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현안과이슈

전교조, 참교육의 깃발을 내리다(이기정)

강산21 2008. 9. 12. 14:40

전교조, 참교육의 깃발을 내리다


 

전교조만이 헌신할 수 있었다.

     

학교의 개혁은 벌써 시작되었어야 했다. 시대의 흐름을 생각할 때 학교의 개혁은 오래전에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했었다면 충분히 개혁이 진행될 수 있었는데도 학교의 개혁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학교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교육에 대한 열정과 사랑, 그리고 교육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힘을 가진 자만이 그러한 개혁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개혁의 추진은 참교육의 기치를 내걸고 탄생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전교조가 아니고선 그 어느 누구도 추진하기 힘든 일이었다.


정부, 즉 교육부가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교육부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행정 관료이다. 교사가 아닐뿐더러, 교육자라고 보기도 어렵다. 교육에 관련된 사무행정업무를 하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지금의 학교 제도가 자신들에게 이롭다. 교육부 - 교육청 - 교장 -교감 -부장교사- 일반교사를 타고 내려가는 행정라인의 꼭대기에 그들이 있다. 그들이 수십 만 교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것 같은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교사들이 행정라인에 철저하게 편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이 행정라인에서 벗어나 수업과 교육에만 전념하겠다고? 교육부 관료들이 절대 먼저 나서 허용할 리 없다. 그들이 학교개혁에 나서는 것은 교육부 바깥에서의 압력이 있을 때뿐이다.


교육청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다. 교육부나 교육청이나 그게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최대교육단체인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에서 학교개혁에 적극 나설 수 있을까?  교총은 지금의 학교제도에서 가장 많은 이익을 보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교사들이 가장 많이 가입해있는 단체다. 그들에게는 사무행정업무 중심의 학교를 바꾸어야 할 이유가 없다. 학교가 사무행정 중심이 되면 될수록 학교에서 그들의 입지가 더 넓어지니까 말이다. 학교가 교육중심이 되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의 입지가 초라해 질 수 있다. 특히 교장선출제는 그들에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독일 수 있다.


그러니 교총은 결코 학교개혁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겐 기대할 것이 전혀 없다. 학교개혁을 방해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학부모는, 그들은 너무나 다양하고, 무엇보다 조직화가 되어 있지 않다.


결국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만이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교조는 학교개혁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전교조, 학교 개혁을 버려두고 풍차와 싸우다


나는 합법화 이후 전개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의 투쟁을 생각하면 항상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된다.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 중등교사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임용 반대 투쟁, NEIS 반대 투쟁, 교원평가제 반대 투쟁 등 합법화 이후의 대부분의 투쟁에서 나는 돈키호테를 떠올렸다.


독자 여러분은 보잘 것 없는 내 글은 잠시 제쳐두고 세계적인 명작을 잠시 감상해 주시기 바란다.

 

주인과 종자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길을 가다가 들판에 3,40개나 우뚝우뚝 서 있는 풍차를 발견하였다. 이것을 보자 돈키호테는 종자에게 말했다.


“행운의 신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사건을 마련해주는구나. 산초여, 저것 좀 보아라. 그 증거로 서른이 훨씬 넘은 괘씸한 거인들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느냐. 나는 저 놈들과 싸워서 몰살을 시킨 뒤 그것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거부가 되어야겠다. 이 싸움은 정의의 싸움으로, 이런 사악한 씨를 이 지구상에서 뽑아 없애는 것은 신에 대한 커다란 봉사이기도 한 것이다.” 


“거인이라뇨?”하고 산쵸 판자가 묻는다.


“바로 저기에 있는 게 그놈들이 아니고 뭐냐?”하고 주인은 대답했다. “저놈들 말이다. 놈들 중에는 2레구아나 되는 긴 팔을 가진 놈도 있지 않느냐?”


