보수 세력의 외교정책을 과거 냉전시대의 유물이라고 평하는 등 냉기류가 시작되고 있다.

  대북정책을 지금 빨리 바꾸어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만드는데 남북이 주도적으로 나서지 못하면 민족분단이 고착화, 영구화 되는 과오를 범할 우려가 있다. 또한 북핵문제 해결,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문제에서 발언권을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고 경비만 부담하는 나라가 되기 십상이다. 가뜩이나 경제문제 등이 어려운 상황에서 북한, 미국, 중국과의 관계가 더 악화된다면 국가의 안정은 더욱 흔들릴 것이다.

  지금 이 시기야말로 우리 스스로 20세기의 냉전체제와 민족분단으로 인한 우리사회의 왜곡된 구조를 바로잡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여 온 국민이 전쟁의 공포와 방위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우리를 둘러싼 미 4개국은 우리보다 3~4배씩 많은 국방비를 쓰고 있는 세계 최대의 군사강국들이다. 동북아 평화체제를 통한 군비감축 없이는 우리의 안보와 국민의 생명이 언제든지 위협받을 수 있는 조건이다. 남과 북이 주도해서 미국과 중국을 참여시켜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 내면 이것이 곧 동북아 평화체제의 큰 축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닦아 놓은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와 성과를 살려서 남과 북이 공조하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상투적으로, 정치적으로 주장해 온 도그마에서 벗어나 변화하는 정세를 냉철하게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방향을 바로 잡는 진실성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이다.

동북아의 평화야말로 곧 한국의 민주주의이고 경제인 것이다.

 

사회적 대타협을 통한 통합의 시대를 제안한다

 

다음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장래를 위하여 제기하고자 하는 의제는 ‘사회적 대통합’이다. 우리가 당면한 통합 과제는 민족간, 계층간, 지역간 통합 등 모두가 중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우선 계층 간 통합의 문제만 언급하기로 하겠다.   

이번 대선에서 보수진영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주요 원인은 경제 문제에 있었다. 앞으로도 경제 문제는 정부 선택의 지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높다. ‘성장’은 언제나 매력적인 프레임이며, 보수주의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상당수의 서민들이 자신들의 삶과 무관한 보수정권에 표를 던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대선에서 보수주의자들이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것은 양극화의 심화와 부동산 가격 폭등, 세금 폭탄 같은 것들이었다. 객관적 통계로 볼 때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꾸준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물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은 사실이다. 외국자본의 요구로 인한 구조조정과 산업구조 개편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또 산업구조가 지식기반 구조로 이행하면서 지식노동자와 육체노동자의 소득이 양극화되었다. 참여정부는 조세와 복지정책을 통해 소득분배를 개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복지지출을 통한 양극화 해소가 한계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근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된 것이 청년세대의 일자리 문제이다.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양극화의 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시장 지상주의자들은 성장이 자연적으로 분배로 이어진다는 적하효과(Trickle-down effect)를 주장하지만, 우리는 지금 ‘고용 없는 성장’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고도 성장시대에는 성장이 곧 고용의 확대로 이어졌지만, 지금은 성장이 고용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이 점을 분명히 지적한 바 있다. 그는 모든 산업 부문에서 정보화가 신속히 이루어짐에 따라 2050년쯤이면 전통적인 산업부문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 전체 성인인구의 5%밖에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신기술 혁명으로 신규 고용이 창출될 것이지만, 청년 인구의 증가 폭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경제 주체들이 노동시간을 단축할 것인가, 아니면 인력을 감축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실제로 이런 일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기업이 필요할 때만 고용할 수 있는 비정규직 인력을 선호함으로써 노동계층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시각은 두 가지로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하나는 성장주의자들의 논리로, 소비 수준의 향상과 세계시장의 개방 그리고 제3차 산업혁명이 보다 많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앞으로 소수의 전문 지식인들만이 일자리를 찾을 수 있으며, 해고된 수많은 노동자들의 구매력 감소로 인해 생산 증대가 한계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의 종말이 반드시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제러미 리프킨은 오히려 노동의 종말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미래사회는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사회가 될 수도 있고, 소수만이 풍요를 누리는 극단의 양극화 사회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미래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현재의 경제상황에서 임금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결국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고, 다양한 일자리를 통해 개인이 아닌 가구 전체의 소득을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일자리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 주는 대신 취약계층에게 돌아갈 복지예산을 대폭 삭감하려 하고 있다. 이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복지혜택을 받는 사람들은 곧 실패한 인간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즉 복지 수혜자들은 게으르고 책임감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복지혜택을 주게 되면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업자나 취업 지원자들은 게으르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사회안전망은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각종 비용을 절감할 뿐 아니라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어 궁극적으로 기업에게 양질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그러나 확실한 해결책이 존재한다고 해도 한쪽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오늘날 진보가 보수에게, 보수가 진보에게 던지는 목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일자리를 확보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양쪽의 방법론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렵다. 사회적 대통합, 즉 이해관계자들이 모두 참여하는 사회적 대협약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협약을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강소국 아일랜드를 예로 들고 있다. 아일랜드의 인구는 우리나라의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고, 1980년대 후반까지 1인당 국민소득도 8천 달러 수준에 머물렀다. 산업구조 역시 감자 재배와 목축업이 주산업일 정도로 낙후되어 있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아일랜드는 강경과 투쟁 일변도의 노조활동으로 몸살을 앓았다. 결국 외국 자본 이 차례로 철수하면서 물가상승률이 20%, 실업률은 17%에 달했다. 그 결과 아일랜드는 우리나라보다 10년 이른 1987년에 IMF 구제 금융을 받음으로써 ‘서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이 시점에서 아일랜드 정부와 기업, 노동자는 극적으로 3년간 임금 인상을 2.5.%대로 제한하는 사회 대협약을 이루어냈다. 이후 아일랜드는 1987년 국가재건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1991년 경제사회진보 프로그램, 1994년 경쟁력과 고용 프로그램, 2003년 지속가능한 진보 프로그램 등 3년 마다 노사정 협약을 맺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아일랜드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의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사회 대협약을 추진할 때마다 극심한 진통과 갈등이 뒤따랐지만, 그들은 인내와 타협의 정신으로 진정한 사회적 진보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

