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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적 위기와 선교적 과제

강산21 2008. 9. 20. 15:35

생태적 위기와 선교적 과제


김은수(전주대학교 부교수)

한국기독교학회  http://www.kacs.or.kr


I. 시작하는 말


선교의 영역에 있어서 환경 또는 생태학에 대한 관심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환경 보전운동에서 그 시작을 찾아볼 수 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는 ‘이 세대 안에 세계복음화’(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라는 주제로 개최되었다. 이 주제를 성취하기 위해 대회는 기술에 대한 문제와 연관시키고, 기술이 환경에 미칠지도 모르는 해로운 영향에 주목을 하였다. 그리고 복음화에서 윤리적 쟁점을 잊어버리거나 삭제해 버릴 정도로 기술적 성취에 우선권을 부여하였던 일종의 세속주의를 선교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이것은 1928년 예루살렘 국제선교협의회에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이제 선교의 목표는 더 이상 개인의 영혼 구령에만 머무를 수 없고,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예비적 실현으로 묘사됨으로써 복음의 사회적 차원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영적인 영역에서 뿐 아니라 인간의 삶 전반에 걸친 전인적 삶의 주님으로 고백되었다.1)

        환경문제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통해 더욱 관심사로 떠올랐으며 동시에 첨예화되었다. 2차 대전에서의 핵 폭탄 사용은 새로운 차원에서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특히 이것이 소위 전통적인 기독교 국가에 의해 주도적으로 수행되었기 때문에 이와 더불어 서구교회 역시 큰 선교적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장 야만적인 전쟁행위가 전통적 서구기독교 국가들에 의해 저질러졌을 뿐 아니라 서구에 의해 선교된 나라들이 서구 식민주의에서 독립되었고 민족주의의 대두와 공산주의 국가의 확장은 더 이상 서구 선교사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위기와 제 3세계의 도전은 지금까지의 서구 중심적 교회의 선교를 재고하게 만들었고, 선교의 주체는 더 이상 인간이나 교회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각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개념으로 집약되었다.2) 즉 스스로 자신을 보내시는(missio) 삼위일체 하나님은 선교의 주체이며, 세상을 사랑하셔서 세상과 우선적인 관계를 맺으신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의 계획의 초점이 되고, 온 피조물과 우주(cosmos)는 그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하나님 - 교회 - 세계’라고 하는 교회 중심적인 선교패러다임에서 ‘하나님 - 세계 -교회’라는 하나님과 세계 중심적인 패러다임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3) 하나님은 온 피조물의 구원과 회복에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에(로마서 8: 21-13), 교회는 오늘의 생태적 위기를 매우 중요한 선교적 과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과제를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생태’와 관련된 용어의 의미를 검토하여야 한다. 이 글에서 과거에 많이 사용되었던 ‘환경’이라는 용어대신 생태를 사용하는 이유는 다음 몇 가지가 있다. 먼저 환경은 인간 생명을 강조하는 인간 중심적 개념인데 반해 생태는 모든 종류의 생명체가 강조되는 생물 중심적 개념이다. 또한 환경은 삶의 조건이나 생명의 둘러쌈을 뜻하는 구심적(centripetal) 중심주의 세계관을 나타내지만 생태는 삶의 장소인 거주지의 체계성을 뜻하는 관계적 세계관을 나타낸다. 셋째 환경은 원자적이며 단편적인 세계 인식의 틀을 반영하여 인간과 자연을 형이상학적으로 구별하지만 생태는 유기적이며 총체적인 세계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인간과 자연을 구별하지 않는다. 끝으로 환경은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생태는 모든 생명의 뗄 수 없는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일원론적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고 있다.4)

        이러한 이해에 근거해볼 때 ‘생태계’란 ‘생태학’(ecology)의 대상으로서 어떤 지역의 생물군집과 이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물리적 화학적 요인을 총합한 물질계라고 할 수 있다. 생태학의 어원을 살펴보면 ecology는 집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oikos에서 왔으며, oikos는 또한 economy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5) 이 말은 생태학이 자연의 경제라는 의미다. 자연은 매우 경제적으로 움직이며 어떤 인위적인 설비나 장치도 그 효율성에 있어서 자연과 경쟁의 상대가 못한다. 자연은 그 운행에 있어서 완벽한 효율성을 뽐내며, 따라서 거기에는 에너지 또는 재료의 낭비란 없다. 즉 자연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생태학적 원칙이 있다.

        생태학적 원칙은 다음의 몇 가지 특성을 지닌다. 먼저 평형상태를 유지하려는 항상성(homeostasis), 다음으로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와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 셋째는 생태계 구성자들은 복잡하고 미묘한 생태 그물로 서로 얽혀있다는 복합성(complexity), 끝으로 생명체는 주어진 외부 환경에 적응하거나 스스로 환경을 형성해 나가는 적응성(accomodation)을 지닌다.6) 이처럼 생태계는 스스로 자정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오염물질이 유입되더라도 그것을 정화하여 원래상태로 회복시킨다. 그러나 오늘날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변화와 환경의 파괴는 이러한 능력을 무력화시키고 있기 때문에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위기에 대해 오늘의 기독교가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교회의 발전적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피조물의 구원과 회복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에 본 논문은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총체적 생태계의 위기를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적절한 선교적 방안을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II. 선교적 과제로서 생태적 위기와 문제점