“잠간만 나리” 하고 산초 판자가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닙니다요. 풍차란 말입니다요. 팔이라고 하시는 것은 날개인데, 바람의 힘으로 돌아서 맷돌을 움직이죠.”


“옳지, 알겠다.”하고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너는 정말 이런 모험은 도통 모르는 구나. 저놈은 틀림없는 거인들이야. 만약 겁이 나거든 여기 멀리 떨어져서 내가 저놈들을 상대로 하는 치열하고 일찍이 보지 못한 싸움을 기도나 드리면서 구경하고 있거라.”


이렇게 말한 돈키호테는 산쵸 판자가 아무리 풍차라고 설명을 하여도 들은 척도 않고 자신의 애마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튼 그는 몸들이 거인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종자 산쵸 판자의 말도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까이 가서도 상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볼 생각도 않고 오히려 소리 높이 외쳤다.


“비록 네 놈들이 저 거인 브리아레오(50개의 머리와 100개의 팔을 가졌다고 한다.)보다 많은 팔을 움직인다 할지라도 나하고 한판 겨루지 않으면 안 될 줄 알아라!”


이렇게 외치면서 사모하는 여인, 둘씨네아에게 이런 위기에 처한 나를 보호 하소서, 하고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면서 방패로 몸을 가리고 창을 옆구리에 끼고 로시난떼의 네 굽이 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돌격해 들어가서, 바로 정면에 있는 맨 처음의 풍차를 향해 창을 냅다 찔렀다.


그가 일격을 가하자, 세찬 바람을 받아 무서운 힘으로 돌아가는 날개를 찌른 창은 박살이 나고 동시에 사람과 말도 휩쓸려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들판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 범우사 ‘돈키호테’ )  


 

내가 전교조를 생각하면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된 계기가 된 것은 전교조가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에 조직의 모든 힘을 쏟아 부을 때였다.


나는 왜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을 보며 돈키호테를 떠올린 것인가?


돈키호테의 풍차, 전교조의 7차 교육과정

 

우선 ‘7차 교육과정’이 무엇인가 살펴보자. 전교조 홈페이지에 들어가 자료를 뒤졌더니  전교조의 한 이론가는 ‘7차 교육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았다.


   <  7차 교육과정 개요  >


 가.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과정의 편성

    국민 공통 기본 교육기간 설정 : 초등 1학년~고등 1학년(10년 간)

    단계 또는 학년제 개념에 기초하여 일관성 있는 구성


나. 고교 2, 3학년의 학생 선택 중심 교육 과정 도입

    일반 선택과 심화 선택으로 구분, 다양한 선택과목 개설

    과정이나 계열의 구분 없이 운영, 학생의 선택 폭 확대


다. 수준별 교육 과정의 도입

    학생의 능력, 개인차에 따른 다양한 교육 기회 제공

    단계형, 심화・보충형, 과목 선택형 수준별 교육 과정 편성・운영


라. 재량 활동의 신설 및 확대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의 신장

    학교 교육 과정 편성・운영의 자율성 및 학생의 선택권 부여


마. 교과별 학습량의 최적화와 수준의 조정

    최저 필수 학습 요소를 중심으로 교과별 학습 내용 정선

    이수 교과목 수의 축소와 범위・수준의 적정화 도모


바. 질 관리 중심의 교육 과정 평가 체제 확립

    교과별 교육 목표 성취 기준 설정

    주기적인 학력 평가 및 학교 교육 과정 운영 평가


사.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창의성, 정보 능력 배양

    컴퓨터 교육 내용의 강화

    개방적 자기 주도 학습 능력을 촉진하는 창의적 교육 활동

 

전교조는 이 7차 교육 과정을 저지하려고 결사적으로 2년을 싸웠다.

그것이 전교조의 눈에는 사악한 거인(괴물)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그냥 별것 아닌 풍차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전교조가 ‘7차 교육과정’에서 괘씸한 거인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7차 교육과정’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수준별 교육 과정의 도입’과 ‘고교 2, 3학년의 학생 선택 중심 교육 과정 도입’ 때문이었다.


