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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말과 글] 한국정치학회와의 대담

강산21 2008. 10. 17. 10:31

관리자주 : 지난 9월 21일 학국정치학회 회장(이정희 외대 정치학과 교수)를 비롯한 4명의 학회 임원들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담을 가졌습니다. 한국정치학회는 지난 3월 김영삼 전 대통령, 6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대담을 가진 바 있으며, 대담 내용이 실린 학회 소식지는 한국정치학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국정치학회 대담 전문 pdf파일 내려받기

한국정치학회와의 대담
한국정치학회는2 0 0 8년대한민국건국 6 0주년을맞아전직대통령의인터뷰를기획하였다. 전직대통령 인터뷰를통해격동의세월, 정치의한복판에서이들이어떤고민을했는지알수있을것이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향점이 평등이며 이와 같은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곧 진보. . .”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대담 내용 중

9월 21일 한국정치학회 이정희 회장과 정상화 섭외위원장, 황영주 섭외이사, 김유경 섭외간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터뷰를 위해 봉화마을 자택을 예방했다. 인터뷰는 봉하마을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행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짧은 연설을 듣고 오전 11시 30분부터 약 3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정희: 매우 건강해 보이십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전직 대통령들을 찾아뵙는 시리즈는 올해가 정부 수립 60주년이기도 하고 해서 전직 대통령들을 방문해서 많이 배우고 좋은 말씀을 듣자는 취지에서 마련했습니다. 편안하게 정치학회 학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해 주시면 될 듯합니다.
우선 저희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5년 동안 어려운 점도 있고 기쁜 일도 있으셨을 텐데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불어서 노무현 정부 5년에 대한 역사적인 의미나 헌정사에 있어서 이렇게 자리매김하고 싶다던가 하는 부분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노무현: 우리는 정치가 하는 일을 대개 그 시기 국민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라 다들 생각합니다. 저도 그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 짧은 기간 동안 국민들이 풍요롭게 살고 있고 편안하게 지낸다고 느끼고 있는데 나중에 보면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짧은 기간에 모든 국민들에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느끼게끔 착각을 심어주는 것이지요. 결국 뒤에 가서 보면 그 때문에 이후의 사람들이 많은 부담을 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정치가 국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과 가까운 장래뿐만 아니라 먼 장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을 안전하고 편안하고 넉넉하게 살도록 할 수 있는 그런 전략 즉, 장기적인 관점에서 그런 목적을 추구해 가야만 비로소 정치를 하는 목적에 이른다고 생각합니다. 중장기적인 관점을 세우는 것이 곧 역사적인 안목, 역사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정치의 목표에 대해서 긴 안목, 역사적 안목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제나 정치 모두 짧게 볼수록 망합니다. 그러니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현실을 평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에 있어서도 물론 역대 대통령들이 많은 공로들이 있지만 과오가 뒷사람들이 감당하기에 너무 어려운 짐을 남겨주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과오를 치유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복하지 못할 오류를 범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이정희: 지금의 말씀을 들으니 먼 훗날에 어떤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국가의 진로가 정해졌느냐를 평가한다는 측면에서는, 역대 대통령의 재임기간에 대해 큰 흐름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줄 수 있었고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었는가를 평가하는 것이 오히려 5년 동안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이루지 못했는가를 이야기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할 것 같습니다.

황영주: 그렇다면 재임기간 중 가장 고민되고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는지요?

