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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유치원에 간 ‘할머니 마법사’

강산21 2007. 11. 13. 17:45
 
 
유치원에 간 ‘할머니 마법사’
[할머니 선생님과 우리 사회] ③ 유치원 교사가 본 할머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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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저출산·고령화 추세에 대응해 출산과 양육을 장려하고 노인인구를 활용해 성장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육아 경험이 있는 50~60대 중·고령 여성을 유치원 보조 인력으로 육성해 활용하는 ‘유아-중·고령 여성연계사업’도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이다. <국정브리핑>과 교육인적자원부는 이번 사업을 바라보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는 기회를 마련했다.<편집자 주>

광주농성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종일반 담임 조윤재
교육학자 카츠는 ‘교사는 교직에 입문해서 처음 1년여에 걸치는 생존단계를 거친다’고 말했다. 막 발령을 받아 신임교사로 종일반을 담당하게 된 후 처음 3개월여 동안 나는 이 말이 얼마나 구구절절이 옳은지 매일 일과 후에 되새김질하며 퇴근하곤 했다.

임용고사를 보려고 뚫어질 듯 쳐다보며 외웠던 종일반의 특성과 그를 담당하는 교사의 자질 등을 다시 뒤져보며 매일 의욕을 불태웠지만, 초등학교 학생들보다 더 오래 학교에 남아있는 탓에 체력이나 주의력이 떨어지고, 시시때때로 엄마를 찾아 칭얼대는 30명 가까이 되는 유아들을 보조 교사도 없이 돌보고 하루를 마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존이 아니고 무엇일까 싶었다.

유치원 교사의 하루, 그 생존의 나날들

“선생님, 저 엄마 보고 싶어요.”
“그렇구나. 엄마가 오실 때까지 좀 더 있어야 하는데 선생님이 안아줄까?”

이러고 있는 사이 뒤에선 어떤 아이가 내 바지 가랑이를 잡고 화장실에 가자고 조른다. “선생님, 저는 똥 마려운데 선생님이랑 같이 갈래요. 집에서도 꼭 엄마랑 화장실 갔단 말이에요. 내가 응가를 못 닦아서요.”

“선생님, 저는 졸려요.” 어느 새 또 한 아이가 칭얼대고 있다.

그 와중에 어김없이 누군가의 보호자가 울리는 인터폰 소리가 난다. “선생님, 00이 데려 가려고 왔어요.”

유치원 교사, 로봇 체력이 필수조건?

한 쪽에서 아이들을 재우고, 다른 한 쪽에서 남은 아이들과 소그룹 활동을 하고 그 와중에 학부모가 데리러 온 아이들을 하교시켜야 하며, 간식 준비와 그 후 설거지까지 해야 했던 나는 정말 멀티 플레이어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오후가 되면 아이들은 좀 더 어리광이 늘고 요구 사항도 많아진다. 한 아이를 안아 달래면 저도 안아 달라고 서로 떼를 쓰고, 밀치고, 내 등 뒤로 타 오른다. 그때 누군가 볼 일 보는 것에 실수라도 하게 되면 엎친 데 덮친 격이 된다.

쉬는 시간도 따로 없는 유치원 생활은 아이들이 어리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을 안전 문제 때문에 더욱 긴장의 연속이었고, 덕분에 나는 일과 시간에 물도 잘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 순수하고 해맑은 아이들을 보는 생활이 좋지만 내 몸이 로봇의 체력을 갖지 못한 바에는 때론 한 아이 돌보는 일도 버거웠다.

구원군 등장, 할머니 선생님

5월을 넘기고 있을 무렵, 구원군이 생겼다. 바로 중고령 자원봉사자 할머니께서 우리 유치원에 배치된 것이다. ‘숨통이 트인다’라는 말 말고 더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물론 처음엔 배치된 할머니 선생님께서 우리 유치원 그것도 내 반 아이의 할머니시라는 사실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연세도 많으실테고 보는 눈도 있으실테니 내가 하는 말 하나 행동 하나에 모두 신경을 쓰실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기 때문이다.