1. 자연의 파괴와 생태계의 위기

‘자연’은 헬라어 physis에서 온 것으로서 실체를 의미하며, 현상계 안에서 운동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즉 시간 안에 존재하며, 시간을 통해서 생성되고 소멸되는 모든 것들이 다 포함된 모든 우주를 말한다. 헬라어 physis는 라틴어 natura로 그 후 번역되었는데, natura는 physis가 말하는 소멸과정을 간과한 채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생성만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natura는 ‘사물’(res) 개념에 가까우며, 인간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지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 결과 자연은 고대 로마인들에 의해 모든 우주가 아닌 인간의 목적을 위한 자원으로 해석되었다.7) 따라서 우리는 자연을 원래의 헬라어 개념대로 이해하면서 환경은 물론 생태계까지 자연의 맥락에서 거시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연의 파괴란 환경문제를 포함한 생태계 전반에 관한 위기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생태계의 위기는 자연 자원의 고갈로 인한 자원부족과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파괴로 나누어진다. 자연 자원은 농업, 임업, 수산업, 광업 생산물과 수자원 및 에너지 자원을 포함한다. 이것은 ‘재생 불가능한 자원’(nonrenewable resource)과 ‘재생 가능한 자원’(renewable resource)으로 나누어진다. 즉 재생 불가능한 자원이라 석유, 석탄 등 인간이 한번 사용하면 그 매장량이 점차 줄어들어 끝내 고갈되어 없어지는 자원이며, 재생 가능한 자원이란 곡식, 삼림, 물고기, 물처럼 이용 가능량이 시간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그 물량이 유동적인 것으로서 일정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재생이 가능한 자원이다. 그러나 재생 가능한 자원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회복 가능한 것은 아니다. 자연의 파괴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회복이 영원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1976년을 기준으로 세계 에너지 사용량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앞으로 약 645년을 더 사용할 수 있으나, 만약 연평균 2%의 성장이 지속된다면 133년, 5%의 성장이 계속된다면 70년 이내에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광물 자연도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의 자원이 현재의 경제 성장 추세대로라면 23년에서 86년 사이에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이다.8)

        한편 환경오염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 또한 심각한 수준이다. ‘환경오염’이란 인간활동으로 인한 대기 오염, 수질 오염, 토양 오염, 해양 오염, 방사능 오염, 소음, 진동, 악취 등으로 사람의 건강이나 환경에 피해를 주는 상태를 뜻한다.9) 즉 매연, 분진, 악취, 유독가스 등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공장 및 가축 폐수, 생활하수로 인한 하천오염, 그리고 화학비료 등으로 인한 토양오염, 그 외에도 소음, 진동으로 인한 보건 위생상의 피해 등이 속할 수 있다. 이러한 오염물질이 생태계와 환경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인간과 생물의 생존, 발육, 활동에 장애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를 살펴보면, 대기오염 가운데 스모그(smog)는 연기(smoke)와 안개(fog)의 합성어로서 도시의 오염된 대기를 가리킨다. 1952년 12월 초 런던에서는 약 1주일간 지속된 스모그로 인해 3주 동안 4천 여명이 사망하였고, 스모그 이후 만성 폐 질환으로 8천 명이 추가로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10) 또한 공장이나 자동차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황과 질소산화물은 대기 중에서 습기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pH 5.6 이하의 산성비가 된다. 산성비는 산림을 황폐화시키고 호수나 하천에 서식하는 생물종을 멸종시키며, 농작물의 수확량을 감소시킨다. 한국은 최근 OECD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아황산가스, 먼지, 이산화질소 등의 대기오염 물질 배출량이 산업국가인 미국과 프랑스보다도 10배 이상 높은 최악의 상태다.

        물은 인간 몸의 70%를 차지하는 등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이기 때문에 수질오염은 생명에 치명적이다. 우리나라의 연 평균 강수량은 1,283mm로 세계평균(973mm)보다는 좀 높지만 인구 및 물 소비의 증가로 오래지 않아 물 부족국가가 될 전망이다. 특히 여름 장마철에 집중적으로 비가 올뿐 아니라 경사가 급한 산악 지대가 많아 물 이용률은 26%에 지나지 않는다.11) 이 같이 중요한 자원이 수질오염으로 시달리고 있으며, 그 주요원인은 중금속이 포함된 산업폐수, 합성세제가 포함된 생활하수, 축산 폐수 및 위락시설의 오염물질 등이다. 수질오염은 인체 및 플랑크톤이나 어패류의 생장과 번식에 해를 입힐 뿐 아니라 각종 수인성 전염병을 발생시키는 무서운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

        땅은 살아있는 모든 유기체들이 동적인 평형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생태계다. 이 땅이 그러나 농약과 비료 등의 화학물질에 의해 심각히 오염되고 있다. 농약은 현재 1천 여종에 달하고 있으며, 이것이 자연계에서 분해되는 시간이 적게는 10년에서 90년까지 걸리는 맹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토양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있다. 또한 무분별한 삼림 파괴와 과도한 방목 등으로 인해 토양의 질이 저하되고 토양 침식이 가속화되고 있다. 건조지대의 사막화 현상 역시 심각한 자연 파괴의 주범이 되고 있어서 지상의 약 29%가 경미하거나 중간 정도의 사막화를 겪고 있으며, 6%의 땅은 심각한 사막화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다.12)