노무현: 국정운영에서는 나름대로 상당한 성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점에서도 어쨌든 상당한 기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진보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에도 미흡하지만 한발 한발 진전해온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재임기간 중 가장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국민을 위한 정책이 정치와 따로 놀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책이라는 것은 장단기 국민적 이해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국민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장단기 전략을 정책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국민들의 선거라는 정치행위가 정책이라는 것과 아무런 상관없이 따로 가고 있으니까 결과적으로 정치라는 것이 국민들을 속이는 결과밖에 안되고, 국민들이 정치 자체를 불신하게 되니까 결국 민주주의의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저의 최우선적인 과제였습니다. 국민들의 정치적 판단을 왜곡시키는 여러 가지 메커니즘이 존재할 수 있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언론의 문제라고 봅니다. 또한 미국에 인종주의가 작용하듯이 그런데 우리 한국에 있는 것은 지역주의를 꼽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제도적으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제도화 방안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고 생각하는데, 지역주의의 문제가 최종적으로는 국회의 소관이라는 생각도 들고 정치적으로 여러 가지 노력을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극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탈지역주의를 목표로 한 정당이 붕괴했고...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점에 있어서 아쉬운 점이 있고 “나는 국정운영에서는 할 만큼 했다. 그렇지만 정치적으로는 좌절했다” 하는 식으로 저의 정치적 좌절이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정희: 민주당이 호남에 기반한 정당이었고 그것을 뛰어 넘기 위한 노력으로 후보가 되셨을 때,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셨더라도 민주당을 계속 안고 나갔더라면 호남에 기반을 둔 정당에서 영남 출신의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구도가 나올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을 수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노무현: 그러한 생각도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정치에서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두 가지 내용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우리 정파가 승리해서 권력을 잡는다는 정치적 목적이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우리 정파가 이기되 어떤 방법으로 이기느냐에 따라서 즉, 어떤 게임 판에서 어떤 법칙위에서 어떤 방법으로 이기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이기는 것이 퇴보가 될 수 있고 진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정치에서 이기는 것이 매우 현실적인 목표인 것에 대해 부인하지 않지만, 이기는 방법이 민주주의 발전을 지향하고 있어야 이기는 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민주당으로서는 이기지도 못하고 구조적으로 정치 발전을 가로막는 구도에 안주하는 정치를 계속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지역주의 정치 때문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3당 통합을 통해서 남은 민주당을 호남당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역사적 질곡을 결국 벗어나지 못한데다가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그런 것처럼 민주당도 호남에서 경쟁 없이 계속 선거에서 이기게 되니까 이미 지역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정당의 체질로 변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호남당으로 강요당했는데 그 강요된 구조 속에서 정치인들이 독점적 이익을 누리고 호남을 독식하는 기득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호남이 단결하면 이기느냐... 1997년 대선에서 이회창, 이인제 두 후보가 얻은 표가 김대중 후보보다 500만표가 더 많았습니다. 신한국당이 국가를 부도내고도 그 당 출신의 후보들이 500만표를 더 받은 그 이유가 뭐냐... 투표할 때 그 중요한 순간에 정책보다 지역감정을 먼저 선택하는 것입니다. 영남과 비교해서 호남은 인구수에 있어서 상대가 안 되고 소선거구제에서 소수에다 표의 효율성마저 떨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남의 민심과 호남 정치인들의 정책이 보다 진보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지역주의 구도를 가지고 계속 정치를 하겠다는 것은 전국정당이 된다는 것, 정권을 잡는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와 같은 정당을 가지고 민주주의로, 진보로 갈 수 있느냐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 정당을 만들면 될 만한 여건이었느냐... 확실하게 안 되는 것보다는 될 수도 있는 정당을 선택한 것이니까 현실적으로 당연한 선택이죠. 어떻든 우리 시대의 이상에 준거해서 정치적 목표를 내걸었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열린우리당은 의미 있는 정당이었고 결과적으로 깨지기는 했지만 정치지도자들의 상식 밖의 행동이 없었더라면 붕괴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황영주: 국정운영에 있어서의 평가 또는 아쉬운 부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그렇다면 가장 잘 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노무현: 예산 구조에 있어 복지 분야의 예산이 20%에서 28%까지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여러 가지 제도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확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서민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한 것은 상당히 잘 한 부분이라 자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야에서의 예산 확충은 서민들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데 일조했다는 점에서도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균형발전의 기초를 마련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개개인의 삶에 있어 정통성,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는 사회적 문화가 중요하다고 보는데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러한 정통성을 새로 세워나가는데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이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검찰이 막강한 이유는 그들의 권한이 막강하기도 해서 그렇지만 사회가 투명해지면 검찰의 힘이 법제적 수준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결국 사회적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 남용될 수 있는 권력을 제어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투명성, 가치, 정통성 등의 측면에 있어 상당한 진보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성장 전략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가치를 국민들에게 제안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복지를 통한 성장, 분배를 통한 성장 또는 지속가능한 성장의 개념을 가지고 복지, 사회적 일자리, 내수시장을 연결시키고, 교육 투자와 경쟁력의 관계를 연결시키는 성장전략을 사회적 의제로 제안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잘 전달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공무원들이 이에 대한 사고의 틀을 가지게 되었고 분배를 통한 성장이라는 개념을 정책입안자들에게 인식시키는데 많은 공을 들였고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직사회가 그것을 기획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고 대표적인 사례가 비전 2030의 경우입니다. 비전 2030은 공무원들이 주도해서 학자들과 함께 기획했고 이는 공직사회가 분배를 통한 성장의 개념을 주도해서 추진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청와대가 직접 추진하는 것과는 사회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구체적으로 전달, 확산이 안되었던 것은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국정운영과정에서 그 영향이 남아있을 거라 봅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는 일부에서 김대중 정부가 97년의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개방과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를 추진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권과 다를 것이 없다고 비판하는데 저는 조금 생각을 달리 합니다. 오히려 관치경제를 종식시켰고 개방을 강조했을 뿐 진보적 측면에서의 후퇴는 없었다고 봅니다. 이는 참여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개방을 강조한다는 것이 곧 신자유주의적 정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소득격차를 확대시키고 경제적 양극화를 결과하는 정책은 김대중 정부나 참여정부에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시장에 개입하는 정책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재분배 정책을 사용해서 시장의 단점을 강하게 규제, 조정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이 부분이 강력하게 추진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따로 지적을 받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아쉬운 점을 들자면, 교육 분야에 있어서 입시제도, 외고제도와 관련한 개혁을 임기 초기에 밀어붙였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쳤다는 점입니다. 국가시험에 의한 점수로 선발하는 제도를 해체해 보려고 했는데 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했던 시점이 늦었고 아울러 특목고가 글자 그대로 특목고로 되돌아가게 즉, 특목고가 입시학원으로 전환되는 것을 강력하게 막았어야 했는데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제일 후회되는 부분입니다. 이후에 그 교육정책을 가지고 논쟁할 때 이미 국민들에게 저의 설득력이 떨어졌다고 봅니다. 게다가 조중동이 ‘대학자율’이라는 입시제도를 부각시켜 대대적으로 홍보할 때 그것에 대처해서 대응논리를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정희: 자율이라는 의미가 주는 효과가 컸다고 봅니다. 공교육을 제자리에 돌려놓지 못한 부분이 아쉽기는 합니다만 또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황영주: 그렇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우리나라에게 어떤 국가적 과제가 놓여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노무현: 제가 보기는 민주주의를 좀 더 다져나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를 좀 더 발전시킨다는 것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가치 하나하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의 수준도 좀 더 높여야 하고요. 다음으로는 한국의 진보주의가 확대,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주의는 민주주의의 보다 심화된 목표를 포함한다고 봅니다. 민주주의가 자유와 평등인데, 물론 평등에도 여러 가지 해석이 많습니다만, 진보라는 것이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지요. 진보의 핵심을 연대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전략적인 것이고, 진보가 추구하는 목표가 뭐냐고 했을 때 그것은 평등한 사회라고 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저는 진보주의라는 것이 별게 아니라 민주주의에 내재하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한국사회에서 평등주의에 대해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반응을 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평등이라는 가치에 대해 좀 더 풀어서 설명을 하고 싶습니다.

