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슈·현안

불온서적 딱지는 20년 민주화과정 스스로 부정하는것

강산21 2008. 8. 17. 18:04

불온서적 딱지는 20년 민주화과정 스스로 부정하는것

기사입력 2008-08-17 17:17 


ㆍ‘지상에 숟가락 하나’ 작가 현기영

‘1999년 출간. 현재까지 50만부 판매. 2008년 8월 2주 주요인터넷서점 베스트셀러 10위권 재진입.’

소설가 현기영씨(67)의 장편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실천문학)의 프로필이다. 5년 전 MBC 교양프로그램 ‘느낌표’의 추천도서로 지정되며 널리 읽혔던 소설이 국방부가 지정한 불온서적 23종에 포함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광복절을 앞두고 만난 작가는 요즘 신문에 실린 불온서적지정을 패러디한 책광고에 자신을 ‘현상수배범’으로 만들어놓았더라며 웃었다. 그가 1975년 신춘문예 등단 이후 펴낸 첫 소설집 ‘순이삼촌’(1978)이 금서목록으로 지정된 바 있어 현씨는 30여년 만에 다시 불온서적 명단에 이름을 올린 ‘영예’의 작가가 됐다.

“자전적 성장소설에 ‘북한찬양’이라는 붉은 딱지를 붙이니 지금 내가 어디 살고 있나 싶어요. 아무리 책을 뒤져도 북한에 대한 언급도, 단어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데 왜 ‘북한찬양’ 딱지가 붙었나 생각해보니 역시 제주 4·3사건을 다뤘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결론밖에 안 나와요. 하지만 4·3항쟁은 제주도에서 자란 한 어린이가 성장하면서 피할 수 없는 이야기로서 등장했을 뿐입니다.”

작가에 따르면,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제주의 아름다움을 그려보이기 위해 발표한 작품이다. “제주도는 세계적인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데, 그간 제 소설들은 4·3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한 소도구로만 제주의 바람과 구름, 산을 묘사했죠. 그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그려보자, 그 자연 속에서 한 아이가 자라는 과정을 통해 인간 정신을 탐구해보자고 쓴 작품입니다.”

4·3항쟁은 현기영문학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순이삼촌’ ‘마지막 테우리’ ‘변방에 우짖는 새’ ‘바람 타는 섬’ ‘아스팔트’ ‘젊은 대지를 위하여’ 등 그가 발표해온 작품 대부분은 4·3항쟁을 필두로 이재수의 난이나 해녀들의 항일투쟁 등 제주인들의 수난과 저항운동을 끊임없이 소개해왔다. 특히 4·3항쟁은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다.

“어떤 사명감을 갖고 쓴 것은 아닙니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움을 도모하는 것이며 자기해방인데, 제게 4·3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이걸 해방시키지 않으면 그 어떤 일도 헛된 것처럼 느껴졌어요. 78년 ‘순이삼촌’부터 98년까지 20여년간을 4·3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순이삼촌’은 현대사에서 가려졌던 4·3항쟁에 대해 본격적인 조명이 이뤄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끔찍한 고문의 기억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작가는 작품을 발표한 뒤 그 책을 들춰보기조차도 두려웠다고 했다. 그러나 ‘순이삼촌’을 비롯한 작품들이 일궈낸 성과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워했다.

“문학이 무얼 할 수 있느냐고 묻지만, 문학도 일을 낼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4·3에 대해 줄기차게 써오고 몸으로 뛰면서 결국 99년에 국회에서 ‘4·3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정부차원에서 진상규명이 이뤄졌잖습니까.”

그는 이번 불온서적 지정을 가리켜 정부가 민주화 과정을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라고 규정했다. “87년부터 20여년간 민주화과정이 진행돼왔고 누가 봐도 우리사회를 민주사회라고 규정하고 또 그렇게 인정돼왔습니다. 국군통수권자가 국가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과오라고 사과까지 한 마당에 국방부가 이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4·3뿐 아니라 그간 20년의 시간과 민주화 과정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지난 10여년간 그는 작품을 쓰지 못했다. 99년부터 2005년까지 제주 4·3 연구소 이사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 한국문예진흥원(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원장 등 쉴 틈 없이 공직을 수행하느라 바빴던 탓이다. 문예진흥원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그는 한동안 작가의 리듬으로 돌아가는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좋아하던 술을 끊고 명료한 정신으로 책을 읽고 산책을 했다. 쉬면서 작가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 돈 드릴로의 ‘화이트 노이즈’ 등 동시대 서구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고 했다. “우리 문학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읽을 수 있어 부러웠다”는 작가는 형식의 새로움에 대해 고민하면서 최근 도시적 삶에 관한 새로운 작품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그간 정통리얼리즘 작품을 써왔는데, 형식의 새로움을 도모하고 싶더군요. 제가 제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에 입학하면서 육지로 상륙했는데 정신적으로는 상륙을 못했었어요.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은 민중의 저항, 전통세계에 대한 향수 등 제주도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지금이야말로 서울의 삶, 현대적 도시를 살아가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쓸 때가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는 도시인들의 삶을 가리켜 “뜨거운 냄비 속의 삶”이라 비유하면서 “도시에서는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아마도 현재 집필 중인 작품 역시 지난 세기 민주화와 경제발전 및 IMF 외환위기 등으로 표상되는 한국현대사의 면면을 웅숭깊은 시선으로 담아내는 작품이지 않을까 짐작해봤다.

<글 윤민용기자·사진 강윤중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