        이러한 자연파괴는 그 지역의 생태계를 위협할 뿐 아니라 지구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지구의 온실효과는 생물이 서식하기 적합한 기후를 형성하게 해준다. 즉 대기가 단파인 태양복사열에 대해서는 모두 통과시키고 지구의 외계로 방출하는 장파인 복사열에 대해서는 지구 표면에 가두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온실효과에 기여하는 가장 큰 요소는 이산화탄소인데 그 방출량은 숲의 광합성 작용을 통해 재 흡수됨으로써 조절된다. 이산화탄소의 양을 조절해주는 숲과 삼림의 파괴로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되어 기후의 균형과 질서가 무너지고 해수면의 상승이 우려되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로 인한 자외선의 증가 역시 여러 환경문제를 일으킨다. 오존은 고도 20-40km 사이의 성층권에 분포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없어진다. 그런데 염화불화탄소(CFCs)과 같은 기체들의 촉매 작용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 이는 특히 공업용 세척제, 에러로졸 스프레이의 분사제, 에어컨과 냉장고의 냉매, 플라스틱 발포제 등으로 사용되는 프레온 가스가 핵심 원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층권의 오존은 생물에 해로운 자외선 UV-B를 차단하고 흡수하는 천연 필터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오존층이 1%감소하면 피부암 발생률은 3%, 백내장 발생률은 0.6%씩 증가한다.13) 또한 식물이 자외선에 완전 노출될 경우 DNA가 손상되어 기형이 나타나고, 작물의 수확량이 감소한다.

        자연의 파괴는 다양한 생물종들을 소멸시키고 있다. 현재 지구에는 대략 3천만 종의 생물종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열대림과 기타 서식지의 파괴로 1년에 최소한 5만종이 멸종되고 있다. 이 속도는 계속 빨라져서 20년 안에 전체 생물종의 1/5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14) 다양한 생물종은 식량을 공급하고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시켜주며, 경제적으로 농업, 의학 및 공업의 중요한 토대가 될 뿐 아니라 모든 약 처방의 반 가량이 야생 생물에서 원료를 얻고 있다. 이 외에도 핵연료 재처리 시설에서 방출된 방사성 물질 등에 의한 해양의 오염과 무분별한 수산 자원의 남획으로 인한 어종의 고갈도 생태계 전반을 위협하고 있다. 앞으로는 수명이 끝난 우주선이나 각종 통신, 기상 군사 위성 등으로 인한 우주의 쓰레기장화는 심각한 환경문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 자연파괴는 과거의 상황과는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즉 산업생산이나 인구의 증가 등을 볼 때 그 양적인 성장이 기하급수적이다. 또한 자연파괴의 영역은 전 우주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큼 넓고, 오염의 질 또한 회복이 불가능한 악성이 많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이 복잡할 뿐 아니라 그 영향이 오랜 후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파괴의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따라서 자연파괴로 인한 전 우주적 생태계의 위기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모든 영역에서 다함께 협력하여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이러한 오늘의 생태적 위기는 온 피조물의 회복과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보기에도 심히 좋았던 온 피조물이 지금은 함께 탄식하고 고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구속되기를 기다리고 있다.(창 1장, 롬 8장)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자연파괴와 생태적 위기에 마음과 몸과 지혜를 모아 민감하게 응답하고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2. 창조질서의 훼손과 관계성의 상실