가끔 자유를 강조하면 평등이 희생되고 평등을 강조하면 자유가 희생된다는 주장들을 볼 수가 있는데 저는 그러한 해석에 반대되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유라는 것은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속박으로부터의 해방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지배와 속박은 자연적, 물리적인 것에 의한 것도 있지만 인간과 사회제도에 의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전자에 의한 것을 속박, 지배나 억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개념이고 사람과의 관계가 수직적인 지배관계가 될 때 자유라는 개념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지배관계가 존재함으로써 그에 대한 저항적 개념으로 자유가 등장하는 것이고 지배구조라는 것은 이미 불평등한 구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의 전제조건은 평등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평등은 자유의 뿌리이기 때문에 진보는 평등을 추구하는 것이 됩니다. 자유와 평등을 갈등적인 개념으로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시장에서의 강자이고 평등을 강조했을 때 제한받는 자유는 지배자의 자유, 기득권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속박으로부터의 해방 즉,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지향점은 평등이어야 하고 그 가치야말로 진보라는 것이지요. 역사의 진보는 과학문명, 생산성 등이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권리가 보편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모든 사람들이 ‘왕의 권리’를 나누어 가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진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고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곧 진보라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이 경제에만 집중되어 있는데 당장의 문제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장기적으로 진보라는 관점에서 가치의 실현, 실천을 추구해 나가면 그것이 국가적 차원에서의 안정된 목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영주: 현존하는 국가체제를 통해 본다면 지금 말씀하신 민주주의의 발전, 진보주의의 발전에 대한 일종의 롤 모델로 제시하고 싶으신 것이 있는지요?

