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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경찰서 밀실, 한 해직기자 부인이 겪은 지옥 / 시인 조영화

강산21 2008. 6. 13. 15:17

[특별기고] 1980년 경찰서 밀실, 한 해직기자 부인이 겪은 지옥 / 시인 조영화 한겨레21 90호 1995년 12월 28일

 

"이 년은 아주 독종이야. 살살 다뤄서는 안 돼!"

1980년 10월9일 아침 7시께 일찍 방송국에 원고를 건네주고 오던 집 앞길에서 나는 정체불명의 남자 두명에 의해 강제로 검은 승용차에 태워졌다.

 

"이 년아, 서방 있는 곳을 대!" 얼마를 지났을까. 나를 붙잡고 내려가는 것을 보니, 계단을 지나 지하실로 가는 것임이 분명했다. 눈가리개를 풀자마자 한 사람은 지하실 방을 떠나고 남아 있던 한 사람이 내 가방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손수건을 꺼내 냄새까지 맡아보았다.

 

가방을 다 뒤진 뒤 내게 안경을 벗으라고 했다. 그는 자기 스스로 화를 돋우어야겠다고 결심했는지, "이 년이 누굴 노려 봐!"하면서 귀싸대기와 머리통을 계속 때렸다. "이 년아, 서방 있는 곳을 대!" 그들이 "서방"이라고 부른 나의 남편 정연주(현재 워싱턴특파원)는 해직기자로 유신 때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들어가 서울구치소, 성동구치소에서 복역하던 중 박정희가 죽은 뒤 12월 초 어느 날 출소했다.


출소한 뒤 그는 잃은 건강을 되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며 그런 가운데 "서울의 봄"이라고 했던 80년 봄, 몇몇 대학의 요청 에 의해 "70년대의 한국언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 그 정도의 활동만 했기에 5월17일 자정에 스무명도 넘는 계엄사 요원들이 아파트 주위를 포위한 뒤 집안으로 쳐들어와 두 시간이나 집 구석구석을 뒤질 때에도 왜 이토록 남편을 체포하려 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 밤 이후 매일 두 사람씩 찾아와 남편에 대한 온갖 것을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 방방곡곡에 남편을 포함한 "잡히지 않은 국기문란자들"에 대한 현상문이 붙기 시작했다. 남편 얼굴 사진 아래에는 "국기문란자, 체포하면 2백만원 상금, 일계급 특진, 특징은 미남형"이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저 놈들이 정 서방을 유난히 지독하게 찾는 걸로 봐서 어디 엮는데 필요한 게 틀림없어"라던 홍근 오빠(오홍근 현 판매이사, 당시 동양방송 기자)의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파리채로 내 얼굴을 때린다. 이번에는 내가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나는 의자와 함께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걷어 올려진 치마자락을 손으로 끌어내리며 의자에 앉으면 그는 다시 의자를 걷어찼다.

 

"야 이 년아, 니 년이 애새끼를 둘이나 낳아 남자맛을 알 텐데, 니가 서방을 만나지 않고 있다면 너 딴놈하고 붙었지?" 그가 욕을 할 때마다 그 욕지거리를 듣지 않으려고, 그리고 그가 때릴 때마다 나 자신이 무너질까봐 나는 마음속으로 "주기도문"을 외웠다. 주술 들린 사람처럼 주기도문을 한없이 한없이 되풀이했다. 그런데 그가 조금 전에 뱉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전신의 세포가 분해되고 있는 듯했다. 나 자신에 대한 자존심 하나로 여기까지 버티어 왔는데,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꼿꼿한 등뼈 마디마디의 석회가 다 용해되어 꾸깃꾸깃 한 웅큼도 안 되는 휴지조각이 다 되어버린 내 이 꼴, 여기에 인격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의 유혹. 그러나 죽을 수 없었다 "죽자." 나는 혀를 깨물었다. 그 순간 나는 왼쪽 벽 위와 천장 사이에 난 조그만 구멍을 쳐다보았다. 그 구멍 사이로 푸른 하늘이 한뼘 가량 보였으며 그 위로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들 모습이 또렷하게 겹쳐졌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살 용기를 내 봐." 그런 목소리가 환청으로 다가왔다.