먼저, ‘수준별 교육 과정의 도입’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자.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의 초기에는 수준별 교육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점차로 투쟁은 ‘고교 2, 3학년의 학생 선택 중심 교육 과정 도입’의 문제점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수준별 고육과정에 대해서는 교육부의 입장과 전교조의 입장을 간단히 비교해보는 선에서 그쳐도 충분할 것이다.


 교육부가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력 차이가 심한 학생들을 한 교실에 모아 놓고는 제대로 된 수업을 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교육부의 주장은 대략 다음의 말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좋은 교육은 학생의 개인차가 충실히 고려되는 교육이며, 개별화는 교육 선진화 정도의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되므로, 학생들의 잠재 능력의 발휘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개인차를 고려한 교육을 하여야 한다.  


그러면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한 전교조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전교조는 수준별 교육과정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 수준별 교육과정은 비교육적이다.

․ 교육적 가치의 일부에 불과한 성적이 학교 교육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 수준별 교육이다.

․ 출발 단계에서의 학습 수준 차이를 학습 능력의 차이로 고착화 시킨다.

․ 학생들의 잠재적 능력의 개발을 가로막는 치명적 오류를 범할 수 있다.

․ 수준별 교육을 했을 때 낮은 수준에 속해 있는 학생들은 낮은 자신감, 보다 많은 탈선 행동 등을 보인다.


‘수준별 교육과정’에 대한 나의 생각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고,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다. 위에 얘기된 것만으로는 ‘수준별 교육 과정’의 장단점을 다 알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악한 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가? 나는 7차 교육과정의 수준별 교육과정이 교육부가 의도한대로 성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교조가 기를 쓰고 무찔러야 할 정도로 사악한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겐 전교조가 풍차를 사악한 거인으로 생각하고 싸우는 돈키호테로 보였다.


신자유주의와  싸우고 싶었던 전교조


전교조가 ‘7차 교육과정’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문제 삼은 것은 ‘고교 2, 3학년의 학생 선택 중심 교육 과정 도입’ 이었다.


학생의 능력, 적성, 필요, 관심의 차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여 자신의 진로와 능력 수준에 알맞은 과목을 학생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대체 고등학교 2, 3학년 때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에서 전교조는 어떤 문제점을 보았을까?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기에 전교조는 학생들에게 과목 선택의 자유를 주자는 주장에서 사악하고 괘씸한 괴물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일까?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핵심은 결국 이것이었다.


“ 7차 교육과정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다.”


그것은 어쩌면 IMF 경제 위기 때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당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로서는 한 번 쯤은 떠올려 볼 수 있었음직한 생각이었다. 사실 경제 발전의 진정한 주역이었던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무참히 목이 잘려 나가야 했던 것은, 참기 힘든 부조리함 그 자체였다.


아무리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용납하기 어려운 폭력이었다. 무엇보다도 해직 당한 당사자들로서는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IMF 당시의 구조조정은 괘씸한 괴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설사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악한 괴물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전교조는 IMF 경제 위기 때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이 수많은 노동자의 목을 자른 것처럼, ‘7차 교육과정’도 수많은 교사들의 목을 자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교조는 ‘7차 교육과정’의 도입을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음모라 규정한 것이다. ‘7차 교육과정’이 실제로 수많은 교사들을 고통스런 구조조정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7차 교육과정’과의 싸움은  돈키호테의 말마따나 ‘정의의 싸움’이라 할만했다.