헬라어 ‘자연’(physis) 개념에 상응하는 고대 히브리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구약성서는 ‘창조’ 혹은 ‘창조질서’라는 말을 사용한다. 따라서 창조 개념은 자연에 대한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해석을 담고있다고 볼 수 있다. 창조신앙에 따르면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스스로 존재하지도 않으며 동시에 인간의 숭배대상도 아니다. 창조주는 그의 피조물인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에 자연은 그 어떤 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로써 기독교 신앙은 자연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하였고, 자연의 탈 신성화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창조질서는 자연이 원래 악하다거나 신성으로부터 나온 신적인 본질을 지녔다고 보는 이원론(Dualism)를 거부한다. 자연은 본래부터 악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신성을 지닌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연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적 질서 안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또한 창조주가 세계라는 기계를 만든 후 그 스스로 움직이도록 내버려두고 있다는 이신론(Deism)도 거부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시며 창조질서의 훼손과 생태계의 파괴를 함께 아파하시며 돌보고 계신다.15) 특히 히브리어의 ‘창조하다’라는 bara(창 1:1)는 구약성서에서 오직 신적인 행위에만 사용되는 개념으로서 자연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히 나타낸다. 그러므로 자연은 인간의 가치평가에 따라 고유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그 가치를 지닌다. 창조질서는 이렇게 하나님과 자연,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명확히 해주고 있기 때문에 인간에 의한 어떠한 자연의 착취나 생태계의 파괴는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창조질서는 인간들의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표현은 단순하게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닮았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나타낸다. 형상이란 사고력, 전달력, 초월의 능력, 창조력, 유우머를 이해하는 힘(일종의 초월성), 추상 능력 및 일반적으로 인격으로 형성되는 내적 인간의 모습을 의미한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다함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동등하다는 전향적인 인간관을 함축하고 있다.16) 즉 그 당시 숫자에 포함되지 않던 여자와 노예들까지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뜻한다. 또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은 남자와 여자가 공히 다함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가 대면의 관계에 있으며, 동시에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있어서도 대면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대면적 관계인 남자와 여자는 모두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하나님의 축복(berakah)의 대상이다. 이처럼 남자와 여자가 조금의 차등도 없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으며 창조적 질서 안에서 다함께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들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형상이 실현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계는 인간이 남과 여라는 두 성(性)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여기서 하나의 사회적인 존재(ein soziales Wesen), 사귐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점이다. 하나님 역시 사귐 속에서 자기와 관계한다. 창조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신적인 복수(우리)는 하나님 안에서도 구별과 통일성이 있으며, 자신 안에서 풍부한 사귐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안의 이 구별과 통일성은 인간들의 사회적 삶을 결정한다.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남성적인 하나님이나 여성적인 하나님만도 아니며 중성적인 하나님도 아니다.17)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녀의 삶의 사귐을 규정하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존재유비(存在類比)가 아닌 관계유비로 이해될 수 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관계성을 본받아 남자와 여자도 사랑의 관계성으로 이해될 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올바른 창조의 질서가 회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 남자와 여자의 관계파괴는 창조질서의 심각한 훼손을 초래하게 된다. 여성신학적 입장에서 생태학을 연구하는 생태여성학자(Ecofeminist)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 사이에는 직접적이고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먼저 이원론적인 서구사상은 합리성, 문화, 자율, 정신 등 공적인 영역은 남성과 동일시하는 반면, 감정, 자연, 관계성, 몸 등 사적인 영역은 여성과 동일시한다.18) 이러한 환원론적 사고가 가부장적 문화와 결합됨으로써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아울러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정당화한다. 고대 헬라시대의 이원론은 세상을 인간과 비인간의 두 범주로 나누어 파악하고 그 둘 사이의 깊은 심연이 존재하는 불연속으로 이해하였다. 즉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종(species; Spezies)은 비인간으로서 ‘다른 자연’으로 취급되었다. 그 당시에는 남성 시민만이 인간의 범주에 소속되었으며, 여성과 노예는 다른 자연의 범주에 속하여 다른 자연이었기 때문에 남성의 소유물이며 그들의 유용성에 의해서만 그 가치가 인정되었다. 마녀 사냥 역시 이 같은 맥락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생태학적 위기의 문화적 뿌리는 자연을 여성적인 실체로 파악하여 그 자연은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보는 가부장적인 이념이다. 물질적인 존재는 영혼과 생명이 없기 때문에 남성에 의한 착취의 대상이며, 여성과 자연은 영혼이 없는 실체로서 남성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다. 이 같은 오늘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남성, 하늘, 지성, 정신으로 유비되는 유일신론적 하나님(God) 이해 대신에 내재적 여성신인 가이아(Gaia)로서의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류터(Rosemary R. Reuther)는 주장한다. 즉 ‘지배-착취’의 사회체제로부터 ‘생명-사랑’의 상호성 사회체제로, 경쟁 지향적인 소외와 지배의 문화 대신에 연민 가득한 연대성의 문화로 나아가야 한다.19) 지금까지 남성적 위계질서는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하였으나 관계성을 중시하는 여성적 윤리는  생태 친화적일 뿐 아니라 창조질서를 회복케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창조의 위에 군림하지 않고 창조의 안에, 그리고 창조의 끝에 있다. 세상은 인간에 앞서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은 인간에게 속하지 않으며 인간에게서 비롯되지도 않는다. 오직 창조자 하나님에게 속한다. 그러나 인간이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고 지금까지 자연을 자신들의 이용가치에 따라 마음대로 착취하였기 때문에 오늘의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였다. 생태계의 파괴는 결국 인간들의 삶의 질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생명마저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과 자연은 다함께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따라서 자연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하는 동반자임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한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질서는 오랫동안 이어온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와 억압으로 훼손되었다. 지금까지도 많은 나라들에서 교육, 문화, 사회, 종교 등 전반에 걸쳐 여성차별이 다양한 방법으로 자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다함께 하나님과 대면적인 관계에 있는 축복의 대상임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랑의 내적인 관계 구조 속에서 참여하고 파송하며 세계에 그의 선교(missio Dei)를 펼치고 계신다.20) 이처럼 남자와 여자 역시 사랑의 관계 가운데 그의 선교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창조질서가 회복되는 인간다운 공동체(menschliche Gemeinschaft)를 만들어 갈 수 있다.


3. 인간중심적 세계관과 성서 해석의 문제

서구신학의 역사에서 자연과 창조 신앙은 오래 전부터 소외되어 왔다. 초대교부 이레네우스(Irenaeus, 130-200)는 사도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교회를 바로 세우고, 영지주의 이단자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다.21) 그는 많은 저술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사도들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데, 특히 영혼과 육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상호 작용한다는 총체적 이해(holistic understanding)를 가지고 생태계를 이해하였다. 즉 만물은 선하게 창조되었고,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상호 조화를 통해 온전한 인간을 이룬다. 마지막 때에는 영혼과 육체의 구원을 이루며, 모든 만물은 새 하늘과 새 땅을 통해 다시 회복되는 구원을 이룬다는 자연친화적인 사상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많은 저술을 남겼던 오리겐(Origen, 185-254) 은 그의 신앙선배들의 사상에 만족하지 않고 그 당시 사상적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신플라톤주의를 받아들였고, 부분적으로 영지주의적 색채까지 띠고 있었다.22) 그는 영혼과 육체를 두 개의 서로 다른 존재로 명확히 구분하는 이분법적인 이해를 가지고 영혼만을 중시한다.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기 때문에 악한 이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이 세상은 중간 존재인 아들 혹은 말씀을 통해 창조되었다고 본다. 인간 영혼은 거룩하고 귀한 것이나 육체는 악한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이성적 영은 하나님께 돌아가 구원을 받지만 육체를 포함한 물질 세계는 무로 돌아간다. 따라서 물질로 구성된 다른 피조물의 회복과 구원은 없다는 자연을 경시하는 사상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오리겐 이후 대부분의 서구 신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정당화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과 자연을 계급적으로 이해하고, 그 기준을 영혼과 이성으로 삼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가졌다. 인간은 그 영혼을 근거로 피조물 가운데 가장 높은 존재단계에 있기 때문에 더 높은 것의 가장 낮은 것은 낮은 종의 높은 것과 접하고 있다는 논리에 근거하여 신 아래 있으나 모든 피조물 위에 있다. 또한 인간은 이성을 지닌 점에서 동물보다 위에 있으며, 이성적인 피조물인 인간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땅을 개간하고 자원을 이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속하며, 동물을 잔인하게 다루지 말라는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사회를 위해서일 뿐이라는 인간중심적 자연사상을 가지고 있었다.23) 종교개혁자 깔뱅도 자연의 가치를 인간 생활의 유용성으로 판단하였다. 즉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재료이며, 만물의 창조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인간 중심적 생태계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24)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근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구약학자 폰 라트(G. von Rad)는 구속사 중심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창조신학을 하나님의 인간 구원사(Heilsgeschichte)의 부록이나 인간 구원 드라마의 서론 정도로 취급하였다.25) 세속화 신학을 전개한 고가르텐은 세속화(Saekularisierung)를 하나님의 자녀인 인간이 세상을 다스리고 이용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로 해석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세속주의(Saekularismus)와 구분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지배를 정당화하였다.26) 불트만(R. Bultmann)은 신학적 주제를 인간의 실존에 맞추고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곧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신학을 자연과 분리된 인간학으로 환원하였다. 즉 창조신앙을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관계에서 보지 않고 절대자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서 인간실존만을 다루었다.27) 바르트(K. Barth)는 창조의 목표와 의미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에서 찾고, 그 계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교의학은 우주론과 관계가 없는 인간학이며, 창조를 계약과 은총의 수단이라는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해석하였다.28)

