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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국민한테는 져도 된다 / 한홍구

강산21 2008. 5. 29. 15:10
[시론] 국민한테는 져도 된다 / 한홍구
시론
한겨레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아무도 예상치 못한 촛불집회는 지금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24일 토요일 집회에서 처음 밤샘 시위가 있더니, 4일째 성난 시민들이 밤늦도록 거리를 메우고 있다. 26일 집회를 보면 촛불문화제가 벌어진 청계광장보다 오히려 종로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듯 싶었다. 밤늦게까지 시위가 계속되니 사람들도 아예 늦게 나온다. 참가자들의 구성도 처음 촛불을 든 10대 중심에서 전 국민으로 확대되고 있다.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민의를 배신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때 국민들은 촛불을 든다. 기존의 촛불집회와 조금 다른 점은 탄핵 때는 한 달 뒤에 총선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당장 거리로 나설 필요 없이 광장만 지키며 심판의 날만 오기를 기다리면 됐다.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추모 집회 때는 그래도 비상대책위라는 ‘지도부’가 있었다. 일부 참가자들이 미국대사관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이는 집회를 마무리하는 수순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시위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벌이는 것이라 누가 해산 얘기를 꺼내기도 어렵다. 나오기를 제 발로 나왔으니, 집에도 제 발로 가야 한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재협상에 대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니 그냥 집에 갈 수가 없다.

 

 지도부가 없는 시위대는 늘 우왕좌왕이다. 그런데 이게 또 새롭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만 어디든 가면 된다. 경찰은 땀 뻘뻘 흘리며 시위대를 막아서지만, 시위대는 종로가 막히면 을지로로 가면 되고, 을지로가 막히면 명동으로 가면 되고, 명동이 막히면 서울역으로 가면 되고, 서울역이 막히면 시청으로 가면 된다는 ‘되고 송’ 분위기다. 시간은 우리 편이기 때문이다. 어디로 갈지 모르니 막을 수도 없다. 경찰의 강경진압, 단순가담자도 연행 방침에는 그렇다면 ‘기꺼이 타주마’라며 닭장차에 웃으며 오른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는 현장의 젊은 벗들의 얘기를 옮기면 “염장질”이다. 오히려 불을 질렀다. 국민들은 협상이 잘못되었다는데, 대통령은 소통이 문제란다. 협상은 잘 되었는데 국민을 계몽하지 못해서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 아닌가? 17번이나 평화적인 촛불집회를 열면서 절박한 심정을 표현했는데 정부는 장관고시를 며칠 연기하는 미봉책만을 쓸 뿐, 재협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열 몇 번을 절절하게 이야기했는데 반응이 없다면, 그 관계는 금이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처음에는 쇠고기 문제로 시작되었지만, 지금 국민들은 무시당했다는 데 더 분노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탄핵 이래 촛불집회에서 제일 많이 들을 수 있는 노래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이다. 이 원리가 무시당했고, 이는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뜻이다. 이런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국민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집회 현장에서는 “귓구멍에 공구리(콘크리트)를 쳤냐”는 분노의 목소리에 박수가 터져 나온다. 촛불이 안 보이나 본데 그럼 횃불을 들란 말이냐는 외침이 힘을 얻고 있다. 

 

 정부는 배후니 불법이니 하는, 정말 시위 현장에 잠시라도 나와 본 관찰자라면 절대로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은 삼가야한다. 배후 운운 하는 것은 제 발로 나온 국민들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다. 짱돌을 던진 것도, 쇠파이프를 든 것도, 화염병을 던진 것도 아니다. 17번이나 평화적인 촛불집회를 했는데도 반응이 없으니 광장에 앉아 있다가 거리로 발길을 옮긴 것뿐이다. 전에는 정부나 보수언론이 불법ㆍ폭력시위 운운하면서 한총련이나 민주노총같은 운동단체를 고립시켰는데, 지금은 딱히 책임을 전가할 주도세력도 따로 없다.

 

 진짜 ‘소통에 문제가 있다’라고 생각한다면 대화를 해야 한다. 군사정권 시절 김종필도 이명박 대통령이 재학 중인 고려대나 서울대 문리대를 찾아 수백, 수천 명의 학생들 앞에서 공개토론을 벌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취임 직후 전국민에게 생중계되는 가운데 검사들과 토론을 벌였다. 그런데 대통령은 소통에 문제가 있다고만 할 뿐 국민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국민들이 청와대로 가겠다는 것 아닌가? 터무니 없는 협상을 해놓고, 그 협상을 백지화하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이제 국민들은 문제를 정부가 국민의 뜻을 따르느냐, 아니면 미국 축산업자의 이익을 지켜주느냐로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부가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 답은 간단하지 않는가? 시위대가 5공 때처럼 전두환 처단을 외치는 게 아니다. 국민을 무시해도 안 되지만, 국민을 겁낼 이유도 없다. 국민을 만나고 국민의 뜻에 따라 협상 백지화를 선언하라. 미국과 다소 마찰이 생기겠지만, 그 부담은 재협상을 명령한 국민들이 함께 질 것이다. 국민을 이기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한테는 져도 된다. 정부가 국민을 이기면 진짜 큰일은 그 때부터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