그러나 ‘7차 교육과정’으로 인해 수많은 교사들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실제로 학교에서는 ‘7차 교육과정’으로 인해 자신들이 직장을 잃게 될 것이라고 걱정하는 교사들은 거의 없었다. 사실 그것은 처음에는 전교조를 이끄는 극소수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학교마다 전교조의 활동가들이 ‘7차 교육과정’의 폐해를 설명하러 다녔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학교에도 전교조의 활동가가 와서 “7차 교육과정’으로 인해 수많은 교사들이 직장을 잃을 위험이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물론 전교조의 이러한 노력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했다. 많은 교사들이 실제로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전교조의 주장이 교사들에게 완전히 무시당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 당시 전교조에게는 도덕적 카리스마가 있었다. 참교육이라는 대의를 위해 오랫동안의 희생적으로 싸워오면서 쌓아올린 전교조의 도덕성은, 교사들로 하여금 전교조의 주장을 무작정 외면할 수만은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교조의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나는 전교조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이후 싸늘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도저히 전교조의 “7차 교육과정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다”라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7차 교육과정’을 당장 창을 들고 달려가 무찔러야할 괘씸한 거인, 사악한 괴물이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독단적인 주장 외에는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었다.


결국 전교조는 ‘7차 교육과정’을 막아내지 못했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7차 교육과정’이 한창 시행 중이니 말이다. 그러나 ‘7차 교육과정’으로 인해 직장을 잃은 교사는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나의 관점에서 이것은  ‘7차 교육과정’에 대한 전교조의 인식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결정적 증거였다. ‘7차 교육과정’은 괘씸한 거인이 아니라 그냥 풍차일 뿐이었다.


그러나 전교조에서는 누구도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 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는 여전히 ‘7차 교육과정’은 무찔러야 할 사악한 괴물로 보이는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 대신 ‘교장선출제’나 ‘교육과 사무행정의 분리’를 이루기 위한 투쟁을 했다면 지금 학교는 얼마나 좋아졌을까? 학교의 개혁을 위한 투쟁을 했다면 학교 교육은 얼마나 많이 개선되었을까? 그 때 전교조가 가졌던 그 커다란 힘을 풍차가 아닌 진짜 사악한 괴물과의 싸움에 돌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당시의 전교조에는 교사들은 물론이고 상당수의 국민들이 인정하는 도덕적 권위가 있었다. 그 힘이 풍차와의 싸움으로 낭비되었다고 생각하면…, 생각하면 할수록 나는 분통이 터진다.


‘제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이 있은 지 벌써 몇 년이 지났건만, 나는 아직도 그 어리석은 투쟁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 없다.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은 이미 끝났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전교조는 그 이후에도 계속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만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 때의 관점과 어리석음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전교조는 사실상 그때 이미 참교육의 깃발을 내린 것이었다. 교육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잃기 시작한 그 이후, 더 이상 전교조는 참교육의 가장 믿음직한 보루가 아니었다.


합법화 이전, 참교육을 위해 보인 그 희생적이고 용기 있는 모습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는가?


지금의 전교조는 비합법 시절에 쌓아놓은 도덕성을 조금씩 갉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 때의 자산이 너무 크기에 전교조는 한참동안 더 참교육의 깃발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자산을 다 써버리고 나면 이제 전교는 어쩔 것인가? 오직 교사의 이익만을 지키는 이익 단체로 전락해 버릴 것인가? 어쩌면 그게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무엇보다도 전교조는 교사들의 노동조합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교조를 생각하면 참교육을 떠올리게 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은  안타깝고 슬플 것이다. 

 

 

7차 교육과정 투쟁이 지불한 기회비용 - 참교육


지금은 전교조 내부에서도 ‘7차 교육과정’에 너무 많은 역량을 소모했다는 비판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늦게라도 일부의 사람이나마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는 것은 다행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아직 전교조 일부에서 나오는 자기반성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그 반성의 강도가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이 전교조에 끼친 해악에 비하면 그야말로 턱없이 부족하다. 전적으로 잘못된 투쟁을 해놓고 기껏해야 너무 많은 역량을 소모했을 뿐이라니! 그럼 투쟁의 강도를 조금 줄였으면 잘 된 투쟁이었단 말인가? 이것은 비겁한 반성이다. (이 책이 출판을 기다리는 동안 7차 교육과정 투쟁을 전면적으로 반성한 교사가 전교조의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러나 조직력의 현격한 열세로 낙선했다. 물론 나는 그 후보를 밀었다)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으로 인해 참교육의 전교조가 상실한 도덕성을 생각해보라. 이 투쟁으로 말미암아 전교조는 교사들의 편협한 이익만을 옹호하는 집단으로 의심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이 있었기에 이후의 잘못된 투쟁이 계속해서 뒤따라 나오게 된 것이었다.


