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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힐과 유모차와 교복과 넥타이와 헌법 제1조

강산21 2008. 6. 7. 13:11

하이힐과 유모차와 교복과 넥타이와 헌법 제1조

기사입력 2008-06-06 18:06 기사원문보기


[한겨레] 중소기업 회사원인 조연숙씨가 광장에서 아무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과정, 민주주의의 새날

▣ 글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표지이야기 1부-타오르는 촛불]

5월29일 저녁 7시, 옅은 어둠이 감싸안은 서울 청계광장.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인 소라 조형물 앞에 꽃무늬 빨간 미니원피스를 입고 8cm 하이힐을 신은 조연숙(30)씨가 함께 촛불문화제에 동참할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두 온라인 여성직장인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조씨의 원피스는 촛불집회에 내걸린 선명하고 간결한 깃발 같다. 그의 이야기에는 절박함과 화려함, 가벼움과 무거움이 섞여든, 22번에 걸친 촛불 저항의 복잡다단한 내면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조연숙씨가 말한다. 편집자

서로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는데…

‘mb꺼져! 미소가 아름다운 사람들 모여라’. 이 손팻말은 근무시간에 살짝 출력한 것이다. 나는 10월에 결혼을 앞둔 평범한 싱글 여성이다. 중소기업 회사원이다. 요즘 결혼을 앞두고 마사지권을 끊어서 한창 마사지를 받는데, 이번주 내내 마사지도 포기하고 거리로 나왔다. 지난 5월2일 처음 집회에 참석한 뒤 오늘로 15번째 거리로 나왔다. 집과 직장이 모두 경기 분당이지만, 하루라도 집회에 빠지긴 싫었다.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내 식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 때문에 너무 피곤하거나, 남자친구랑 결혼에 대해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할 때만 빠졌다. 지난 주말에 시위대가 강제 연행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 화가 나서, 이번주는 ‘전출’이다.

오늘은 아침부터 다음 아고라(agora.media.daum.net)를 비롯해 여기저기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위생조건에 대한 장관 고시가 발표된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혼자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곧장 온라인 상의 여성 직장인 모임에 글을 올렸다. 매일 아침 컴퓨터 하단에 창을 띄워놓고 업무의 애환을 나누고 쇼핑·자기개발·회사정보 등 갖가지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다.

“오늘 고시됩니다. 유모차 부대도 나온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모여주세요!! 오늘이 중요합니다! 가두시위 따위 위험하게 안 해도 됩니다!! 청계천에서 모입시다!! 저 작성한 플래카드 가지고 갈 테니 소라똥(소라 조형물) 옆 배스킨라빈스 앞으로 모여주세요!!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였다. “미니스커트 부대의 힘을 보여주세요!!!!”

다행히 댓글이 15개는 족히 달렸다. “청바지 입고 왔는데 같이 껴도 돼요? ㅎㅎㅎ”, “아니 청주 사람은 어케합니까? 나 오늘 미니스커트는 아니라도 하늘하늘 스커트긴 한데”, “오늘 광화문에 저녁 약속이 있는데 2차는 촛불시위 가자고 꼬셔볼게염. 근데 제 친구는 이메가(이명박) 뽑은 전력이 ㄷㄷㄷ. 근데 나도 오늘 좀 아줌마틱한 플레어스커트에 피부진상 최고조라 살짝 안습 ㅠ.ㅠ ”.

이렇게 댓글과 메신저 ‘네이트온’으로 연락을 주고받아 회원들이 모이기로 했다. 그 동안 온라인상에서 친해진 사람도 있고, 처음 이야기를 나눈 사람도 있다. 오후 7시. 김진주(가명)가 9cm 하이힐 소리를 또각또각 내며 먼저 도착했다. 김진주는 오자마자 쭉 늘어서 있는 전경들을 보고 소리쳤다. “전경이 내 가방 가져가면 가만 안둘거야!” 그에 이어 청바지에 쫄티, 단정한 정장 차림, 발랄한 미니원피스트까지 다양한 옷차림의 여성 5명이 모였다. 오늘 집회가 있는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는 계속 전경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이날 투입된 경찰만 1만 명이라고 들었다. ‘집회’는 처음 와본다는 김진주는 가방을 사수하겠다며 호기롭게 외치던 처음과 달리 “우린 그냥 걸어가는데, 경찰이 왜 서 있는 거야…”라고 불안함을 살짝 내비쳤다.