 

"이거 먹으라구. 우리 먹으면서 하자고.." 두들겨 패고 의자를 걷어차고 하던 그의 달라진 말투였다. 점심은 짜장면이었다. 입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잘도 먹었다. 사람 때리는 일과 먹는 일이 그에게는 분명히 다른 일이었다. "그 물주전자와 고춧가루는 놓고 가." 배달소년에게 그가 명령조로 말했다.

나는 이 곳으로 끌려오면서 아니 남편이 그렇게 늘 잡혀가는 생활을 한 뒤로는 물고문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있었던 목요기도회에서 나는 고문당한 사람들의 얘기를 수없이 들었으며 코로 물을 붓는 물고문은 기본적인 고문으로 여겼던 것이다. 공포- 그것은 당하기 직전에는 공포이지만 일단 그 지점을 통과하면 이미 공포가 아니다. 나는 두렵지 않았다. 혀 깨물고 죽으나, 고춧가루 물고문을 받아서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에도 끊임없이 애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물주전자 뚜껑을 열고서는 고춧가루를 부어 넣고는 다시 뚜껑을 닫았다.

 

"태어나서 기억이 있는 순간부터 오늘 이 시간까지 일어난 일에 대해 하나도 빼지 말고 다 써!" 그 지하실에서 나는 일주일 동안 얼마나 많은 자술서를 쓰고 또 썼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항상 한점으로 모였다. 남편 있는 곳이 어디냐. 나는 사실 남편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5월16일 밤, 수유리 가톨릭피정센터에서 동아투위원들과 함께 밤새워 "새시대 새언론"에 대해 토론하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남편은 천행으로 난을 피했다. 다음날 남편이 전화를 했다. "대답만 해. 집에 누가 다녀갔지?" "네." "당분간 집에 연락할 수가 없으니 그렇게 알아. 몸조심 하고." 그는 그렇게 자기 얘기만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뒤 그의 소식은 내가 스크립터로 일하던 한국방송공사 제2FM 라디오(통폐합 전에는 TBC FM 라디오)의 조승환 부장을 통해 몰래 들었다. 남편은 조승환 부장에게 가끔 전화를 걸어 나의 안부를 묻고 그의 안부를 전하곤 했다. 그는 "조만열"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조승환 부장과 이런 선문답을 했다고 나중에 들었다. "형님, 저 만열입니다. 형수님 건강은 어떠세요?" "자네 형수 감기 기운이 좀 있어. 자네는 어떤가?" "저는 괜찮아요." 형수님은 '나'였으며, 감기 기운이 있다는 말은 "상당히 시달리고 있다"는 감추어진 말이었다. 내가 잡혀갔을 때는 "형수, 독감이 걸렸다"고 했다던가? "당신들은 간접살인자들이다" 조승환 부장은 내 곁을 슬쩍 지나치면서 "만열이 요즘 건강하대" 그런 말들을 전해주곤 했다. 그 엄혹하던 시절, 그는 그렇게 우리 둘 사이에서 다리 노릇을 해 주었다. 들통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해거름이 되니 아이들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새벽 1시쯤 되니 여지껏 나를 취조하던 사람과 아까 밖으로 나간 사람이 교대를 했다. 그는 때리 는 당번은 아닌 모양이었다. 밤새도록 자술서를 쓰게 했다. 첫날은 잠이 쏟아지는데도 아예 잠을 자지 못하게 했다. 쓰고 또 쓰라는 것이었다. 꽃뱀에게 놀라 멍석에다 오줌 싼 어릴 때 얘기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얘 기를 다 쓰고 나면 그것을 죄다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나서는 꽃뱀에게 놀란 얘기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다. 사흘 밤낮을 그렇게 보냈다.

 

"당신들 때문에 집에도 못 들어가고 이거 뭐야?"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여지껏의 깡마른 남자 대신 뚱뚱한 사람이 앞에 앉아 있었다. "약국에 좀 가야 돼요." "어디 아파? 내가 약을 사다 주지." "아니 여자들이 가야 되는.." 바로 일주일 전에 끝났던 생리가 다시 시작됐다. 15년 동안 한번도 불규칙하지 않았는데, 신의 섭리였을까? "우리 과장이 알면 나 모가진데.."


