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한겨레] 예수 이야기(박기호 신부)

강산21 2008. 7. 6. 17:32
예수 이야기  

참 알 수 없다. 촛불 정국을 해석하는 정부와 누리꾼, 시민들, 그리고 보도하고 논평하는 언론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서로 정반대의 견해를 가질 수 있을까? 영성으로 살아간다는 종교인마저 그러하니 민망스럽다. 진리의 기준은 없는 것인가?
촛불집회 광경을 사진으로 대할 때마다 마음이 산란하다. 사진들은 대부분 현장을 내려다보게 한다. 빌딩숲 속을 가득 수놓은 불빛들을 보는 미학적 느낌도 잠시, 이내 컵초를 들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생각하게 한다. ‘왜인가? 무엇을 원하는가?’ 질문할수록 답답한 덩어리가 가슴에 걸리다가 뜨거운 한숨으로 뿜어진다. 울고 있는가 ….

예수의 이야기를 담은 복음서에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도시를 내려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한탄하셨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그 길을 보지 못하는구나! 네가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수의 눈물이란 삶을 박탈당한 민초들의 슬픔을 의미한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점령 통치로 착취와 고난의 상태에 있었지만, 정치인들은 황제에게 잘 보이려 애썼고,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고, 공안 당국은 항쟁 주모자들을 법정에 세워 극형을 선고했다. 민초들은 언제나 주변으로 내쳐지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힘 있는 누구도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

그때 갈릴레아 출신 젊은 예언자 나사렛 예수가 그들 편에 서게 된다. 예수는 황폐한 민초의 삶 앞에서 본능적으로 자의식에 순종했다. 자의식이란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온 자’라는 것이다. 마침내 성전 한복판에 비장한 얼굴로 나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독자들은 아는가? 장사꾼들의 좌판을 엎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과격 행위였다. 그러나 돈과 좌판 제물용 가축들, 즉 타락한 상업주의를 대상으로 한 행위였지만 공권력은 처형으로 응답했다. 촛불집회가 더러 시설을 파손할 때가 있다. 그런데 경찰은 사람을 방패로 찍고 짓밟는다. 공권력은 항상 그렇다.

그렇게 처형된 예수를 인류는 2천년 역사 내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 존재로 추앙하고 그 삶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스승처럼 사랑과 정의에 목마른 민초들 편에 서자!” 그 본능적인 자의식에 순종함으로 사제직을 살아왔던 가톨릭의 대표적인 행동 그룹이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다.

우리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편들고 부자를 편드는 상업주의 전횡 시대를 국민의 투표로 맞이했다. 군화에 짓밟히고 방패에 찍혀 피 흘리는 누이와 형제들의 아우성이 하늘을 찌른다. 사제단 신부들이 그들을 편들고자 예루살렘 광장 로마 총독 군사의 방패 앞에 나섰다. 그것이 이상한가?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예수를 고발한 죄목은 ‘유대인의 왕을 참칭하고 백성을 선동하고 신성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빨갱이로 몰아 죽인 셈인데 당시도 조·중·동 못지않은 조작 선동이 있었던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고난과 희생뿐 아니라 비난과 질시의 길이기도 하다. 사제는 그렇더라도 민초들의 슬픔에 함께 울며 그들 곁에서 위로와 희망의 기도를 올려줄 때라야 진정한 존재 의미가 있다.

촛불을 들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촛불을 서로 붙여주고 나누며 형제가 되고 가족이 된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정의 있는 사랑’의 현상이다. 정의와 사랑을 갈망하는 이는 모두 빛의 자녀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


- 박기호 신부  (한겨레 / 삶의 창 / 2008. 7.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