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실용 없는 ‘실용주의’의 행로 / 이종석

강산21 2008. 7. 14. 09:08
[세상읽기] 실용 없는 ‘실용주의’의 행로 / 이종석
세상읽기
한겨레
»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이명박 정부 들어서 한국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말 중 하나인 실용주의가 고생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사고와 실천적 행동을 통해 낡은 구조의 틀을 바꾸는 대변환”을 강조하며 ‘창조적 실용주의’를 새 정부의 행동규범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현 정부가 과연 실용주의 정부인가 하는 의구심이 사회 전반에 퍼져 있다.
 

사전적으로 실용주의는 ‘실제 결과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입장에서 ‘행동을 중시하며, 사고나 관념의 진리성은 실험적인 검증을 통하여 객관적으로 타당성을 얻고자 하는 흐름’이다.

 

현 정부 인사들은 실용주의를 “관념과 이념이 아닌 경험적 실증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 “형식을 걷어내고 실질적으로 잘하자는 것”, “사물을 홑눈이 아닌 겹눈으로 보고, 사물과 사안을 다각적으로 보고 궁리하는 것”,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외교와 남북협력” 등으로 설명한다.

좋은 말들이지만 피상적인 언어들이다. 문제는 체계화이고 실천이다.

 

정권 차원에서 실용주의를 기치로 내세우려면 그에 합당한 체계와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 실용주의를 국정의 각 분야에 어떻게 투사해야 하는지 그 체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아마추어’로 매도했던 참여정부도 외교 전략의 기조가 실용주의였다. 그러나 ‘균형적 실용외교’라 이름 붙여 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체계를 세웠다는 점이 달랐다.

 

참여정부는 ‘균형’을 가치와 국익, 동맹과 다자협력, 세계화와 국가 정체성, 우리와 대상국간의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며, ‘실용외교’를 한반도 평화와 안정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해 정책 결정 및 집행 과정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실용을 하되, 어떤 실용을 할 것인지를 정의한 것이다.

 

6자 회담에서의 주도적 역할도, 유엔 사무총장 배출도, 한-미 관계 현안 해결도 이 기조 위에서 이루어졌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 정책’에는 정작 실용주의가 없다.

비록 체계를 갖추지 못했더라도 그동안 이들이 한 말을 뜯어보면 국민이 이 정부에 기대하는 실용주의의 방향을 짐작할 수 있다.

 

요약하면, 국민은 정부가 논리적으로 설명 가능하고 현실성 있는 정책을 내놓기를 기대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정책 수행을 원한다. 국익 증진을 위해 공언한 대로 좌우 이념을 넘어 국정을 운영하기를 기대한다. 사리사욕이 아니라 공익에 충실하고 법과 제도를 준수하여 예측 가능하고 합리적이며 효율적인 국가를 운영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현실은 대부분 거꾸로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정책은 국민에게 설명할 만큼 준비되지 못했다. 그동안 애써 쌓은 법과 제도, 민주적 관행들이 공공기관에 자기 사람을 심고, 문화기관들을 장악하며, 민주적 비판세력을 무력화시키려는 과정에서 유린되었다.

 

남북관계에서는 지난 정부들이 이룩한 성과를 일방적으로 ‘퍼주기’,‘눈치 보기’로 매도하며 경색국면을 초래했다. 여당 원내대표는 장기간의 촛불시위에도 반미로 나아가지 않은 성숙한 시민의식을 평가하기는커녕, 엉뚱하게 반미로 매도하여 ‘한 건’ 올리려 한다.

이 시대착오적인 행태 속에서 실용주의가 숨을 쉴 틈이 없다. 실용 없는 ‘실용주의’의 빈자리에는 이념과 당파적 이익, 땜질식 임기응변, 좌충우돌이 난무할 뿐이다. 역사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명박 정부가 ‘실용주의 정부’로 불리고 싶으면 이름에 걸맞게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법과 제도를 준수하며, 국민이 납득하는 정책들을 내놓아야 한다.

 

실용주의는 결코 이념의 덫을 놓지 않는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이념 갈등을 조장해서 이익을 보려는 반역사적 퇴행은 ‘반실용주의’ 정권들의 전유물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기사등록 : 2008-07-13 오후 09:1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