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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청장, 컨테이너 치우시오” 했어야죠…김미화의 세상읽기

강산21 2008. 6. 26. 16:24

“어청장, 컨테이너 치우시오” 했어야죠…김미화의 세상읽기

기사입력 2008-06-26 09:25 

친근한 이웃 아주머니처럼 세상 이야기를 전해주는 김미화씨. 세간의 우려를 딛고 그만의 독특한 화법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을 5년째 진행하고 있다. |김세구 선임기자

“제정신이에요?”

5년 전,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이란 본격 시사프로그램 진행자로 발탁되었을 때 김미화는 깜짝 놀라 담당PD에게 이렇게 물었다. 처음엔 “신선하고 파격적”이란 호의적 반응보다 “코미디언에게 본격 시사프로를 맡기는 게 진짜 코미디”란 비아냥이 대세였다.

5년이 지난 지금, 그는 시사프로의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며 초기의 우려나 비아냥을 보란 듯이 불식시켰다. 사람들은 이제 습관처럼 오후 6시면 MBC라디오에 채널을 맞추고 퇴근길에 김미화가 친절하고 편안하게 전해주는 세상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한숨을 쉬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해한다.

현재 80여개의 사회단체에서 다채로운 활동을 해 사회운동가로 불리고, 올 초엔 두 딸의 성을 재혼한 남편의 성으로 바꾸는 등 본인이 시사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김미화. 전국민이 시사전문가인 요즘, 시사프로 진행자 5년차인 그가 바라보는 요즘 세상과 주부로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사프로 5년은 대학원 박사과정

-5년 동안 시사프로를 진행하면서 달라진 가장 큰 변화는 뭔가요.

“프로그램을 할수록 노련해지거나 배포가 커지는 게 아니라 더 조심스러워집니다. 전엔 뭘 몰라서 자꾸 물어보던 것도 같은 사안을 자주 다루다보니 양측의 입장을 알게 되어 더욱 조심하게 되더군요. 화물연대 파업이건, 미국쇠고기협상이건 상반된 입장을 계속해서 듣다보면 ‘저 사람도 가장인데…’ ‘상황이 이렇게 꼬였는데…’ 등 이해가 되어서 일방적으로 원망을 하거나 잘못을 다그치듯 지적하기가 어렵더군요. 그래도 발전한 게 있다면 정치인들이 애매하게 답변하거나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 때 중심을 잡을 수 있는 힘은 생겼다는 겁니다.”

-프로그램 특성상 논란이 되는 내용들을 다루다보면 아무리 중립을 지키려 해도 편파성 시비에 휩쓸릴 때가 많을텐데요. 형평성이랄까, 균형감각을 잡기가 힘들지 않나요.

“가능하면 양쪽의 이야기를 같은 비중으로 들려 드리고 판단은 청취자들에게 맡기려 하지만 쉽지 않아요. 특히 정치의 경우 야당은 어떻게든 나와서 주장이나 변명을 하려고 하는데 여당은 비난받을 만한 민감한 사안엔 안 나오려 하죠. 그러다보니 민주당, 민노당 등이 자주 등장할 수밖에 없어 몇몇 단체에서 전체 내용이 아니라 연결 건수만으로 판단해 색깔 논쟁이나 편파방송 시비를 걸기도 했습니다. 오해를 받더라도 ‘이런저런 점은 억울하다’며 정확한 설명을 해주면 국민과 소통이 될텐데 무조건 입다무니 저도 답답하죠. ‘모 당의 관계자를 수십차례 전화걸어 섭외했으나 응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싶을 때가 많아요.”

-코미디언의 시사프로 진행에 편견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코미디언이라 유리한 점도 있겠죠.

“그럼요.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평소에 텔레비전에서 자주 본 코미디언이니까 출연자들이 정말 편안하게, 하소연하듯 말해줘서 더 진솔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어요. 제가 앵커처럼 딱딱한 어법이 아니라 ‘아이고, 그러셨군요’ ‘저런, 그게 그런거군요’라고 말하니까 아주 편해지셔서 이해찬 전 총리의 경우에는 생방송인 걸 잊은 듯 끝무렵에 ‘어, 그래그래. 수고해요’라고 비서에게 하듯 아주 정겹게(?) 인사를 해서 제가 당혹스러웠습니다. 전에 주민들과 갈등을 빚는 지역의 시의원이 자꾸만 주민들의 이기적인 태도를 ‘냄비현상’이라고 해요. 그분이 ‘냄비’라고 할 때마다 제가 계속 ‘님비’라고 끼어들어 지적해도 청취자들이 그 상황을 웃으며 들어주는 건 제가 코미디언인 덕분이죠.”