중등교사자격증 소지자의 초등학교 교사임용 반대 투쟁, NEIS 반대 투쟁, 교원평가제 반대 투쟁 등은 모두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과 동일한 사상적 관점에서 나온,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이 존재했기에 있을 수 있었던 잘못된 투쟁이었다.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의 오류는 단순히 역량을 조금 과도하게 사용한 정도의 오류가 아니라 투쟁 그 자체가 오류였던 것이다.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으로 인해 지불한 기회비용을 생각해보라.


그 투쟁으로 인해 우리는 학교개혁의 가장 소중한 기회를 잃었다. 일제시대를 거쳐 군사독재 정권을 거치는 과정에서 완성되고 공고화된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행정중심의 학교를 학생과 교사 중심의 민주적인 학교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었다.


참된 교육을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이 수십 년 동안 학교에서 마주쳐야 했던 가장 커다란 장애가 무엇이었던가?  교장이라는 벽 아니었던가? 그리고 교장에게 줄 선 교사들이 만들어내는 비교육적인 학교 문화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여러 가지 다양한 교육 개혁 중에서도 전교조 교사들이 1등으로 원하는 것은 ‘교장선출제’가 아니었던가? 민주적인 교장, 민주적인 학교, 오로지 교육에 헌신할 수 있는 학교, 이것이 참교육에 헌신하고자 하는 전교조 교사들이 가장 간절히 열망하던 것 아니었던가?


그러나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과 그 뒤를 이은 일련의 잘못된 투쟁에 헛된 힘을 쓰다가 우리는 학교개혁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의 대가로 지불한 기회비용은 ‘학교개혁’이었고, 학교개혁을 통해  이룰 수 있었던 ‘참교육’이었다. 참으로 값비싼 비용을 지불한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이었다.


진보의 자세를 버린 전교조


학생들에게 교과목 선택의 자유를 준다는 7차 교육과정은, 얼핏 생각을 해보아도 학생들의 수업부담을 줄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되는 면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학생들은 너무 많은 과목을 공부하고 있으므로 과목 수를 줄여서 학생들의 수업부담을 줄여줘야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전교조의 주장이기도 했었다.


그래서인지 전교조에서 맨 처음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을 할 때는, 7차 교육과정에 대해 비판할 때 교원 구조조정의 가능성을 크게 부각시켜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7차 교육과정이 설사 좋은 것일지라도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실행하기가 어려운 이상적인 것이므로 막아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기도 했었다.


좋은 것이지만, 실행이 어려우니 안 된다? 여러분은 이 말이 진보와 개혁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말이라는 것이 쉽게 이해가 가는가? 실행에 어려움이 좀 있더라도 꿈과 이상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 진보와 개혁을 내세우던 사람들의 모습 아니었던가? 학생들을 위해서 좋은 것이라면, 실행이 어려워도 과감하게 주장을 하는 것이 전교조가 보여야 할 모습 아닌가? 


좋은 것이지만, 실행이 어려우니 안 된다? 이런 말은 오히려 항상 변화를 두려워하는 권력자들이 하던 말 아니었던가?  학생들에게 좋은 것이지만 실행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못 하겠다? 이 말은 교육부에서 해야 될 말 아닌가? 그런 말은 진보가 아닌 보수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아닌가?