오늘은 유독 서울광장에 사람들이 많았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 가족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다 같이 ‘고시 철회! 협상 무효!’ ‘이명박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쳤다. 아빠 목에 올라타고 있는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정말 큰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 주변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물을 건넸다. 다들 예전에는 서로에게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는데, 여기에 서로를 생각해주는 사람들의 마을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고 마음이 따뜻해졌다. 마침 강원 강릉에서 왔다는 여중생 ‘강릉 소녀’가 단상에서 자유발언을 하고 있었다. 아이는 많은 말 대신에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노래 진짜 잘 한다. ”

“중학생이 강릉에서 버스 타고 온 거야. 그것만으로도, 이명박은 뭐 좀 느껴야 되는 거 아냐?”

“그러니까. 먹기 싫다는데, 왜 자꾸 먹으라는 거야? 이제 안 먹을 자유도 없는 거야?”

우리의 잡담과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잡담이 섞여들었다.

그사이 한 단발머리 여대생도 힘주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가끔 누가 단상에서 얘기를 하면,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사람 스타일에 관심이 갈 때도 있다. 아무래도 쟤는 머리에 좀더 층을 주면 세련돼 보일 것 같아, 뭐 그런 생각들. 저기 지나가는 여기자는 옷을 좀더 파스텔톤으로 입는 게 어울리겠다, 얼굴 붓기를 조금 빼면 더 예쁘겠다, 붓기 빼는 데는 팥물이 좋은데, 또 그런 생각들. 이런 생각은 단정하고 적절한 외양에 늘 신경을 써야 하는 우리의 직업병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민가협 어머니들이 나와서 “명박아~~”라고 부를 때는 눈이 시큰거렸다. 그분들이 얼마나 예전 고통이 되살아나셨으면 저렇게 측은하고도 절절하게 이명박 대통령 이름을 부를까 싶었다.

앞에 앉은 대학생은 영상통화를 한다고 난리다. 친구가 시골에 있는 모양인데, 여기 현장을 휴대전화로 직접 보여준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다들 휴대전화와 디지털 카메라로 찍고 보낸다. 과연 기록의 시대다.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은 6mm 카메라를 들었다. ‘뭘 찍냐’고 물었더니 ‘영화를 찍는다’고 한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이 허용된 지 15년 뒤, 모두가 광우병으로 죽음을 맞을 때 홀로 살아남은 주인공 이야기, 영화 <나는 전설이다> 패러디란다. 이 고등학생은 근데 고민이라고 했다. “그냥 익명으로 올려야지, 안 그랬다간 반정부로 찍히지 않겠어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저녁 8시30분쯤 됐나. 행진을 한다고 했다. 보통은 밤 10시까지 문화제를 한 뒤에 행진을 했는데, 오늘은 앉자마자 행진이다. 매번 집회의 형식도, 장소도, 참가하는 사람들도 바뀐다. 사람들이 길 따라, 전경들이 막지 않는 길 따라 그냥 쓱쓱 걸어간다. 지난 월요일 걸었던 행진 경로와 오늘 행진 경로도 완전히 다르다. 처음에는 문화제만 했던 것이 토요일을 기점으로 거리시위로 바뀐 것도 달라진 점이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주도한다고 하지만, 사실 주도세력이 없는 것 같다. 괜히 앞에서 저렇게 떠드는 단체 사람들 때문에 ‘주도세력’에 대한 논란이 생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어느 배우의 말처럼 시민의 마음과 노력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것 같은 느낌.

오늘은 종로로 가려나 보다. 길을 걷다 보면, 우리처럼 온라인상에서 다른 목적으로 만났다가 함께 나와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온라인상에서 만나 업무의 힘든 점을 토로하고, 간혹 소개팅도 교환하고, 화장법도 나누고, 업무 정보도 공유하던 우리가 어느새 ‘쇠고기’를 말하고 ‘이명박 퇴진’을 말하고 있다.


