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반동’의 시대를 사는 법 / 이태수

강산21 2008. 4. 22. 09:19
한겨레

[객원논설위원칼럼] ‘반동’의 시대를 사는 법 / 이태수

기사입력 2008-04-21 23:05 
 
[한겨레] 마침내 황량한 벌판에 선 느낌이다. 예상은 했다지만 실상 진보세력은 이같은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정치가 모든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한 정상적인 사회발전의 통로라는 면에서 연이어 진행된 대선과 총선 결과가 갖는 의미는 자못 크다. 지난 십년 동안 우리 사회에 개혁의 이름으로 수많은 변화를 시도한 것도 정치권력이 있기에 가능했음을 부정할 수없다. 이제 정부권력과 의회권력 모두를 신(?)보수가 차지한 마당에 향후 5년 남짓의 시간은 적어도 진보의 시각에선 ‘반동(反動)’의 시기이다.

사실 디제이(DJ)와 노무현시대도 개혁·진보정권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노선에 있어 신자유주의가 횡행했다. 노 정권에서 가열차게 추진한 한미자유무역협정은 그 백미다. 권력집단 내에도 우파 정객과 우파 관료가 포진하여 진정 진보적 개혁정책을 구현하는 데에 내부의 적이 되기도 했다. 냉정히 보면 진정한 진보의 가치는 속시원히 이 땅에서 실현된 적이 없다는 평가가 옳다. 단지 상대적인 의미로만 진보의 시기가 있었을 뿐.

그러나 이명박시대의 보수파는 독식에 능하다. 같은 색깔의 동일세력들에 의해 권력배분이 일어나고 정책도 그 나름으로는 일관성이 있다. 좌파적 정권에 몸담았던 관료조차도 용납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은 우측 깜박이를 켜고 확실히 우측으로 간다는 점이다. 햇볕정책, 비전 2030이 폐기되었듯 ‘평화’, ‘균형’, ‘복지’의 이름으로 그나마 시도된 지난 정부의 성과를 무화(無化)시키는 데는 허망하게도 한 달이면 충분했다. 개혁의 이름으로 진군할 때는 그렇게 힘들더니 보수의 이름으로 퇴각할 때는 거침없다. 한국사회가 지난 몇 달 동안 이미 10년 이상 퇴보해 버린 느낌이다.

더군다나 정치권력 안에 그나마 진보적 대안을 내세우고 이를 통해 집권세력의 독주에 경고를 보낼 만한 세력이 없다는 것은 더욱 아픈 부분이다. 현 통일민주당은 세계화시대 진보적 정책으로 평화복지민주사회로 가는 데에 더 이상 희망을 걸 수 없는 정당임이 드러났다. 진보를 가슴과 머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들도 없는데, 내용도 없이 ‘새로운 진보’로 분장을 하는 것은 진보를 더욱 오욕으로 만드는 것이다.

대중의 우경화는 마지막 희망마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욕망의 정치’라고 평가할 정도로 경제적 이득에 올인한 최근 두 번의 선거에서 이미 대중은 더 이상 평화, 연대, 정의, 민주, 인권 등의 가치를 수용할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절망은 가깝고 희망은 보이지 않은 채 반동의 세월이 가없이 계속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그 탄탄한 절망의 차단막에서 균열의 조짐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진정한 보수라면 가치면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효율성, 시장을 신봉하면서도, 실천면에서는 도덕성과 투명성, 법치성을 갖추고 있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는 천박한 보수, 사이비보수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천민자본주의와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형성된 10년 전의 기득권을 부활시켜보겠다는 일념으로 자신들이 결코 충족시켜줄 수 없는 대중의 욕망에 기대고 있다. 이는 오히려 진보의 가치와 이념이 자랄 토양을 만들어 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진보의 철학과 정책이란 씨앗을 그 토양에 뿌리고 부지런히 소통이란 이름으로 땅을 갈아 나간다면 희망의 한국사는 새로운 기회를 안겨주지 않을 리 없다. 반동의 시기를 진보의 디딤돌로 삼은 수많은 역사가 있기에 이 반동의 시대를 즐길 수 있는 역설적 처세법이 지금 우리에겐 필요하다. 절실하게.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