-생방송을 하다보면 돌발상황도 많을텐데요.

“언젠가 한 사안에 대해 반대입장이라는 전문가를 전화로 연결해서 ‘왜 반대하시는 거죠’라고 물으니까 ‘아뇨, 전 반대 안 했는데요’라고 답해 당황했어요. 그렇다고 ‘왜 반대 안 하시는 거죠’라고 따질 수도 없고 다른 프로그램처럼 음악을 틀면서 쉬어갈 수도 없어 ‘음, 그렇군요. 그럼 선생님 견해는…’하며 이어가긴 했는데 이담에 코미디 소재로 한 번 써볼까 해요. 또 섭외당시엔 아주 강경한 입장을 보이던 분이 너무 강성으로 보일까 걱정됐는지 정작 방송에선 입장을 바꾼 적도 있고요. 또 전여옥 의원처럼 어조가 강한 이들이 자기입장을 설명하다 흥분해서 ‘(진행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한번 말씀해보세요’라고 대여섯번을 다그쳐 물을 땐 동조나 반대가 아니라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래도 제일 괴로운 상대는 ‘말이 짧은’ 사람입니다. 뭘 물어도 ‘네’ ‘아뇨’ ‘글쎄요’ 등 단답형으로 말하고 분위기를 띄워보려는 우스개에도 썰렁한 반응을 보이면 울고 싶어져요.”

-시사프로 진행자로서 제일 아쉬운 점은 뭔가요.

MBC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세계 그리고 우리는’을 진행하고 있는 김미화씨. 그는 살아온 동안 지금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하단다. |김세구 선임기자

“칭찬받아 마땅한 분들, 착한 일을 한 분들이 방송에 안 나오려고 할 때죠. 돈을 기부하거나 선행을 하면서도 알려지는 걸 극히 꺼려서 아무리 출연해달라고 설득해도 극구 사양해요. 저는 제가 솔선수범한 좋은 일을 널리 알려 더 많은 이들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켜 동참하게 하는 게 옳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뒤에서만 선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신념이 바뀌기도 하고 제 자신이 성숙해지는 걸 느낍니다.”

-솔직히 라디오프로그램은 ‘돈’이 안 되잖아요. 게다가 시간대도 오후 6~8시여서 각종 행사나 공연으로 목돈을 벌 기회도, 텔레비전의 좋은 프로그램 출연도 놓칠텐데 왜 이 프로를 고집하는지 궁금합니다. 어떤 이들은 시사전문가로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라고도 하고 정치를 하기 위한 포석이라고도 하더군요.

“제가 이 프로를 시작할 때 늦깎이 대학 3학년이라 공부 재미가 한창이었어요. 당시 담당이었던 정찬형 본부장이 ‘시사프로그램 2년하면 대학원 박사과정에 값하는 내공이 생긴다’고 하셔서 그 대목에 넘어간 것 같아요. 공부 좋아하는 사람한테 한국의 시사프로그램만한 학교가 없어요. 오늘 뭐 하나 알아두면 내일 또 다른 분야에서 일이 터지니까요. 시사문제들은 복잡미묘한 사안이 대부분이고 전문용어를 모르면 ‘코미디언이라 역시 무식하다, 공부 좀 하라’는 비난도 여전합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시사프로는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어요. 잘 모르던 사안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나 다양한 설명과 의견을 들으면서 ‘아, 이게 그런 거로구나’ ‘그 문제를 이런 시각으로도 볼 수 있구나’라고 세상을 알아가며 저도 성장하는 걸 느낍니다. 또 전에도 방송에만 주력해서 수입이 크게 줄어들지도 않았어요.”

