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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비례대표제 ‘개혁적 확장’을

강산21 2008. 4. 26. 11:44
[시론] 비례대표제 ‘개혁적 확장’을 / 정상호
시론
한겨레
» 정상호/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 
비례대표와 관련된 비리 문제로 야권이 어수선하다. 예전 같으면 이 시기에 당의 지도체제와 노선을 정비하는 데 바빴을 야당들이 조직을 추스르지 못한 채 정부와 검찰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비례대표 시비와 관련하여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엉뚱한 제안들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이참에 아예 비례대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여성 정치인의 등용문으로 활용되는 할당제를 축소하거나 없애자고 한다.

 

사실 이번 파문은 예정된 것이었다. 언론과 정당, 유권자들의 관심이 온통 지역 후보를 선정할 공천심사위원회에만 쏠렸던 터라 비례대표 후보 선정 과정은 각 정당의 일부 실세와 소수 계파가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선거를 불과 20여일 앞두고 비례대표 후보가 확정되었기에 언론을 통한 자격 검증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선정 근거조차 유권자들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됐다. 비례대표제 문제가 모처럼 공론화된 이 시점에서 비리 차원을 넘어서 큰 폭의 수술을 단행하자. 그렇지만 방향은 축소나 폐지가 아니라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제를 보완하여 정당 정치를 발전시키겠다는 비례의 원칙과 소수자와 직능사회 단체의 대표성 확보라는 두 가지 애초 목표를 살리는 방향으로의 ‘개혁적 확장’이다.

 

그러려면 첫째, 현재 56석에 불과한 비례대표 의석을 적어도 지역의석의 절반 정도로 늘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단언컨대 그 정도가 되면 정당들은 사활을 걸고 유권자와 지지자들의 관심과 표를 얻을 수 있는 능력 있고 참신한 인물을 영입하려고 발벗고 나설 것이다. 또한, 일부 실세와 계파끼리의 ‘그들만의 잔치’는 더는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비례대표 선정 과정을 정당 민주화와 참여 민주주의의 촉매제로 활용하자. 정치권은 그동안 진짜 당원이 없다고, 20대가 도통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유권자들이 투표하지 않는다고 질타만 하였다. 그런데 언제 한번 제대로 이들에게 참여의 계기와 인센티브를 만들어 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아예 비례대표의 순위 결정에 ‘당원 투표제’나 지지자들이 참여하는 ‘시민 투표제’를 채택해 보자자. 애초부터 일반 유권자와 시민단체로 구성된 시민위원회를 꾸려 추천을 받고, 모바일 투표와 전자 투표도 실험해 보고, 영호남 지역 쪽에는 지역 할당제도 도입하자.

 

이로써 얻을 소득은 크다. 당장 정당의 내부 민주화와 활성화에 기여하고 전국 단위의 유망한 새로운 리더십을 발굴할 수 있다. 예비 경선을 걸친 비례의원들은 더는 지역구 의원들에게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의정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다. 중소기업인과 자영상인, 비정규직과 대학생 등 다양한 직능사회 단체들은 자신들의 권익 증진에 이바지할 공약을 제시한 후보에게 당당하게 정치적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국정치는 정책 정당, 전국 정당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비례대표제의 확대에 따라 지역구 감소를 걱정하는 현역 의원들의 소극적 태도와 호남보다 두 배나 큰 영남 의석을 독점하겠다는 한나라당의 완강한 반대에 있다. 이제라도 제살을 깎는 대담한 자세로 진지하게 국민을 설득하는 일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몰린 진보개혁 정당들이 응당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정상호/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