물론 7차 교육과정에서 학생들이 원하는 만큼의 선택권을 충분히 보장받을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학생들의 수업 부담이 현격히 줄어든 것도 아니었다. 교육부에서 의도했던 7차 교육과정의 이념이 학교 현장에서 실제로 실행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실행이 어렵다고 해서, 7차 교육과정을 반대하는 투쟁에 전교조의 온 힘을 쏟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행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실행조건을 갖추라고 투쟁하는 것이 옳은 것이었다. 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진보의 마음이었다. 실현조건을 시시콜콜히 따지며 이상을 거부하는 것은 이미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현실을 무시할 수만은 없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그런데 교육부가 하자고 하는 바람직한 정책을, 현실 속에서 실행하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전교조가 반대하고 나서야 한다고?


나의 관점에서는 그 당시의 전교조는 ‘돈키호테’에다가  ‘꼴통 보수주의’이었다.  


잃어버린 학교개혁의 기회들


합법화 이후 전교조의 투쟁은 나를 실망시키고 분노하게 했지만 지금 이 책을 통해 전교조를 비판하는 나의 마음은 아프고 혼란스럽다. 나 또한 우리나라 교육의 희망을 전교조에서 보았던 사람이며(그리고 아직도 그러한 생각을 조금은 가지고 있으며), 나의 아내가 전교조 활동가이고, 나의 절친한 대학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거의 모두 전교조 회원들이니 말이다.


 그렇더라도 나는 학교개혁의 실종이라는 값비싼 기회비용을 지불한 전교조의 다른 투쟁에 대해서도 간단하게나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과 함께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중초임용(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의 초등교사임용) 반대투쟁’은 ‘7차 교육과정 반대투쟁’만큼이나 어리석은 투쟁이었다. 


당시에 초등학교는 초등교사가 많이 부족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학급의 학생수를 줄인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당시 정부는 학급(교실)의 학생 수를 빠른 속도로 줄여나갔는데, 이것이 (초등학교 교사 자격증 소지자는 중등학교 자격증 소지자에 비해 숫자가 매우 적었으므로) 초등교사의 부족 사태를 초래했던 것이었다.


학급 당 학생수를 줄여 교육 여건을 개선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그것은 당시 전교조에서도 강력하게 요구하던 것이었다. 학급 당 학생수의 감축은 이수호 전교조 위원장이 선거에서 내걸었던 3대 공약 중 하나 이기도 했다.


물론 학급 당 학생수 감축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교육부가 교사의 수급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것은 분명히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것은 분명 교육부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부족한 교사를 충원하는 교육부의 방식이 상식을 벗어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교육부가 내 놓은 대책은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를 일정한 기간 교육시켜 초등학교 교사로 임명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전교조의 비판은 두 가지로 집약되었다.


1. 초등교육의 전문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다. 짧은 기간 동안의 연수로 초등교사가 가져야 할 전문성을 갖추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칫 초등교육의 질이 떨어질 수 있다. 


2.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일환이다.


먼저 첫 번째 비판을 살펴보자.


초등수업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다는 지적은 어느 정도까지는 타당하다. 아무래도 중등교사가 되려고 했던 사람의 능력보다는 처음부터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준비한 사람의 능력이 더 뛰어날 것이 분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학급의 학생 수가 줄어서 높아질 교육의 질을 감안하면 크게 시비를 걸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교육부의 안이한 행동을 비판하고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굳이 전교조의 역량을 총동원하여 투쟁할 사항은 아니었다. 전교조에서 나서서 학급의 학생수 감축을 잠시 중지해달라는 요구를 할 사항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면 황당함을 금할 수 없다.


내가 사는 동네의 초등학교 담벼락에는 학급의 학생수를 줄여야 한다는 현수막이 전교조의 이름으로 아직 걸려있는데, 전교조 정책실장의 이름으로 발표된 한 성명서에는 학급당 학생수 감축 과정을 잠시 중지해야한다는 전교조의 주장이 담겨져 있었으니 말이다.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학급의 학생수를 줄이는 것으로 인해 비롯된 중초임용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아니었다. 노동자 계급의 관점에서 사고한다면 오히려 교사들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학급의 학생 수를 줄이는 것은 기업체에서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감축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가 있다.