“내 역할은 사람들 즐겁게 해주는 것, 정치 안 합니다”

솔직함이 자산

-이 프로는 ‘153㎝ 김미화의 낮은 눈높이에 맞춘 쉽고 재미있는 시사프로’로 출발했죠. 특히 우리가 잘 모르면서도 차마 물어보기 힘든 내용이나 용어들을 ‘그게 무슨 말이죠’라고 물어보는 김미화씨 특유의 진행법이 서민층에게 사랑을 받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5년이나 진행했으면 정보도 축적되고 발전했을텐데 왜 만날 모른다고 하냐란 지적도 합니다. 아직도 잘 몰라서인가요, 혹은 프로를 위한 설정인가요.

“아직도 어려운 전문용어는 생소하고 입에 탁탁 안 붙어요. 쇠고기협상이나 노조파업처럼 지속되는 사안들은 어제 방송에서도 그 주제를 다뤄서 전 알지만 좀더 진전되었어도 오늘 처음 듣는 청취자, 정말 모르는 청취자들을 위해 그냥 넘어가지 않고 ‘다시 쉽게 설명해주시죠’라고 말하죠. 전 그게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라고 생각해요. 시사프로 진행자는 자신의 유식함이나 전문성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청취자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임무잖아요. 또 가능한한 중립을 지키고 자기의견을 숨겨야죠. 하지만 전 사건소식을 전달하는 앵커가 아니니까 가슴 아픈 일, 고약한 사건에는 한숨도 쉬고, 가슴아픈 걸 숨기지 않고 청취자들과 같은 마음을 나눕니다.”

-전에 ‘TV 책을 말하다’의 MC를 맡았을 때 존경스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방송에 다룰 책 서너권을 정말 다 읽어오시더군요. 작가가 요약해준 메모나 대본만 보고도 얼마든지 진행이 가능한데요. 시사프로를 위해선 얼마나 노력을 합니까.

“뭘 맡으면 최선을 다하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에요. 독서 프로그램 하면서 간이 나빠졌어요. 밤늦도록 일하고 다시 새벽까지 책을 봐야 했거든요. 흥미있는 분야 책은 빨리 읽히는데 때로는 난해한 기호학이나 우주의 탄생에 관한 책도 읽어야 하니 머리에 쥐가 났어요. 그래도 읽어보고 가는 것과 안 읽고 가는 건 달라요. 시사프로를 맡으면서는 우선 신문을 많이 읽어요. 방송 2시간 전에 와서 작가들이 정리해준 오늘의 주제 관련 자료도 보고, 신문을 정독하며 시사정보나 특정 사안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공부합니다.”

-어떤 분이 아침에 방송되는 ‘손석희의 시선집중’을 들으면 정파를 막론한 공평한 쌀쌀맞음이 특기인 ‘시사(時事)의 신’ 앞에 뉴스들이 줄을 서서 품평을 받는 광경이 떠오른다고 해요. 반면에 ‘김미화의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은 하루치의 노동과 실망을 감당하느라 피곤해진 해질녘의 귀에 살갑게 달라붙는다고 비교하더군요. 원래 성격도 부드럽고 누구에게나 친화력을 발휘하나요.

“제 휴대폰에 오는 문자는 대부분 ‘누님’ ‘언니’로 시작돼요. 저를 편하게 느낀다는 거죠. 제가 진행하는 프로는 훌륭한 사람이 사회 이모저모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옆에 앉아서 고자질해주는 느낌이래요. 시사프로 진행자는 제대로 답변을 하지 않는 손님에게 강압적으로 다그치기도 해야겠지만 성격 자체가 남을 호되게 밀어붙이지 못해요. 말랑말랑하게 해도 끌어낼 이야기는 다 끌어내거든요.”

-그럼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말랑말랑하게’ 이야기를 전한다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가요.

“전 촛불집회를 보면서 놀랍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촛불집회는 전 국민이 참여한 겁니다. 직접 현장에 나가 촛불을 들지 않았더라도 인터넷 중계를 보거나 자판 두드려 댓글을 달면서 동참한 거죠. 젊은이들이 참여해 축제처럼 즐겁게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했는데 전 ‘슬픈 축제’란 생각이 들었어요. 이처럼 자신들의 주장을 비폭력적으로 표현하고 해결하는 방법에 익숙해지는 문화가 성숙되면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매번 사안이 안 풀릴 때마다 촛불로 해결하려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도 들고요. 얼마나 민심이 전달 안 되면 초등학생까지 나와서 촛불을 드나 안쓰럽기도 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경우 결정적 찬스를 놓쳤다고 봐요. ‘명박산성’이라고 불린 컨테이너가 가로막았을 때 세종로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나와서 ‘어청수 청장, 이런 거 치우시요’라고 지시를 해야 했어요. 그 다음에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젠 저를 믿고 따라와주세요’라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소통은 그냥 서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아니라 진실을 나누는 거예요. 서로 믿어주는 게 소통이죠. 그러려면 평소 꾸준한 자기관리가 필요합니다. 신뢰감을 쌓아왔던 사람의 말은 들어도 거짓말을 일삼던 이들이 진심이라고 해도 안 믿게 되거든요. 대통령도 신뢰회복이 우선 과제 같아요.”

