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글 좋은글

[스크랩] 연탄, 이게 궁금해

강산21 2007. 12. 13. 20:21

연탄, 이게 궁금해

매일신문|기사입력 2007-12-13 18:06 


◇연탄 가격은?

무연탄을 주원료로 만든 원통형 고체연료이고, 공기구멍이 뚫려있어서 구공탄 또는 구멍탄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 장당 정부고시가격은 221원. 여기에는 공장에서 가져가는 이윤도 포함돼 있다. 소비자 가격은 280~330원. 지역에 따라, 배달 여건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 30여년 전인 1976년 정부고시가격은 30원 40전(배달가격 37원). 커피 한잔 값이었다.

올림픽이 열리던 해인 1988년 167원 25전(배달가격 195원)으로 껑충 뛰었고, 이후 한참 동안 변화가 없다가 2003년 184원(배달가격 230원)으로, 올해 4월 1일 221원으로 바뀌었다.

◇연탄 구멍갯수는?

한국산업규격상 발열량은 한 장당 4천600kcal 이상이어야 하고, 30cm 높이에서 굴러떨어졌을 때 부서지지 않도록 만들어져야 한다.

과거 가정용은 구멍 수에 따라 19, 23, 31공탄, 업소용은 41, 42, 49공탄이었지만 1978년 이후 22공탄으로 통일됐다가 다시 22공탄, 25공탄으로 나뉘었으며 현재 대구에서는 25공탄만 생산하고 있다. 구멍의 갯수가 많아질 수록 화력이 세진다. 크기는 1호에서 5호로 구분하며 보통 가정용은 2호가 가장 많이 쓰인다.

◇연탄 무게는?

처음 찍었을 때 3.6kg, 건조했을 때 3.3kg 이상이 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개 연탄 사용량을 말할 때 t(톤)을 쓰는데 이것이 몇 장인지 알려면 278을 곱하면 된다. 가령 올해 대구지역 무연탄 사용량은 16만t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를 연탄으로 환산하면 4천448만 장이 된다.

◇ 연탄 소비량은?

연탄 소비가 절정을 이뤘던 때는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이던 8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1988년에 석탄 2천 429만여t을 생산해 전량 연탄 제조에 사용했다.

기름값도 그마나 조금 쌌던 2000년대 초반 사용량은 최저치를 기록했다가 2~3년 전부터 다시 연탄 사용량이 늘기 시작했다. 전국적으로 2005년 연탄 소비량은 201만t으로 전년 대비 45% 증가했고 2006년에는 230여만t을 기록했다. 가장 많이 사용하던 1980년대 후반에 비해 10분의 1 규모로 줄었지만 2000년대 초반에 비해서는 4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대구도 마찬가지다. 연탄이 지역 난방의 86%까지 차지하던 1986년 당시 연탄 사용량은 150만t이었다. 이후 꾸준히 감소세를 기록하면서 급기야 2002년에는 3만3천t까지 줄었다. 최대치에 비해 50분의 1로 감소한 셈이다. 그러던 것이 2004년에 7만3천t, 2005년에 12만4천t, 2006년에 15만9천t까지 늘었다. 대구연료공업협동조합이 예상하는 올해 사용량은 16만t을 웃돌 것으로 보인다.

◇ 연탄공장은?

한창 때 6곳이 성업 중이었지만 1990년대 2곳이 문을 닫고, 지난 2003년에 다른 한 곳도 폐업하면서 현재 동구 안심 일대에 3곳(대영연탄, 태영씨엔이, 한성연탄)이 남아있다.

연탄공장들이 차지하는 면적은 9만9천여㎡로 전국에서 가장 크고, 거래량도 많다. 대구 뿐 아니라 고령, 성주, 군위부터 남쪽으로는 경남 거창, 창녕, 합천까지 공급하고 있다. 한창 연탄 소비가 늘고 있는 요즘은 하루에 회사마다 10만장씩 모두 30만장을 찍어낸다.

현재 저탄장에 쌓아둔 무연탄 비축량은 5만t, 3월까지 9만t이 더 필요한데 상황이 여의치 못하다. 대구시가 1997년부터 시작한 대구선 이설 사업이 막바지로 접어들었기 때문.

이미 반야월 역 안에 있는 사용하지 않는 가선은 없앤 상태이고, 남아있는 선로도 연말까지 완전 철거할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강원도 태백 등지에서 무연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더 이상 연료단지 내로 들어올 수 없다.

