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과 시론모음

어느 정당도, 어느 언론도 말하지 않은 진실

강산21 2008. 2. 2. 19:50
어느 정당도, 어느 언론도 말하지 않은 진실
정치권과 언론을 향한 한 네티즌의 쓴 소리


노무현 대통령은 28일 기자회견에서 차기 정부 인수위원회가 추진 중인 정부조직개편과 관련, “참여정부가 공 들여 만들고 가꾸어 온 철학과 가치를 허물고 부수는 조직개편안에 서명할 수는 없다”며 인수위 안대로 법안이 통과되어 온다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시사가 국회의 심의에 영향을 미치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상황이 되면 좋겠다”며 국회의 책임 있는 논의를 당부했다.

그러나 이같은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내용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언론도, 국회도 대통령이 지적한 조직개편 추진과정의 문제점, 무조건적인 부처통폐합의 패해 등 내용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다만, 대통령의 거부권 시사가 대단히 부적절한 행위인양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거부권은 헌법에 의해 대통령에게 주어진 고유권한이다. 다른 선진국에서도 정치과정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본질을 이야기하는 지식인을 찾아볼 수 없는 게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에 대해 정치포털사이트 ‘서프라이즈’에 한 네티즌이 ‘대통령에게 깜짝쇼를 해달라는 국회’라는 제목으로 미국사회에서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의회에 경고하는 일이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지 구체적 기사까지 찾아 소개했다. 국회의원들과 기자들은 특히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편집자주>

대통령에게 깜짝쇼를 해달라는 국회


글쓴이 torreypine (torreypines) / 조회 3925 / 등록일 2008-1-29


어제 있었던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이어서 나온 각 정당의 반응을 어떻게 보십니까? 저한테는 아주 이상합니다.

먼저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을 보면, 대통령은 법안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왜 국회에서 그 법안이 심의되는 동안에 거부권 행사 의사를 밝히는 게 맞는지를 구구절절이 설명합니다. 상식적으로 입 꼭 다물고 있다가 법안이 넘어온 후에 느닷없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정말 안 될 것 같은데, 준비한 원고에 써서 설명하는 것도 부족해 어느 기자의 질문을 받아 다시 한번 부연 설명합니다.

우리나라에 국회와 대통령이 헌법하에 존재해온 지가 한두 해도 아니고, 거부권 행사가 이슈가 된 것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닐 텐데, 왜 대통령이 그런 아주 기본적인 것까지 설명을 해야 하는지 정말 이상합니다.

거부권 행사 부분에 대한 각 당의 반응을 좀 보시죠.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는 "어제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발언은 국회의 자율권과 입법권을 명백히 침해하는 부적절한 발언"이라고 했고요.

민주노동당의 손낙구 대변인은 "해야 할 말을 한 것이지만 국회 심의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부권을 언급한 것은 월권"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신당 최재성 원내 대변인은 "대통령의 지적은 충분히 유의미하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국민이 조금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대통령이 나설 일이 아니라 국회에서 논의해야 할 사안임을 명확히 했다고 합니다.

요약해보면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잘 봐주면 내용면에서는 틀린 말이 아닐 수 있지만, 방법을 보면 국회를 무시하고 권한 밖의 일을 한 거네요. 우리나라 국회의원 대부분이 소속되어 있는 세 당의 입장이 그러하니 삼권분립의 한 축인 국회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정부조직이 최선이냐 하는 것은 철학과 가치의 문제이니 생각이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법안에 대해 대통령이 왈가왈부하는 게 맞지 않다는 얘기는 아무래도 이상해서 우리가 모방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은 어떤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에 살 때 대통령이 의회에서 심의 중인 법안에 대해서 문제를 지적하고, 그대로 넘어올 경우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의회에 경고하는 것을 왕왕 봤습니다.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지 알아볼까 하고 Google에 들어가서 'Bush threatens veto'라고 두드려 봤습니다. 2006년과 2007년 사이에 부시 대통령이 거부권 행사를 미리 경고한 기사 제목들입니다. 더 이상 열거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 중단한 게 이렇습니다.

- Bush Threatens Veto of New Iraq Bill
- Bush threatens veto of 30-day FISA extension
- Bush Threatens Veto Over Troop Pay Raise
- Bush Threatens Veto of Indian Health Care Bill
- Bush Threatens Veto of Student Aid Bill
- President Bush Threatens Veto Of Supplemental Appropriations Bill
- Bush threatens veto in ports row
- Bush Threatens Veto of Energy Bill
- Bush threatens veto of wiretap measure
- President Bush Threatens Veto of SCHIP Legislation
- Vetoing CAFE for Big Oil
- Bush threatens veto if telecoms don’t get immunity
- Bush Threatens Veto Against Bill That Funds District of Columbia
- Bush Threatens More Vetoes in Final Year

이 중에 몇 개의 법안에 대해서 실제로 거부권을 행사했는지 조사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게 오늘의 핵심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백악관은 의회의 입법과정에 깊숙이 관여하여 조율하다가, 대통령이나 정부의 철학이 허용할 정도로 의회가 양보를 안 할 경우, 그렇게는 나도 못 하겠다고 미리 선을 긋는 거죠.

부시는 의회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미국 대통령보다도 편하게 대통령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거의 6년을 상·하원에서 다 공화당이 다수당이었으니까요. 그러다가 2006년 7월, 인간 배아 줄기세포에 대한 연구비보조 금지를 해제하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한 게 임기 첫 번째입니다. 당시의 워싱턴포스트 (조중동하고는 조금 수준차가 있는 신문이지요?) 기사 일부입니다.

"Bush has threatened vetoes on numerous issues over the years, but he and the Republican-controlled Congress had always worked out their differences."

제가 영어 몰입교육을 안 받아서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말로 옮겨보면, "부시는 과거 수년간 많은 이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겠다고 위협해 왔으나, 항상 공화당 콘트롤하에 있는 의회와 의견차를 잘 조율해 왔다." 이런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거부권행사 위협은 정치 일상사란 얘기죠.

그런데 우리 국회 삼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들어 보면, 국회에서 논의 중인 법안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아무 소리 말고 있다가 법안 넘어온 후에 깜짝쇼를 하라는 얘기네요. 그런데 진짜로 깜짝쇼를 해버리면 또 뭐라고 할까요? 대통령의 철학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 같으니 다시 만들겠다고 할까요?

정말 왜들 이럽니까? 언제까지 진실하고는 상관없이 국민이 속아 넘어갈 것 같으면 아무 말이나 뱉을 겁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에서 얘기한 그런 기본 상식까지 설명해가며 대통령 노릇을 해야 하는 노무현 대통령 보기가 정말 가슴 아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