        이레네우스 이후 자연친화적인 신학사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신학적 주류를 이루지는 못했다. 서구의 전통에서 신학은 하나님과 영혼, 인간과 역사에 초점이 맞추어진 결과 인간학으로 축소되었고, 자연은 창조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지 못하고 하나님과 인간이 펼치는 구원 드라마의 배경이나 무대 정도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서구신학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오늘의 생태적 위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며, 이 같은 시각에서 성서를 해석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를 더욱 정당화하였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왜곡된 해석의 역사를 크롤칙(U. Krolzik)은 여섯 단계로 분류하여 설명한다.29) 첫째 단계는 초대 교부에서 10세기까지의 해석경향으로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았으나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에 농사, 가축 사육, 도시건설 등 문명화가 가능한 영역에 제한되었다고 본 시기로써 무절제한 자연파괴를 피할 수 있었다. 둘째 단계는 중세기의 인간중심적 해석경향으로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과 동시에 경작을 통한 자연 돌봄의 책임도 함께 강조된 시기였다. 셋째 단계는 14-15세기의 르네상스 인문주의 시대로서 인간은 주어진 자연의 틀 안에서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그리스도에 근거한 기독교의 틀에서 벗어나 인간 자신의 자유와 능력에 기초하는 인간중심적 해석을 하였다. 넷째 단계는 16-17세기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강조한 베이컨(F. Bacon)과 데카르트(R. Descartes)의 해석이 주도한 시기로서 자연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과학과 기술을 통해 자연을 지배하고 수단화하였다. 다섯째 단계는 17-18세기로서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인간중심주의가 더욱 강화한 시기로서 자연을 간섭하고 촉진하고 최적의 조건으로 개조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마지막 단계는 19-20세기로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명령을 인간자유의 실현 가능성으로, 자연을 인간이 지닌 능력을 실현하는 장소로 파악한 시기다. 즉 인간이 기술과 과학의 도움으로 자연의 지배와 종속으로부터 해방되라는 것이다. 결국 성서의 창조이야기는 자연과학과 기술을 수단으로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여 인간중심의 문화를 이루게 하는 대헌장(Magna Charta)이 되었다.

        그러나 생태계의 위기는 산업혁명 이후에 생겨난 현상으로서 원래 성서의 명령과는 다른 세속화와 연결된 인간의 자기중심성의 결과이며, 근대인의 잘못된 자유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즉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훨씬 이전부터 착취적 태도나 패권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상기시키면서 환경 위기의 책임을 기독교에 전가시키려는 환경론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역사, 종교 이데올로기, 문화 전통, 환경에 대한 인간 형태의 실제적 형편들을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30) 그렇다고 하더라도 서구의 이분법적 사고는 성서를 해석하는 도구로 오용되어왔고, 이것이 오늘의 생태적 위기를 불러오는데 기여하였기 때문에 그 책임을 교회가 완전히 벗어버릴 수는 없다.

        성서해석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창세기 1장 28절의 ‘정복하라’(카바쉬, kabash)와 ‘다스리라’(라다, radah)라는 명령이다. 이 두 단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서구인들은 이분법적으로 자연과 인간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과 불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과 인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다른 자연’은 연속선이 아니라 불연속선이며 그 불연속선은 너무나 깊고 넓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건널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다른 자연에 대해 무엇을 해도 된다는 허가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였던 것이다.31)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이야기에 대한 올바른 성서해석을 해야하는 책임이 있다.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구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단어 자체만 따로 떼어서 ‘짓밟고 짓부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이 명령을 하시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고 한 사실과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즉 땅을 ‘정복하라’는 것은 인간을 위한 축복이기 때문에 자연을 파괴하거나 착취해서는 인간이 복을 받을 수 없고, 자연을 잘 가꿀 때 자연과 더불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따라서 정복하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과 함께 공생하며 ‘가꾸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또한 다스리는 것이 인간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는 다스림을 받는 자가 행복할 때 가능하다. 따라서 자연을 억압하고 파괴해서는 인간이 결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에 다스리라는 것은 자연을 잘 ‘돌보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같은 해석은 하나님이 아담을 두신 목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창 2:5)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참 좋았다고 7번이나 감탄한 세계였으며, 인간은 자연과 ‘함께 창조된 피조물’이다. 아담(인간)은 아다마(흙/땅/자연)와 한 뿌리이며, 사람, 동물, 식물 모두가 흙에서 빚어진 한 동료다(창 1:11-12, 2:7, 2:19).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을 때 사람과 단독으로 하지 않으시고 숨쉬는 모든 짐승들을 포함한 생태학적 언약을 맺으셨다. 또한 요나의 심판 선포를 듣고 니느웨의 사람뿐 아니라 동물들도 회개에 초대되어 구원을 받았다. 이처럼 “전(全) 피조물 위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세우시는”32)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는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 곧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셨다(missio).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 속에 있으며 피조물 상호도 생명의 유기체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가 끊어지면 죽게되듯이 피조물 상호간의 관계도 끊어지면 한편만이 아니라 양편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33) 인간이 자연을 가꾸며 돌보지 않고 착취하고 파괴한다면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와 상처를 입힐 것은 분명하다.