청계광장도 우리가 사는 동네

행진을 하는 우리 옆으로 20~30명의 사람들이 지나갔다. 그들은 상을 당하면 쓰는 삼베 두건을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온라인 재테크 카페 사람들이라고 했다. 재테크 정보를 주로 나누던 이 카페도 이제는 ‘소고기 정국’에 관한 이야기가 게시판의 주류를 이룬다고 했다. 한 회원이 글을 올리고, 댓글이 주렁주렁 달리고 결국 오프라인에서 만나 행진하고 있다. 자동차를 판다는 한 남자는 “난 사실 이명박 대통령 뽑은 사람이다. 경제를 살리길 바랐다. 하지만 쇠고기 협상은 아닌 것 같다. 가장 기본적인 국민의 먹을거리를 담보로 협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고, 그것을 가지고 또 길을 막는 것도 잘못된 것 같다”고 연방 투덜댔다. 그는 “여중생, 여고생도 연행되는 걸 보고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길을 걷다가 내 또래의 사무직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들 무리도 자주 보게 된다. 앞서 걷고 있는 세 명의 여자는 은행에 다닌다고 했다. 이들도 갑자기 나오게 됐는지, 정장에 높은 구두를 신었다. 다들 우리처럼 회사 끝나고 곧바로 온 모양이다. “다리 안 아프세요?”라고 물었다. 그들이 “아, 이 정도는 감수해야죠”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다들 상사 욕부터 이명박 대통령 욕까지 화제가 다양하고도 넓다. 결국 이 청계광장도 우리네 사는 세상 같다.

밤 10시. 종각역 근처로 행진했다. 발목이 시큰거려 더 걸을 수가 없었다. 지난 토요일부터 연일 하이힐을 신고 두세 시간씩 걸었더니, 발목이 버티지 못하는 것 같다. 노란 조끼의 의료봉사단에게 발목 상태를 얘기했더니 곧바로 파스를 뿌려줬다. 그리고 근육 테이핑이라는 걸 해줬다. 근육을 잡아줬더니 발목이 덜 아프긴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회를 접기로 했다.

5월30일 아침. 출근하자마자, 언제나처럼 온라인 여성직장인모임에 접속했다. 김진주가 <헌법 1조> 노래를 카페에 올렸다. 집회는 처음 참석한 김진주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고 했다. 이 노래는 탄핵반대 집회 때부터 나와서 그때 엄청 불렀던 노래인데. 사실 김진주는 탄핵은 자신과 별로 상관없는 일로 느껴졌다고 했다.

수도권 4년제 대학을 다니다가 도중에 그만둔 나는, 대학 다닐 때는 늘 돈 버느라 여념이 없었다. 커피숍 서빙, 편의점 알바, 내레이터 모델, 식당을 하셨던 부모님 도우미까지. 그렇게 열심히 돈 버는 동안 정치에 관심 가질 겨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탄핵 때 왠지 측은함이 느껴져 열심히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김진주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는 걸까.

어느새 이렇게 ‘함께’

오전 11시21분. 어제 참여했던 집회 현장 동영상을 ‘이명박 탄핵을 위한 범국민운동본부’ 홈페이지에서 스크랩해 온라인 여성직장인모임 게시판에 올렸다. 역시나 댓글들이 달렸다.

“나 어딨지? 우리 어딨어?ㅋㅋㅋㅋ”, “한 번밖에 못 갔는데 남친이랑 또 가려구요!!”, “저 어제 너무 일이 늦어져서 못 갔어요. ㅠㅠ 토욜엔 꼭 갈 거예요~!!! 어제 정말 만나는 사람들마다 심각성을 알렸어요. 그치만 아직도 무관심한 사람은 너무 많다죠..ㅜㅜ”

좀 있다가 내가 어제 도움받았던 아고라 의료봉사단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의료봉사단은 지난 월요일에 한 여성이 ‘의료봉사단 모이자’는 글을 올린 지 50분 만에 15명이 손을 들어 즉석 구성된 단체라고 한다. 글은 “시민들 탈진 때문에 생수, 이온음료, 단 과자류 필요하대요. 우리 사무실에 비축해둔 과자 보낼까요?”라고 제안했다. 댓글로 모금을 제안했다. 그리고 2시간여 만에 20만원이 모였다. ‘내 문제’에는 모두가 적극적인 세상이 됐다. 그러다 보니 또 이렇게 ‘함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