 

경제의 효율성만을 추구해서는 우리가 꿈꾸는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없다. 대통합 사회는  시장경제의 효율적 작동과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동시에 추진되고 실현되어야 한다. 시장 지상주의자들의 이념대로 민주주의보다 시장이 우선한다면, 소득 불균형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극심한 불평등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야기함으로써 투자와 성장을 저해하고, 오히려 시장의 효율적 작동을 방해할 것이다. 또 소외 계층의 사회적 불만족은 시장주의자들이 그토록 수호하고자 하는 소유권에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현대사회는 시장만으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질서가 없는 시장은 욕망의 투기장일 뿐이다. 따라서 국가는 개인적 이기심과 욕망이 시장을 교란하지 않도록 성장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절한 질서를 부여해야 한다. 시장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구성원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도 국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이다. 견고한 사회안전망과 복지제도, 그리고 인적 자원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통합은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을 위한 아젠다를 도출하는 작업이다. 시장은 자유방임이 아니라 자유와 질서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또 성장의 혜택은 공정성의 원칙에 따라 조화롭게 분배되어야 하며, 비정규직까지 포함하는 연대의 원칙에 따라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대통합의 복지사회는 다른 사람의 이득을 특정계층에게 이전하는 형태가 아니라 일자리를 통한 복지를 추구하며, 모든 절차와 방법은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열린 협약기구를 통해 규정될 것이다. 경제적 효율과 사회적 정의, 경제적 활력과 사회적 연대가 함께 존중되는 사회는 시장과 공동체가 경쟁관계에 있지 않고 균형을 이룬다. 또 구조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여러 공동체들이 시장과 국가를 제약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대타협의 길은 늘 보수로부터는 좌파로 매도당하고, 진보로부터는 시장주의에 투항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합은 우리의 관념이 아니라 손과 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자유와 평등은 결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을 따라 달리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공공의 이익에 의해 규제되며, 평등은 자유의 원칙에 따라 제한된다.         

우리 국민들은 IMF 외환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었고, 양극화가 심화되기도 했다. 사회안전망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속하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고통스럽게 희생을 감수했던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최근 우리가 맞고 있는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사회적 약자에게 모든 고통을 전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타협은 대부분 대량실업과 경제위기 같은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함께 노력하지 않으면 생존 자체가 위협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우리에게는 위험을 감지하고 미래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 들기 전에 대타협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청년세대의 진취적 기상이 필요하다  

 

최근 많은 통계자료들이 청년세대가 점차 보수화되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청년들이 보수화 되어가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진보 세력에 대한 실망과 시장주의에 대한 과신일 것이다. 신자유주의 이념의 급속한 확산도 청년층을 보수화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요즘 서점가에 넘쳐가는 경제학 서적들은 대부분 신자유주의의 전도사를 자처하는 학자들의 저서들이다. 여기에 구직난이 심각해지면서 당장 사회에 진출해야 할 청년들의 의식도 ‘성장’ 신화에 경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 동안 진보 세력은 대안 없는 세력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반대를 위한 싸움은 잘 하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그럴 만한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보 세력은 이러한 비판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까지 줄기차게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었지만, 사회적 정의가 어떻게 실현되고 국민의 삶과 직결되어야 하는지를 강구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도덕성에 대한 후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면 때문에 국민은 보수 세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유능할 것이라고 믿었던 보수 세력은 부도덕할 뿐만 아니라 더 무능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청년세대가 변화를 꿈꾸지 않는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시켜온 나라이다. 청년세대의 역동성이 없었다면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부마항쟁으로부터 비롯된 민주화의 장엄한 과정도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이루어낸 성과였다.

청년들이여, 이제 낡은 진보에서 벗어나 새로운 진보의 가치로 전환하자. 새로운 진보는 교과서에 적힌 원리를 그대로 되뇌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요구한다. 타인을 수용하지 못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가치는 독설에 불과하다. 지난 몇 달 동안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의 물결은 우리 사회에 진취적이고 창의적인 기상이 살아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여전히 냉전시대의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려는 보수 세력의 시도를 청소년과 청년세대가 앞장서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우리 사회는 공정한 기회 보장을 위한 시장 질서를 세우고,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야 할 것이다. 또한 모든 시스템을 시장에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상호 견제와 감시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 관계도 강화될 것이다. 특히 사회적 자본은 시장을 보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경쟁만이 존재하는 시장이 아니라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이며, 이것이 바로 진보적 가치의 지향점이다.    

진보적 가치를 바르게 세우는 것은 전문 활동가들만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의 동량이 될 청년들이 참다운 삶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대안을 고민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균형 잡힌 사고와 넓은 포용력, 그리고 사회는 물론 이웃과 타인을 배려하는 공동체적 연대의 정신이야말로 우리 청년세대들이 반드시 공유해야 할 정신적 자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