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사설]‘법치’ 마저 짓밟은 공영방송 장악

강산21 2008. 8. 9. 10:30
[사설]‘법치’ 마저 짓밟은 공영방송 장악  
  

경향신문  기사전송 2008-08-09 00:37 
  
KBS 이사회가 어제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 제청을 결정했다. 감사원이 부실 경영과 인사권 남용 등에 대한 책임을 물어 KBS 이사장에게 정 사장 해임을 요구한 데 대한 응답이다. 이사회는 해외 출장 중인 1명을 제외한 10명이 참석했으나 안건 상정의 부당성 등을 지적한 4인이 퇴장한 가운데 친여 인사 6명의 전원 찬성 표결로 끝났다. 이를 위해 사복 경찰 500여명을 KBS 사내로 진입시켰고, 찬성표를 던진 6인은 사복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회의실을 나섰다. 이로써 이명박 대통령의 해임 절차를 남겨두긴 했으나 정 사장 퇴진은 기정사실화됐고, 이 정권의 ‘공영방송 KBS’ 장악도 사실상 완료됐다.


공영방송의 장악도 용납할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주목하는 것은 사유화한 권력의 퇴행이다. 사실 이 정권의 정 사장 밀어내기 시나리오에는 애초부터 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 사장 퇴진에 부정적인 이사는 그가 속한 대학에 압력을 넣어 교수직을 빼앗았고 이사회는 교수직 박탈을 들어 이사 자격이 없다며 축출했다. 비협조적 이사회 이사장은 지난 5월 일찌감치 갈아치웠다. 그 결과 KBS 이사회는 ‘7대 4 위원회’라는 별칭을 얻었다. ‘친 한나라당’ ‘친 이명박’ ‘반 정연주’ 인사들이 다수를 점하도록 해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거수기로 이사회를 전락시킨 것이다. 이런 행태야말로 선출된 권력의 ‘민간 독재’가 아니고 뭔가.

 

법리적 논란을 깡그리 무시한 이 정권의 오만도 경계할 일이다. 2000년 1월 현 모습을 갖춘 통합방송법에선 대통령의 공영방송 사장 면직 규정을 없앴다. 정치 권력과 자본, 시민권력 등 외부의 권력으로부터 간섭과 압력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취지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지닌다. 해임 근거를 놓고도 감사원의 해임 요구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견해부터 개인 비리가 아닌 경영 문제로 확대 적용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우세하다. 이 문제는 정 사장이 감사원을 상대로 해임요구 처분 무효확인 청구 소송과 효력집행정지신청을 서울 행정법원에 접수한 만큼 법원의 판단에 맡겨졌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대착오적 정권의 전횡에 전율이 느껴진다.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은 이사회의 결정에 앞서 한 라디오에 출연, “KBS 사장은 지난 정부에서 코드 인사로 선임됐고, 그런 문제를 정상화하는 과정”이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대선 캠프 인사를 YTN 사장에 앉히고, MBC ‘PD수첩’을 수사해 재갈을 물리더니, 제 사람을 심기 위해 KBS 사장을 내모는 이 정권이 코드 인사를 바로잡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KBS’ 운명공동체론을 되풀이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씨앗일 뿐이다. 이 정권이 진정 국민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민간 독재’를 꿈꾸고 있다면 명심하기 바란다. 정권은 유한하고, 역사는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