결국 운송방식을 철로에서 육로로 바꿀 수 밖에 없는 상황. 문제는 운송비가 비싸진다는 것. 화물열차를 이용하면 t당 1만 2천 원이 들지만 화물차를 이용하면 1만 9천 원까지 올라간다. 원가가 비싸지는 만큼 연탄 가격을 올리고 싶어도 정부고시가격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도 없다.

대구연료공업협동조합 이기호 상무는 “올 겨울만이라도 화물열차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대구시에 수차례 부탁했지만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며 “어쩔 수 없이 육로 수송대책을 세웠고, 운송업자도 선정해 두었는데 원가부담이 크다.”고 했다.
 
 

연탄, 그 추억과 눈물

매일신문|기사입력 2007-12-13 18:06 


◆연탄의 역사

세기 말 일본 큐슈 지방 모지시에서 사용된 ‘통풍탄’ 또는 ‘연꽃연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본다. 당시 주먹만한 크기의 석탄에 구멍을 낸 탄을 목탄 대신에 사용했다. 구멍이 뚫린 모양이 연꽃열매 모양을 닮아 연꽃연탄으로 불렀다고.

이후 1907년 제조기가 발명되면서 본격 제조를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후반부터 평양광업소에서 제조한 관제연탄이 처음 사용됐다. 벽돌과 비슷한 모양에 2, 3개 구멍이 있는 연탄이었다. 대부분 일본인 가정을 중심으로 공급됐다. 1930년대부터 연탄이 본격 제조됐는데, 부산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삼국상회가 9공탄을 만들었다. 민족자본으로 최초의 연탄 제조업체는 1947년 설립된 대성산업. 1960년대는 국내 연탄산업의 전성기였다. 1963년 말 연탄공장은 군소 규모를 합쳐 모두 400여 개에 달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어머니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 두 가지를 꼽으라면 김장과 연탄이었다. 김장 몇 십 포기 담그고, 연탄 몇 백 장을 광에 쌓아놓으면 흐뭇한 표정으로 겨울 준비를 마쳤다고 말씀하곤 했다. 동네 연탄가게 아저씨와 평소 친분을 돈독히 해두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행여 신경을 거슬렀다가는 배달도 늦어지고, 계단을 올라야 하느니 꼬불꼬불 오르막길이 힘드니 하면서 괜한 트집을 잡아 장당 배달료가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탄 아궁이 크기에 딱 맞는 양은냄비로 끓여내는 라면이 겨울밤 김장김치와 어울어지면 그 맛은 가히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 학교 앞에서 팔던 ‘달고나’를 집에서 만들어 먹겠다고 국자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부었다가 끓어넘치는 바람에 국자도 망치고 온 집안에 설탕 타는 냄새가 진동하던 기억도 누구나 한 번쯤은 갖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 시커먼 연탄 속에 묻혀버린 눈물겨운 사연은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하루가 머다하고 신문이며 방송에서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일가족 사망’이라는 소식이 들려왔고, 연탄가스를 마셔서 넋을 놓아버렸다는 사람이 동네마다 한 명씩을 꼭 있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가스에 중독되면 무조건 동치미 국물을 먹여야 한다고 믿었고, 때문에 겨울 김장을 담가놓고 동치미 담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1984년 3월 20일자 모 일간지 머릿기사의 제목은 ‘연탄가스 무방비 30년’이었다. 작은 제목으로 해마다 100만 명 중독, 3천여명 사망이라고 쓰여있다. 또 1986년 10월 20일자 매일신문 기사를 보면, 서울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자료를 인용해 연간 126만 명이 중독되고, 이 중 4천200여명이 목숨을 잃는다고 전했다. 불과 20년 전 일이었다.

게다가 연탄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연료였다. 새벽 단잠을 깨고 온몸을 휩싸는 한기에 몸서리를 쳐가며 연탄을 가는 일은 매일 반복되는 곤역이었다. 연탄가스를 마셔가며 구멍을 나란히 정렬하는 섬세한 작업도 필요했다. 행여 연탄 수명을 연장해보겠다고 불구멍을 막아놨다가는 겨울 밤 내내 온가족이 서로 이불을 뺏다시피 둘둘 말고 자야하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뜨끈하게 자 보겠다고 불구멍을 환하게 열어놨다가는 새벽 연탄 가는 시간을 놓쳐서 이웃집에 연탄 불씨를 빌리러가는 쑥스럼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 연탄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사진`정재호 편집위원 newj@msnet.co.kr
출처 : 참여시민네트워크
글쓴이 : 김성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