-칭찬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하는 방송연예계에서, 더구나 이혼에 재혼까지 한 중년아줌마가 시사프로 진행자로서 좋은 이미지를 유지하는 비결은 뭔가요.

“프로그램에서도 사생활에서도 솔직해서가 아닐까요. 프로그램에서도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또 사생활에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감추지 않고 말했어요. 전남편의 폭력으로 이혼을 결심했을 때 정말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도 숨기지 않고 기자, 프로듀서들에게 다 말하고 상의도 했어요. 기자들이 연일 제 이혼을 대서특필하는 와중에 PD들이 저를 하차시키지 않고 외려 새 일거리들을 줘서 정말 감사해요.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의 PD는 저를 어쩔 거냐는 기자들 질문에 ‘사생활은 사생활이고 일은 일인데 김미화씨 일 잘하고 있다. 아무 계획없다’고 대답해줘서 저를 편견에서 꺼내줬어요. 우리 사회에는 ‘이혼한 여자가 뭐 할 말이 있어 방송에 나오느냐’고 말하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고 저 역시 그게 무서워서, 내 일을 모두 잃고 나락으로 떨어져 아이들한테 불행한 엄마의 모습을 보일까봐 오랫동안 이혼을 망설였거든요. 그냥 있는 대로 솔직하게 제 진심을 전하면 사람들도 절 품어주더군요.”

엄마의 마음으로 시민운동을 한다

-현재 참여하고 있는 사회단체가 80여개라면서요. 2년 전에 50개라더니 그 사이에 또 늘었군요. 얼마전에도 용인집으로 가는 길에 만남의 광장까지 갔다가 보고싶다는 지인의 전화에 다시 방배동으로 돌아와 얼굴보여주고 가는 장면을 봤습니다. 일이건 인간관계건 지나치게 성실한 것 아닌가요.

“좀 그런 면이 있죠. 일중독이기도 하고 저를 찾고 반겨주는 이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제가 좀 피곤하더라도 참여하자고 생각해요. 홍보대사도 그냥 이름만 걸어두는 게 아니라 중요한 행사엔 꼭 참여해서 그것만 나가도 한 달 스케줄이 벅차요. 돈을 받는 게 아니라 기금도 내니 아이고, 힘들죠. 얼마전엔 녹색연합에서 태안에서 아이들에게 환경교육시키는 행사를 하는데 사전회의에, 발대식에, 태안 현장 학습에 세 번이나 불러요. 제발 한 번만 불러달라고 부탁했죠. 친구들의 부탁도 되도록 들어주려 하죠. 이담에 늙어서 어딜 가건 외롭지 않고 떳떳하려면 건강할 때 착한 일을 많이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원만한 성격에다 세상 어떤 일이건 다 포용할 것 같은데 다소 도발적인 1인시위를 자주 하는 이유는 뭔가요.

“제가 대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연예인이기 이전에 엄마여서 그런 용기가 생기나봐요. 효순이 미선이 사건 때는 장갑차를 운전한 미군에 대한 분노보다는 불공평한 소파 규정을 고쳐야 다시는 우리 딸들이 죽음을 당하고도 배상도 못받는 억울함은 없겠다는 생각에 나섰고요. 이라크파병 반대 1인시위는 제가 아프간에 봉사활동을 갔을 때 전쟁터에서 눈, 다리를 잃은 아이들의 처참한 모습을 봤기 때문에 또 나선 겁니다. 이 세상에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겠다는 생각에 우리 청년들이 명분도 없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것에 반대한 거죠. 아이를 기르는 엄마로서 제 딸이나 아들이 전쟁, 불평등, 굶주림, 불량식품, 성폭행 등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제 생각을 표현했는데 파장과 오해가 너무 컸어요.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노사모’로 규정하고 선거철에 자리를 노리는 정치하는 연예인으로 기사를 써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 동아일보로부터 사과와 정정보도를 받아냈습니다. 정말 정치 안 한다고 10여년을 노래불렀는데도 어쩜그렇게 계속 되풀이하는지 몰라요. 전 사람들을 행복하게 웃게 해주고 싶은데 정치하면 어이없어 웃게 만들텐데 왜 정치를 해요.”

