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한국일보 칼럼] 개로왕의 교훈

강산21 2008. 7. 11. 11:59
[한국일보/7월 10일] 개로왕의 교훈




이용중 동국대 법대 교수

황제 폐하는 천명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주십시오. 지금 장수왕은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멸망시킬 수 있는 좋은 시기입니다.”
 

외교ㆍ내치 실패해 비운의 최후

 

472년 백제의 개로왕이 중국 북위(北魏)의 황제에게 보낸 국서(國書)의 일부이다. 개로왕은 당시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따른 안보 위협을 자신의 왕권 강화의 기회로 이용하기 위해 강대국인 북위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개로왕이 보낸 국서의 내용이 결국 장수왕에게 알려졌고, 이를 빌미로 침공한 고구려군에게 도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어 지금의 아차산에서 백제사람으로 고구려에 망명한 장수왕의 부하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개로왕의 죽음은 1차적으로 외교정책의 실패에 기인하였다. 5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싼 고구려와 북위, 남조의 송이 벌이는 국제관계의 복잡한 동학(動學)을 이해하지 못하고 북위에 대해서만 일방적으로 친교를 시도한 것이 직접적인 화근이었다. 장수왕의 등거리 외교 정책과 대조되는 부분이다.

 

안타깝게도 개로왕의 근시안은 1,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명박 정부가 벌이고 있는 대미 편중의 외교에서도 발견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가열되고 자원대국 러시아와 경제대국 일본에 북한까지 가세하는 현실적 지역 정세와 관련 없이 동맹 복원이라는 기치 하에 굳건히 미국만 붙들고 있으면 된다는 논리이다. 동맹은 국력의 크기와 관계없이 당사국 간에 국격(國格)을 상호 존중하는 경우에만 효과를 볼 수 있다.

 

개로왕은 국서에서 자신의 딸을 황제의 후궁으로, 아들을 마부로 보내겠다고 하였다. 자존심을 스스로 버린 국가와 상생의 동맹관계를 맺을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국가원수의 방문 일정을 상대국과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미국의 태도를 비춰 보건대, 쇠고기 문제를 비롯한 이명박 정부의 대미 외교 자세가, 개로왕의 북위에 대한 태도보다 나았으리라고는 짐작할 수 없다.

 

개로왕의 죽음은 두 번째로 국내정치의 실패에서 기인한다. 당시 백제의 지배체제는 주요 씨족의 연합정권 형태였다. 개로왕은 집권 세력 내 계파별 지분을 고려하면 소수파였다. 그런 그가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다른 부족들을 정권의 핵심에서 배제하자 연합권력 구조가 무너지고 백제 내부의 정치적 결속이 급격히 와해되게 되었다. 마치 보수의 적자인 이회창, 박근혜를 배제하고 비주류, 소수파로 외롭게 보수 정권의 간판을 내건 이명박 대통령이 당내 내분과 촛불 민심에 귀를 막고 좌충우돌하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또한 개로왕은 국내외의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화려한 궁궐을 축조하는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자신의 정치력 부재를 가시적인 토목 축조공사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개로왕은 결국 민심을 잃고 왕실의 영도력까지 상실하게 되었다. 청계천 복원에 이어 대운하 건설을 정권의 상징으로 내세우려던 이명박 정부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언제나 역사에서 교훈 얻어야

 

<삼국사기>에 의하면 당시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 병력은 3만 명이었는데, 백제는 7일 만에 수도를 내주고 건국의 기반이었던 한강 유역에서 물러나 공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백제의 국력이 얼마나 쇠약했었나를 증빙하는 사실이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 개로왕은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1,500여 년 전에 있었던 개로왕의 비참한 죽음이 지금의 이명박 정부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