약국으로 걸어가면서 나는 그에게 간청을 했다. 방송원고로 우리 식구 밥먹고 사는 데 며칠 동안 펑크를 냈으니 제발 담당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하게 해달라고. 그는 선선히 응해주었다. 그 당시 내가 맡고 있었던 프로의 김정태 프로듀서는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면서 방송 국 일은 걱정하지 말고 부디 몸조심하라고 했다. 나는 시부모님께 연락해달라고 부탁했다(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시아버지께서는 강남경찰서에 며느리 실종 신고를 했다는 것이었다. 일흔살의 시아버님도 그 뒤 몇주일 지나 경찰에 잡혀가 열흘 동안이나 시달리면서 아들이 있는 곳을 대라는 닥달을 받으셨다).

 

다음날 작은 체구의 또다른 형사가 들어왔다. "당신 천주교 신자야? 나도 군대 가기 전에는 열심히 한 신자였는데. 정말 남편 있는 곳 몰라?" 묵주를 쥐고 있는 내게 그가 물었다. "천주교 신자였다면 천주대맹세가 어떤 뜻인지 아시겠네요. 대맹세예요. 저는 정말 애들 아빠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그가 몇번을 위층 사무실로 오르락내리락 하더니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갔다. 강남 경찰서 정보과장실이었다. 정보과장은 내게 종이 한장을 내놓더니 여지껏 있었던 일을 밖에 나가서 일절 입밖에 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단번에 완강히 거절했다. 여기서 겪은 모든 사실을 세계인권위원회에 보고하겠다고 대들었다. 그리고는 어린 애기와 어미를 며칠씩이나 떼어놓았으니 당신네들은 간접 살인자들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대들었다. 한 시간 넘게 그렇게 버티었다. 정보과장이 들락날락 하더니 나에게 가라고 했다. 나는 못 간다고 했다. 당신네들이 나를 잡았던 바로 그 장소까지 태워줘야 한다고 버티었다. 사실 나는 현기증이 나 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얼마 뒤 한 형사가 따라 오라 고 하더니 택시를 잡아주며 기사에게 택시비를 건네주었다. 그 어려울 때도 힘을 준 사람들 아파트 앞에서 내려 비틀거리며 겨우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만치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부부가 손짓을 했다. 그들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그만 쓰러졌다(큰시누님 부부였다는 것을 안 것은 나중의 일이다).

 

"아이고, 니가 시집 잘못 와서 이 고생하는구나." 눈을 떠보니 시어머니가 방바닥을 치시면서 통곡하고 계셨다. 시부모님은 그로부터 몇달 뒤 미국에 있는 큰아들 곁으로 떠났다. 공항까지 형사들이 나와 정연주가 나타날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시부모님은 끝내 당신의 막내아들을 다시 보시지 못한 채 휴스턴에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5.17은 우리 가족의 삶을 이렇게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81년 2월 계엄령이 해제된 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얼마 뒤 잡혀가 한달 이상 조사를 받았다. 그때서야 전두환이 왜 그토록 남편을 찾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괴수 김대중으로부터 현금 50만원을 받아 경상북도 도민을 봉기시켜 정권을 탈취코자.." 12.12와 5.17, 5.18로 이어지는 전두환의 정권탈취극에는 이처럼 터무니없는 온갖 조작과 폭력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그 조작과 폭력의 주인공들에 대해 당시 언론들은 이렇게 격찬했다. "역사의 혼이 키워낸 신념과 의지의 행동인 전두환" "우국충정의 30년-새시대의 기수 전두환 장군" 이라고..

 

끝으로 이 자리를 빌려 어려웠던 시절,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고 정신적 물질적으로 우리 가족을 성심껏 보살펴준 조순 서울시장,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 정일용 외국어대 교수, 황한식 부산대 교수, 이영선 연세대 교수, 정운찬 서울대 교수, 박기봉 비봉출판사 대표, 김상남 서울시 의원, 박중희 사장, 성유보, 이부영, 임채정, 김명걸, 권근술 선배, 고은 시 인, 문정현 신부, 최태동 박복희 부부, 향린교회 관계자들, 재경 전주여고 37회 동기생들의 이름을 15년 만에 처음 공개하는 것으로 그동안 입은 은혜의 일부분이라도 갚고 싶다.

 

누가 나를 애국자로 만드는가.. 라고 묻는다면
정권의 개들과 매국노들과 그들과 싸워 이기려 하는 분들, 선한 국민들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