III. 생태적 위기극복을 위한 선교적 방안


1. 기독교 선교생태학의 정립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 신학이 오늘의 생태적 위기에 여러 가지로 책임이 있으며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서구신학의 이원론적인 영과 육의 도식적 해석의 틀은 영적인 하나님과 물질적 피조 세계, 영적인 존재인 인간과 물질계인 자연을 분리함으로써 자연을 파괴하고 생태계의 위기를 몰고 오는데 일조를 하였다. 인간은 같은 피조 세계에 속한다. 그럼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의 중심에 위치시킴으로써 자연을 대상화, 수단화, 주변화하여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이용하고 착취하였다. 오늘에는 인간의 질병치료를 내세워 동물을 복제하고 그 복제된 장기를 채취한 뒤 도살하는 것이 합법화되고 있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하여 자연을 훼손하면서 신처럼 영원히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생태학적 한계 안에서 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의 파괴는 결국 인류의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피조 세계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을 형성하는 것이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는 첫 번째 선교적 과제가 될 것이다.

        기독교 선교생태학이 함의해야할 첫 번째 요소는 이 세계가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하는 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계의 행복을 함께 기뻐하며, 고통을 함께 아파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내재는 ‘범신론’(Pan-theismus)적으로가 아니라 ‘범재신론’(Pan-en-theismus)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34)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계를 포괄하지만 동시에 세계를 초월하며, 만물이 그 안에 있고 그가 만물 안에 있지만 동시에 만물과는 독립된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육신(incarnation)을 통해 성부 하나님이 물질 세계로 오신 것과 성례(sacraments)를 통해 지상의 물질이 하늘로 들어올려지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해진다.35)

        두 번째 요소는 하나님의 인격이 개체나 이원론적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삼위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참여와 파송(missio, 선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존재하는 내적 구조는 세계에 대한 관계성 속에서 구체화된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을 세계에 파송하며, 성자의 사역과 성령을 통해 세계에 참여하신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세계창조에 참여하고 성령을 파송하며, 성부의 파송을 받는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사귐과 파송의 관계 안에 참여하며,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파송을 받는다. 이러한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의 관계성에 따라 남자와 여자도 사랑의 관계성 안에서 다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의 선교(missio Dei)에 책임적으로 참여하는 청지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요소는 ‘창조의 영’(루아하 ruah)으로서 성령의 재발견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성령은 서구신학의 핵심주제가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의 영’으로서 성부, 성자와 관련하여서만 주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창조의 영은 구원의 때가 되면 인간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작용하고(사 32:15-20), 그들 가운데 거하며(zelten) 삶을 지속시키는 하나님의 호흡(ruah)과도 같은 것이다. 이 영은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숨(창 1:2, 시 104:29-30 Odem=ruah), 만물을 새롭게 하는 생수(요 4:14, 7:37-38), 구원과 힘을 주는 치유의 바람(요 3:8, 행 2:1-4), 갈라진 사이를 회복시키는 비둘기(창 8:11, 마 3:16) 그리고 선교의 능력이 되는 불(마 3:11-12, 행 2:1-4) 등 풍부한 성서적 근거를 가진다.36) 이러한 창조의 영의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재발견은 우리를 가로막는 인종, 문화, 종교적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해준다(행 11:17).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의 초점은 성령의 선교로 모아진다. 성령의 현존은 곧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아들의 선교는 성령의 선교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세계 속에서 계속되기 때문이다(요 20:21-22, 행 1:8).37)

        마지막으로 자연친화적인 동양사상과의 대화(dialogue)가 필요하다. 자연에 대한 서양의 기계론적 관점에 비해 동양은 유기체적인 관점을 발전시켜왔다. 역경의 팔괘는 음양의 상호성이 모든 사물의 기본적 관계 범주를 설명하는 한 예를 제공한다. 즉 하늘은 지배하는 힘으로 군림하지 않고 인간은 땅을 지배하지 않으며 땅은 그 자신의 영역을 포기하지 않는 그들 각자의 운동과 역동성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며 영향을 준다.38) 도덕경은 “인간은 땅을 쫓고 땅은 하늘을 쫓으며 하늘은 도를 따르는데 도는 자연을 쫓는다”39)고 말함으로써 자연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있다. 힌두교에서 자연은 신비와 외경의 대상이며, 불교에서는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고 나와 너, 나와 자연이 한 몸임을 알아서 내 몸처럼 대할 것을 말한다.40) 이러한 동양사상과의 진지한 대화는 기독교 선교생태학의 정립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회복과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그들과 함께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2. 유기농업과 생태복원 선교