-이젠 대학교수와 재혼해 두 딸에게 새 남편의 성도 얻게 하고 새로 남매도 생겨 4남매의 엄마가 됐군요. 집도 시골로 이사가서인지 얼굴이 아주 평화로워 보입니다.

“요즘 태어나 처음 ‘아, 내가 정말 행복하구나’라고 느껴요. 제가 지나온 삶이 참 슬펐거든요. 아홉살 때 폐병 앓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애들에게 놀림도 받고, 행상하는 엄마를 도와 안 해본 장사가 없어요. 여상 졸업하자마자 코미디언 시험에 합격해 ‘순악질 여사’ 등으로 인기를 누렸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애를 5개월째에 유산했고…. 전 남편과의 이혼도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젠 일과 가정에서 모두 안정을 찾았어요. 지난달까지만해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생방송이 있어 피곤했는데 다행히 SBS 낮프로가 폐지되어 모처럼 여유를 찾았죠. 남편과 아침밥도 먹고, 마당에 있는 꽃도 가꾸고 동네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고생끝에 찾아온 행복이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제 성격이 워낙 낙천적인가 봐요. 아버지가 병상에 누워계실 때도 어른들 앞에서 이미자씨 노래 흉내내고 1원씩, 5원씩 받아 군것질하는 재미에 나돌아다녔어요. 수유리 천지촌 부근 반지하방에 살았는데 엄마는 보따리 옷장사로 시골을 다니다 보름, 한달 만에 집에 돌아오시니 제가 아버지 수발을 들어야 했는데도 콧노래 부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까요.”

-가장 성공한 여성 가운데 하나인데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돈을 더 많이 벌겠다거나 무슨 업적을 이루고 싶은 것은 없어요. 제가 지독히 고생한 경험도 있고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고 지금도 사회단체 일을 하니까 이 다음에도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요. 늙어서도 주책바가지 할머니 역할로 코미디 무대에 서고 싶고, 코미디 학교를 만들고 싶기도 하고…. 코미디를 하건, 시사프로를 하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요. 파파할머니가 되어서도요.”

김미화는 누구인가?

순악질 여사에서 ‘개콘’ 기획까지… 영원한 코미디언

1964년생. 여상 졸업후 관광버스회사에서 일하다 개그맨 시험에 합격했다. 셋방에 살면서도 전혀 집주인이나 남편에게 기죽지 않는 순악질여사, 스타 아니라 스타 할아버지도 화장실은 간다는 사실에 착안해 대중의 호기심을 대신 풀어주던 방송사 미화원 삼순이아줌마 등 서민적 캐릭터로 웃음과 위로를 주었다. ‘개그콘서트’도 김미화씨가 기획해 탄생한 것.

방송활동만이 아니라 사회봉사에도 헌신적이다. 참여연대, 녹색연합, 여성단체연합 등 80여개의 시민사회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2003년 촛불시위 때 연예인 129명의 지지성명을 받아내고 문화예술인집회를 따로 조직해 사회활동가로 자리잡았고 호주제폐지운동에 앞장섰을 때는 자신이 생부의 성이 아니라 사실혼관계에 있던 생모의 성을 땄음을 고백해 반향을 일으켰다. 15년여 전, KBS ‘100세 퀴즈쇼’란 프로에서 독거노인, 고아와 일반후견인 100쌍을 연결하는 특집을 제작했는데 그후 한결같이 짝을 맺은 노인·고아와 관계를 유지한 사람은 김씨뿐이라는 것이 당시 PD였던 홍창순씨의 증언.

2003년부터 본격시사프로그램의 진행자로 활약하며 정계진출 등의 의혹도 받지만 김미화씨의 꿈은 영원한 코미디언이다. 그가 미리 작성한 묘비명도 ‘웃다가 자빠졌네’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