노무현: 미국과 유럽을 비교해서 말하자면 미국보다는 유럽식 모델이고 국가의 크기 특히 재정규모를 기준으로 본다면 통계로 딱 잘라 말하기는 뭐하지만 GDP 대비 국가의 재정규모가 큰 순서로 선진국이고 진보된 사회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우리 사회가, 특히 학자들이 너무 미국 중심으로 성장이나 복지의 모델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정상화: 현재 여러 가지 사안들에 대해 많은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현재의 이명박 정부가 당면한 문제들을 사회적으로 원만하게 해결하고 안정적인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노무현: 한국 사회에서 진보-보수를 이야기하지만 진보 진영은 실질적으로 너무 취약하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한 숫자로나 사회적 세력을 형성하는 토대의 측면에서 즉, 자본의 권력, 정치적 권력, 미디어 조직의 측면에서 진보진영은 너무 취약한 것이 사실이고 사회적 균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진보와 보수의 세력적 토대가 너무 불균형하기 때문에 사회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 시급히 요청되고 현 정권도 이러한 점을 인식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자유와 평등과 같은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균형에 대한 이야기를 못했는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균형, 특히 동태적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현 정권의 보수적 정책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지만 정치적 원리의 측면에서 보면 보수주의 정책을 보수적 정권이 추진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국민들은 비판과 견제를 통해 그동안의 진보적 성과들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며 현 정권 또한 보수와 진보가 최소한의 균형을 맞춰 사회적 통합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의 방향에 대해서 제가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국민들이 자신의 삶에 중요한 조건인 진보주의적 권리들에 대해서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를 침해받지 않도록 해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보수주의의 내용에 대해 조금 언급하자면 보수주의의 7가지 거짓말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 '세금을 감면하면 경제가 성장한다, 성장만 하면 일자리가 생긴다, 성장을 하면 모두가 잘 산다, 정부가 작아져야 국민들이 잘 산다, 규제를 풀어야 국민들이 잘 산다, 민영화하면 공공요금 내린다, 시험 잘 치는 사람이 똑똑하다'는 논리는 강자의 논리일 뿐입니다. 단 저는 개방에 대해서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어쨌든 이러한 주장들은 조중동의 논리이고 근거 없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비판을 현 정권에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현 정권 또한 제도를 바꾸지 않고 규범을 지키지 않은 상태에서 권력기관을 동원해서 정책을 결정하고 추진하려는 마인드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위험한 태도일 수 있습니다. 보수정권이나 진보진영이나 모두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과 규범, 원칙을 지키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또한 국민이 자존감을 느끼며 살 수 있게 하는 정치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보다도 국민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통해 자신의 삶에 있어 누추함을 느끼게 하는 정치보다는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의 자존감, 민주적 가치들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고 추구하도록 하는 정치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정희: 인터뷰의 서두에 말씀하신 것처럼 역대의 정권이 5년 기간에 모든 것을 이룰 수도 없고 그 성과만을 가지고 단편적으로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는 나름대로 다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 입장에서 정치학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노무현: 한국의 학문적 수준은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리자면 현실에 대한 분석을 좀 더 치밀하게 하고 이를 토대로 해서 사회적 공론이 형성되는데 기여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또한 단지 전문가이고 지식인이라는 것에만 자부심을 느끼기보다는 자기 존재에 대한 규정을 할 때 지성사회의 일원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역사의식을 가져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역사적 안목을 가지고 학문을 추구해야 학문도 진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선거구제도의 전환을 위한 노력을 정치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해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는 대표성과 국민의 의사를 크게 왜곡하는 제도이고 종국에는 정치적 양극화를 가져오는 요인이라고 봅니다. 특히 지역주의와 결합되어 더욱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행정구역 재편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이해관계에 맞물린 내용이라 과연 가능할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선거구제도가 바뀌면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좀 더 가까워지고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이 정책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재임 중에도 많이 했습니다.

선거구제도를 바꾸는 것은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이 정책적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장애물 하나를 없애는 것일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정책에 대한 이해관계를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게끔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결국 정치권력, 언론, 국민들의 삼각 구도에 있어서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언론의 긍정적 역할이 컸지만 현재는 언론권력이 민주주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상황이라 봅니다. 특히 시장권력과 언론권력이 결탁하거나 일체화되었기 때문에 언론권력이 민주주의의 중대한 위협으로 등장했습니다. 강한 자, 기득권자를 중심으로 이들이 규칙을 만들고 경쟁을 주장하는 현재의 시장경제의 논리를 언론이 옹호하는 것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노력으로 언론권력의 횡포를 극복하고 자율적이고 다양한 매체를 만들어 나간다면 시민주권의 시대가 좀 더 빨리 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최근 ‘민주주의 2.0’ 사이트의 내용을 구상하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고 민주주의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는데 이런 맥락에서 학자들이 단기적이고 지엽적인 의식을 가지고 현실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기보다는, 총체적이고 역사적인 의식을 가지고 또한 역사적인 사명감을 가지고 민주주의의 발전과 국민들의 정치적 선택에 도움이 되는 학문연구에 정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정희: 다른 어떤 때보다 긴 시간 좋은 말씀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