생태학이라는 ecology는 집, 가족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oikos를 비롯해 서식지, 흙, 대지(earth)를 뜻하는 oikoumene 그리고 말씀, 사고, 연구를 뜻하는 logos가 합쳐서 발전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가족이라는 의미가 확대되어 지구가 한 가족이며 모든 피조물은 인간과 함께 이 땅의 한 가정의 일원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생각하고 연구하라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WTO체제에 들어간 세계의 많은 나라들은 자본주의의 극대화를 앞세운 신자유주의로 인해 생태계 보전을 위한 길과는 정반대로 치닫고 있다. 직접투자자들은 창조의 보전의무를 외면한 채 최대의 이윤추구를 위해 생태계보호를 위한 국가 규제를 완화하거나 환경파괴에 대한 국가의 방조를 요구하는 실정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제품의 생산과 소비의 확산은 지구적 차원의 자원 소모를 증가시키며, 다국적 기업으로 저개발 국가에 진출한 선진 자본은 그 지역에서의 자연 착취를 가속화하고 있다. 한편 선진 국가에 의한 자연파괴 외에도 저개발국가가 그들의 빈곤이 심화될수록 자연으로부터 직접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에 의존하게 됨으로써 빗어지는 자연 파괴 또한 심각해지고 있다.

        자연의 파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체에게도 어려운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인구과잉, 목장 및 위락시설 걸립, 토지개발, 대규모 산림벌채 등으로 광범위한 사막화를 초래함으로써 이 과정에서 많은 생물이 멸종하고 있다. 공룡시대에는 1천년에 1종의 생물이 멸종한 사실에 비추어보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산업시대의 초기 단계까지는 10년에 평균 1종의 비율로 생물이 사라졌고, 오늘날에는 매 시간당 3종의 생물이 멸종하고 있다.41) 이 같은 생명과 자연의 파괴는 생태계 스스로가 지닌 자정능력을 훨씬 넘어서고 있어서 생태의 복원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때에 자연이 가진 원래의 생태복원 능력을 도와줌과 동시에 인간에게도 유익한 먹거리를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음은 다행한 일이다. 현재 먹거리까지도 WTO체제에 의한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로 산업화된 대규모 농업생산물이 국내에 유입되고 있어서 우리 토양에서 자란 우리의 먹거리가 고사위기에 처해있다. 더구나 대량생산을 위해 이들은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직 검증되지 않은 유전자 변형에 의한 농산물을 늘이고 있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자연이 가진 생태복원의 능력을 증진시키며 자연의 원리에 따라 유기농업(Organic Gardening)으로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유기농업이란 자연농업이라는 농사법을 말하며, 자연친화형 농업, 환경보전형 농업, 지속 가능한 농업 등으로 불린다. 그동안 화학비료와 농약의 남용으로 자연을 더럽히고 농산물의 생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시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일어난 농사법을 말한다.42) 자연농업이란 자연 즉 흙, 물, 햇빛, 공기의 합작품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연을 되살리는 농사법이다. 유기농업의 원전으로 불리는 ‘농업경전’을 저술한 하워드는 자연이야말로 ‘지고의 농부’(Supreme Farmer)라고 하였다.43)  이러한 맥락에서 페섹(Pesek)은 농업의 역할을 ‘총체적 자원의 보호’라고 전제하고, 그 목적은 다가올 세대에게 쾌적한 원래의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자연을 물려주는 것이라고 하였다.44) 지금까지 풍요롭다는 산업사회를 건설하면서 피폐해진 자연환경을 원래의 상태로 복원시키는 일이 농업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자정능력이 있고, 원상으로 복원하는 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먹거리를 생산하는 유기농업 이야말로 생태를 복원하는 일이다.

        자연의 복원을 선교적 과제로 인식한 것은 1989년 산안토니오 세계선교대회였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선교’라는 전체주제를 4개의 분과로 다루면서 제3분과에서는 ‘땅은 주님의 것’(The Earth is the Lord's)이라는 소주제 아래 토론하였다.45) 여기서 올바른 선교의 실천으로 땅의 문제를 다루었다. 모든 피조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것이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든 영역(territory)과 땅(Land)은 그의 것이며, 그의 것으로 남아야 한다. 특히 ‘창조세계의 보전’의 관점에서 땅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잘못된 세속화 신학의 창조 관에 근거한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되고 오염된 세계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하였다. 동시에 땅을 포함한 환경보전의 문제를 신학적, 선교적 과제로 구체화시키는 일환으로 세계교회협의회 내에 ‘환경보전과 땅’의 문제를 전담하는 기구를 설립하도록 추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성서는 자연에게도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땅의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심을 말한다(시 104:30). 특히 자연의 파괴로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구원을 갈망하는 오늘날 이 땅의 생태계를 원래의 상태로 복원시키는 일은 중요한 선교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창조세계의 보전’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는 이 땅을 자연의 섭리대로 가꾸어서 먹거리를 생산하고 동시에 생태복원에도 기여하는 유기농업을 적극 지원하여야 한다. 이 같은 과제야말로 만물을 새롭게 하며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3. 더불어 사는 생태복지선교

생태계의 복지는 모든 존재의 복지, 그 가운데서도 인간의 생존과 복지의 전제조건이 된다. 생태계 파괴는 한 개인, 한 집단, 한 국가의 복지문제가 아니라 이 모두가 속해있는 전체 시스템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가 건강하지 않고는 인간의 건강은 물론 생존까지도 결코 보장될 수 없다.46)

        이와 관련된 한 예를 보더라도 인간은 생태계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가 지난 4억만 년 이래로 대기 가운데 산소의 비율을 21%로 고정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밀림지역에 살고 있는 흰개미의 덕분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다. 지구에 생명이 존재한 이래 적정한 기후체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우리들의 발에 흔히 밟히는 작은 개미였다. 그러나 생태계의 파괴는 지구를 향한 태양열의 반사를 30-50% 정도 늘였고, 이로 인한 지구상의 산소량이 늘어남으로써 화재발생률을 높이고 있다. 산소가 단 1%만 증가하여도 지구는 지금보다 60% 이상으로 화재발생률이 높아지는데, 이 증가된 산소량을 소비하는 것이 바로 흰개미들에 의해 방출되는 메탄이라는 것이다.47)

