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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다방·광대·미화원…그들의 배후는 '촛불'뿐

강산21 2008. 6. 11. 13:06

촛불다방·광대·미화원…그들의 배후는 '촛불'뿐

기사입력 2008-06-11 07:46 


집회 현장서 커피 나눠주고 쓰레기 분리수거 앞장 '촛불천사'

[CBS사회부 조은정 기자] 그들의 배후를 의심했다. '어느 단체에서 나왔을까?'

6.10 민주항쟁 21주년을 기념해 10일 저녁에 열린 사상 최대 규모의 촛불집회에서 다짜고짜 소속 단체가 어디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한결같이 쿨하게 답하는 그들.

"그냥 혼자 왔는데요" 배후부터 의심하는 좁은 마음을 갖기에 광장은 너무 넓었다.

먼저 마주친 것은 '촛불 광대'들. 삐에로 복장을 하고 긴 가짜다리를 끼운 채 휘청휘청 광장을 거니는 광대들을 보고 엄마 아빠와 함께 나온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났다.

연신 터지는 카메라 세례에 익살맞은 표정까지 지어가며 포즈를 취해주는 엄정민(20)씨와 김기남(17)씨는 한 이벤트 회사 직원들이다.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주는 사람들인 것이다.

10일 저녁은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날이기에 이들은 사장 허락을 받고 광대 복장을 하고 광장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좋아 힘든 줄도 모르겠다"는 촛불광대들 때문에 광장은 한층 더 즐거운 공간이 됐다.

또 한쪽에서는 '촛불 다방'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소형 승합차에 커피와 녹차를 가득 싣고 나온 촛불다방의 사장님은 이정우(29)씨. 맛은 일품이지만 공짜다.

평범한 광고회사 직원인 그는 지난 1일 새벽 촛불집회에서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추위에 떨다 옆자리 아주머니가 건내 준 따뜻한 라면국물을 마시고는 원기를 회복했다. 그때 그 따뜻한 국물을 잊지 못해 촛불집회가 있는 날이면 무작정 승합차에 커피를 싣고 나와 촛불다방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이 다섯 번째 개점일. 보통 하룻밤에 3000여잔 정도 만들어내니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아직까지는 즐겁기만 하다. 일단 재료들을 들고 오기만 하면 주변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타기도 한다. 커피를 마신 사람이 고마운 마음에 다른 사람에게 커피를 타주는 것이다.

"오늘은 5000여잔 정도를 준비해왔는데 모자랄 것 같아 재료를 더 사와야겠다"며 웃는 그는 광장이 있어 행복한 촛불 천사다.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즐기는 사이, 구석 후미진 곳에서는 쓰레기 분리수거가 한창이다. 어느 단체에서 오셨냐는 질문에 "배후세력은 없다"고 웃으며 구슬땀을 닦는 세 사람이 있었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면서 쓰레기는 여러번 주워봤지만 분리수거는 처음이라는 박명희(32)씨. 한 시민이 분리수거를 시작해서 그냥 같이 하게 됐다고 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막자는 것도 다음 세대를 위한 것이잖아요. 분리수거도 다음 세대를 위해서 하는 거에요."

명희씨를 보고 있던 박승용(36)씨도 팔을 걷어붙였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이 모여 분리수거팀이 가동되기 시작한지 수 시간째. 어느새 종이와 캔류, 촛불들이 나뉘어 쌓여간다.

"이거 버리시는 거면 가져가서 사용해도 되나요?" 지나가던 시민들은 분리된 촛불과 종이컵을 재활용해 다시 사용하기도 한다. 다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한번 잡은 일이기에 마무리 될 때까지는 남을 예정이다.

그들의 배후세력은 바로 '촛불'이었다. 스스로를 희생해 빛을 만들어내는 촛불처럼 각자의 위치에서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시켜서, 누가 지켜봐서가 아니라 그저 기쁜 마음에 스스로 나와 구슬땀을 흘리는 촛불천사들. 그들이 있어 이날의 광장은 더욱 빛났다.

aori@c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