노동시간을 줄이면 노동자에게는 어떤 효과가 있는가?


1. 노동시간을 줄이면 노동자의 삶이 더 행복해진다.

2. 노동시간의 감축으로 인해 더 많은 노동자가 필요해지므로 실업자가 줄어든다. 물론 노동시간이 줄면 그로인해 일의 효율성이 높아지게 마련이므로 줄어든 노동시간에 정비례하여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규 고용의 필요성이 커지는 것은 분명하다.


학급의 학생수를 줄이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1. 수업이 학생 수가 많았던 때보다는 수업이 더 쉬어진다. 교육의 질이 올라갈 뿐만 아니라, 교사가 전보다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2. 학교의 학급 수가 늘어나므로 더 많은 교사가 필요해진다. 교사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었던 실업 상태의 교사 자격증 소지자들이 일자리를 얻을 기회가 더 늘어난다.(그래서 초등교사 자격증 소지자가 부족해졌고 남아돌아가는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에게 기회가 오게 된 것이다.)


결국 기업체에서 노동 시간을 줄였을 때 나타난 결과와 거의 똑 같은 결과가 학급의 학생수 감축으로 인해 생겨났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긴커녕 오히려 교사노동자의 일자리를 늘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교조는 중등교사 자격증 소지자의 초등교사 임용을 반대했다.


NEIS 반대 투쟁 또한 전교조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적개심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NEIS 저지 투쟁은 신자유주의 대한 반대 투쟁이 아니었다. NEIS와 신자유주의 사이에는 특별한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결국 전교조는 또 다시 풍차와 싸운 돈키호테였다.


NEIS는 과학기술의 발달, 정확히는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을 반영하는 시스템일 뿐이다. 정보통신기술이 어느 정도 발달해서 CS 시스템이 가능했고, 고도로 발달해서 NEIS 시스템이 가능했을 뿐이다. 굳이 NEIS를 신자유주의로 규정하고 2년을 결사적으로 투쟁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NEIS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NEIS 시스템을 신자유주의와 연결시켜 폐기를 전제로 하는 투쟁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전교조 지도부가 신자유주의를 조금도 받아들일 수 없는 악으로 규정한 상태에서 NEIS를 신자유주의의 결과물로 본 순간 강경 투쟁이외는 다른 길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7차 교육과정 반대 투쟁으로 2년을 소비한 전교조는 또다시 소중한 2년 세월을 헛되이 탕진할 수밖에 없었다.


교장선출제 등 학교개혁을 위한 투쟁은 이렇게 또다시 버려졌고, 전교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욱 더 추락했고, 조합원들의 실망도 커져갔다.


NEIS 반대 투쟁 이후 진행된 교원평가제 반대 투쟁은 전교조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을 결정적으로 외면한 투쟁이었다. 오히려 전교조는 학생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교원평가를 주장했어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한 월간지 기자가 나에게 한 말이 아직도 뼈저리게 가슴에 남는다.


“좋아요. 전교조는 노동조합이니까 교사들 이익 투쟁 하는 것 이해해 줄 수 있어요. 그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런데 왜 꼭 그때마다 참교육을 내세워요? 위선 아니에요? 참교육을 내세워 이익 투쟁하는 것은 문제 있지 않아요?”  


합법화 이후 전교조가 정성을 기울인 투쟁 어디에도 학교 개혁을 위한 투쟁은 없었다. 그러한 투쟁은 항상 전교조의 주변만을 맴돌 뿐이었다.


*******************************************************************************************

 이 글은 이기정 선생(현 창동고 국어선생님, 서울대 국어교육학과 졸)이 쓴 '학교개조론(미래M&B 2007.9)'의 일부인 제7장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