        이렇게 본다면 인간은 피조물에 대한 신적인 청지기라기 보다 생태계에 힘입어 살아가는 하나의 일시적으로 머무르는 나그네와도 같은 존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혹 청지기라고 하더라도 자연을 다스리는 위치에서가 아니라 창조세계를 보전하는데 봉사하는 위치에서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생태복지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에서는 인간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 내는 시장의 자연적 합리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시장만능주의에서는 시장법칙이 곧 절대자이고 이 절대자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허용되지 않는다.48) 다만 여기에서 낙오되거나 희생된 자들을 도와주고 돌보아주는 인간중심의 복지를 시행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고 있다.

        시장만능주의로 표현되는 신자유주의 경제 안에서 약자는 언제나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사회적 한계를 지닐 뿐 아니라 인간만을 위한 복지로는 생태계의 한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마저도 돌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시장경제를 생태학적으로 규율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야 한다. 즉 신자유주의 시장원리는 최대의 이윤추구를 위해 자연을 파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태계를 복원하고 보전하는 측면에서 시장원리를 통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이해관계에 놓인 노동자과 자본가, 생산자와 소비자 등 사회세력과 시민단체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토대로 국민경제의 운영목표에 생태계보전을 명시하고 그를 위한 기금을 조성하며, 기업의 의사결정과정에 이웃주민과의 생태계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함께 감독하며, 기업의 지배구조를 친생태적으로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다.49)

        무엇보다 시장경제 안에서 희생당하는 복지수요자(Clint)에게도 생태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인간중심의 일시적인 처방이 아닌 생태계의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중심의 생태공동체’를 이루어 가는 것이 오늘의 선교적 과제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국가적 차원을 넘어 국제적인 협력을 이끌어내야 하며, 현재 펼쳐지고 있는 세계교회협의회의 ‘창조세계의 보전’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한반도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북의 핵무기 문제와 이남의 핵발전소와 핵폐기장 문제도 민족을 넘어 온 지구적 차원에서 모든 생명중심의 생태공동체를 형성하는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시며 생태계 전체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참여는 이제 생존을 위한 필수적 선교 과제가 되고 있다.


IV. 끝맺는 말


한반도의 핵문제는 현재 전 세계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 핵은 전 지구와 생태계의 파멸을 몰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태계에 군림하는 주인도 아니며 그것을 초월할 수도 없는 단지 그들과 더불어 살다가 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필요성에 따라 동물을 복제하고 착취한다면 영화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인간에게 다시 재앙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현재 지구상에는 매 시간당 3종의 생물이 사라지고 있으며 20년 안에는 모든 생물의 1/5가 살아지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땅, 공기, 물, 자원 등 자연의 파괴는 이제 생태계 스스로가 지닌 자정능력과 생태복원력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실로 재앙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선교’의 주된 관심사인 온 피조물과 생태계의 구원에 참여하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교회와 인간이 아닌 세계와 생태중심의 선교신학을 정립하여야 한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독교가 창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잘못해온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생명이며,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과도 생명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오늘의 생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직결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이 세계의 생태를 복원하며 안전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유기농업은 피폐해진 오늘의 농민과 온 인류를 살리는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생태계가 건강하지 않고는 인간도 건강할 수 없으며, 모든 생물체는 함께 운명을 나누는 한 생명공동체다. 이제는 인간 중심의 신학과 세계관, 농업과 경제, 사회와 복지에서 생태중심으로 전환되고, 삶으로 바르게 실천되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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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logical Crisis and missiological Task


Kim, Eun-Soo

Professor

Jeonju University

Jeonju, Korea


Abstrakt

Atom ist aktuelle Issue in Korea, zum Beispiel die nukleare Ausruestung in Nord-Korea, Kernkraftwerk & Kernbrennstoff Schuttabladeplatz in Sued-Korea. Trotzdem friedlichen Verwendung der Kernenergie ist es sich sehr bedrohende Sache die Lebensumstaende. Die Menschen sind die Reisenden in der Welt, die unter dem Oekologie-System ueberleben muessen. Wir sollten bewahren die Schoepfung, die bis noch jetzt von Menschen zu viel zerstoert und ausgebeutet wird. Die Welt geht unter zugrunde, wenn wir das Oekologie-System nicht sorgen und pflegen. Das Oekologie-System hatte frueher selber Reinigungkraft and Wiederstellungkraft, die aber now unfaehig gemacht wird.

        Gott ist sein eigener Missionar, also Mission ist Mission Gottes. 'Missio Dei' zielt auf das umfassende Heilshandeln in der Welt. Wir als Werkzeuge an der Missio Dei sollten am Heilshandeln Gottes der ganzen Schoepfung teilnehmen. Die heutige wichtigste missionarische Aufgabe ist die Verantwortlichung zur oekologischen Krise. Dafuer sollten wir sich zur Bildung der oekologischen Missionstheologie bemuehen. Die traditionelle westliche Theologie hat ausgelegt mit falschem Method zur Bible ueber Schoepfung zum Beispiel Genesis 1,28. Und noch eine missionarische Aufgabe ist der organische Ackerbau, der die beschaedigte Oekologie-System gut wiederstellen und das Volk mit gefahrlos Lebensmitteln versehen kann. Nichtzuletzte Aufgabe ist ein oekologischer soziale Wohlstand. Die Menschen koennen nicht allein, sondern nur mit dem Natur in der Welt zusammen ueberleb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