아이들 뿐 아니라 유치원 교사도 할머니 선생님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였다. 우선 무엇보다도 좋은 점은 본인 손자들이 있는 유치원이라 청결 문제라면 가장 먼저 손을 걷고 나서 주신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손자들이 잠자고 뒹굴고 먹고 마시는 이곳이 지저분하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 때문에 날마다 쓸고 닦아주시는 것은 물론 식기세척과 빨래까지 도와주시니 큰 도움이 됐다.

또 살림의 베테랑이시다 보니 유치원 살림을 알뜰하게 하는 법도 알려 주시고,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웰빙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은 물론, 준비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요리활동에도 큰 도움을 주셨다.

마법을 부리는 할머니 선생님의 손놀림

우리 반은 1학기에 매주 금요일마다 요리 활동을 했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간단한 요리라 하더라도 아이들은 앞치마와 머리 수건까지 두르며 잔뜩 기대를 한다. 아이들이 많으니 소그룹으로 묶어 재료와 도구를 교체해 가면서 실습을 하다 보면 금세 주방에 일감이 산더미로 쌓인다.

그럴 때면 할머니 선생님의 날렵하신 손놀림이 마법을 부린다. 재료를 준비하는 일부터 능숙한 시범을 거쳐 뒷마무리까지 해주시는 할머니 선생님의 모습에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고 요리된 음식을 직접 한 입 먹여달라고 조르고 매달린다. 급식실에서 점심 먹기를 싫어하며 울던 아이도 종일반에 오면 할머니 선생님 덕에 뭐든 잘 먹는 아이가 된다.

텃밭을 가꿀 때의 일이었다. 고구마, 감자, 부추, 가지, 토마토 등을 심고 물을 주면서 아이들이 식물에 대해 여러 가지 것을 물었다. 나는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없어 농작물의 특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예기치 못한 질문을 해대는 아이들에게 쉽게 대답을 못 해주는 나의 옆에서 할머니 선생님이 해결사가 됐다.

“토마토 지지대는 이렇게 세워야 해.”
“부추는 이렇게 잘라 주어야 잘 크지.”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연신 할머니 선생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다 보니 척박했던 텃밭은 푸릇푸릇하게 잘 가꿔진 농장이 돼 있었다. 아이들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피었다. 어느덧 텃밭에 가는 것이 일과가 됐다. 아이들은 서로 물을 주겠다고 나서고, 말하지 않아도 풀을 뽑아 모은다. 이보다 좋은 산교육이 어디 있을까.

할머니 선생님, 경험의 힘 보여주다

또 한 번은 홍역이 돌던 때의 일이다. 아직 미혼인 나는 아이를 키워본 경험을 책에서 간접 체험했을 뿐이라 한계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반에 들어와 등이 자꾸 가렵다고 했다. 아이의 등을 보니 열꽃이 피어 있었다. 홍역이 유행이라는 안내문을 보긴 했지만 그것이 홍역 증세인지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 선생님의 도움을 요청했다.

“선생님, 이것 좀 봐 주세요.”
“에고~, 홍역이구만.”

아이를 여럿 키운 경험이 있으신 할머니 선생님은 한눈에 증세를 알아채셨고, 금세 모든 아이들의 몸을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셨다. 발빠른 조치 덕에 아이는 조기에 귀가해 병원에 갔고 그 아이의 학부모는 무척 고마워했다.

나는 유년기를 조부모님 품에서 보냈다. 늘 애지중지해 주시고, 아플 때는 만져주시고, 씻겨 주시고 먹여주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덕에 맞벌이 부모님에게 못 받았던 또 다른 큰 사랑을 얻었다. 핵가족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자라나는 아이에 비하면 복 받은 사람인 것이다.

“할머니 선생님,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 유치원 아이들은 할머니의 손길과 애정을 느끼며 자라고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할머니 선생님은 이제 없으면 안 될 큰 자리를 차지하는 구성원이 됐다. 작은 바람이 있다면 좀 더 재정이 확보돼 이런 좋은 경험을 보다 많은 수의 유치원과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유치원 아이들과 나는 하루 일과의 끝에 이렇게 말한다.
“할머니 선생님, 감사합니다.”
광주농성초등학교 병설유치원 종일반 담임 조윤재 (@) | 등록일 : 2007.11.07
출처 : 참여시민네트워크
글쓴이 : 김성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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