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현실그대로

점심시간 핑계로 여유부린 靑… 2시간 '안보공백' 허탈

강산21 2008. 7. 12. 15:37
김성덕 기자 / 2008-07-12 11:19
-합참은 어이없는 ‘질병사망’ 보고
-구멍 뚫린 靑-政 위기대응시스템


금강산에서 관광을 즐기던 박왕자(여·53)씨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시각은 11일 새벽 5시. 싸늘히 식어버린 시신은 8시간이 지난 오후 1시 남쪽에 인계, 속초병원에 안치됐다.

하지만 국군통수권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이때까지도 이 나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북한 인민군에 의한 남한 민간인 관광객 총격 피살 사건.

남북관계 전반을 뒤흔들 수도 있는 충격적이고 소름끼치는 사건인지라 누구보다도 신속하게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보고돼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사건이 대통령에게 보고된 시각은 오후 1시 30분.

박씨의 사망사건이 통일부에 보고된 시각이 오전 11시 30분이니까 무려 2시간 동안 국군통수권자가 모르는 ‘안보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엄밀하게 놓고 보면 자국민이 적국(敵國) 군인의 총에 맞아 숨진 이 사건은 명백히 안보 관련 중대 사안이다.

문제는 청와대의 위기대응시스템이다.

통일부가 청와대에 ‘박씨 피격 사건’을 보고한 시각은 현대아산 측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15분 후인 11시45분.

정정길 대통령실장과 김성환 외교안보수석이 동시에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통령에게 이를 즉각 보고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11일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이와 관련 심각하고도 중대한 ‘워딩(발언)’을 했다.

오후 4시 통일부의 사건개요 브리핑이 있은 직후 이 관계자는 청와대 기자실을 찾았다. 기자들은 이 대통령에게 곧바로 보고되지 않고 2시간의 공백이 발생한 데 대해 질문을 쏟아냈는데 이 관계자는 이렇게 답했다.

“점심시간도 끼어 있지 않느냐.”

이 관계자는 이 발언을 내뱉은 후 곧바로 “농담”이라며 서둘러 말을 주워 담았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는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의 이 발언에서 대통령에게 늑장보고가 이뤄진 원인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청와대 참모들이 점심시간이라는 이유로 여유를 부렸든지, 대통령의 점심시간을 방해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고 자체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한발 더 나가면 엄중한 사안 앞에 점심시간을 따질 정도로 청와대 위기관리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합동참모본부의 어이없는 ‘보고’다.

이미 총격사망 사건이라는 북한 측의 통보가 있은 뒤 어이없게도 ‘질병사망’이라는 보고를 청와대에 올려 내부 혼선을 일으켰다.

이런 군을 국민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을지 한심할 뿐이라는 한탄이 들린다.

이 대통령이 사건을 보고 받고도 ‘대북 중대 제안’이 담긴 국회 시정연설을 강행한 것도 논란거리다.

국회 시정연설은 오후 2시 20분부터 시작됐는데, 총격 사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보고를 받고 약 1시간 동안 대북 제안 내용을 시정연설에서 뺄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진행할 것인지를 참모들과 고민했는데, 결국 이를 강행하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이는 청와대가 이번 총격 피살 사건을 ‘단순 사고’로 예단해서 내린 결정일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청와대 핵심참모는 “남북관계의 큰 방향을 강물의 흐름이라고 얘기하면 그 흐름에서 돌출적인 사안도 생길 수 있다”는 말로 이번 사건을 규정했다.

그러나 현재 총격 사건과 관련 우리 측이 알 수 있는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 오직 북쪽이 현대아산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내용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오히려 솔직하게 시정연설에서 총격사건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고, ‘오늘 밝히기로 했던 대북제안을 다음 기회로 미루겠다’고 말하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었을 거라는 아쉬움이다.

촛불정국에서 나타난 청와대의 부실한 위기관리시스템이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