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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이 낙인이 되는 곳

강산21 2007. 10. 21. 19:20
교복이 낙인이 되는 곳
한겨레 | 기사입력 2007-10-21 16:21 | 최종수정 2007-10-21 16:30

[한겨레] ■ 비평준화 광명시 ‘고교서열화’에 멍드는 가슴

 

경기도 광명의 ㄱ중학교에 다니는 정지혜(15)양은 세계보건기구에서 일하는 게 꿈이다. 치료비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리던 지인의 모습을 목격한 뒤에 내린 결정이다. 하지만 지혜양은 꿈을 위한 준비를 미뤄두고 있었다. 일어, 중국어, 불어, 독어 등 배우고픈 언어가 많지만 자칫 내신 성적 관리에 구멍이 날까 겁이 나서다. “지역 명문고에 진학하려면 내신 성적 관리를 잘해야 해요. 공부 못한다고 손가락질 받는 학교 교복을 입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느 학교 교복을 입느냐가 고교 시절의 행복을 결정하는 곳, 광명시는 여전히 비평준화 지역이다.

 

비평준화는 사라졌는가. 1974년 고교평준화 제도가 도입된 지 30여년, 시행지역이 꾸준히 확대돼 왔지만 여전히 전체 중학교(2999개교)의 51.7%(1551개교)는 성적순으로 고교 배정을 받는 비평준화 제도의 적용을 받고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는 61만여 명의 학생들 가운데 30.4%(18만5981명)가 중3 수험생으로 ‘대입같은 고입’을 치러야만 하는 실정이다. 실제로 비평준화 지역인 경기도 광명시 청소년상담실이 중학생 72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72%가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답했다. 평균적으로 고교생 62%가 입시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데 비해 높은 수치다.

 

비평준화 지역 학생들이 겪는 ‘대학 입시보다 치열한 고교 입시’의 실체는 뭘까. 대선후보들이 교육 관련 공약을 내놓으면서 평준화 제도가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이 때, 2002년부터 시민들의 평준화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경기도 광명시에서 그 실체를 찾아봤다.

 

비평준화의 다른 이름은 ‘고교 서열화’였다. 광명에서 만난 학생, 학부모, 교사, 학원 관계자 모두 6개 공립 인문계고의 서열을 줄줄 읊었다. 광명의 한 아파트 단지 부녀회 사무실에서 만난 ‘광명시 평준화를 위한 학부모 연대’ 정미영(37) 사무국장은 “광명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자녀가 어떤 고교에 다니는지 묻지 않는 게 예의다”고 했다. 자녀가 어느 고교에 갔느냐에 따라 학부모들의 위상도 ‘서열화’되기 때문일까. 중3 학부모 이정희(45)씨는 “자녀가 일등 대접받는 학교에 다니는 부모들은 교복을 빨아도 사나흘 걸어 놓는다는 우스개소리도 유행한다”고 했다.

 

하위권 고교 무시 분위기… 입시학원서도 등록 거부

중3생 72% “입시 스트레스”… 고교생들보다 높아

 

특히 하위권 고교와 그 학교 재학생들에 대한 편견과 무시는 주홍글씨와 같은 ‘낙인’에 가까웠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김단영(12)양은 “친구들과 지나다가도 그 학교 교복을 입은 언니들을 보면 귓속말로 수군거리게 된다”며 “학교에서는 성적이 안좋은 친구들이 ‘그 학교 내가 찜했다’며 농담도 한다”고 했다. ‘그 학교’는 가장 하위에 속한다고 알려진 고교다. 학원들은 이런 학교 학생들의 등록을 꺼린다. 한 입시학원 원장은 “원칙적으로 어떤 학교 학생들은 우리 학원에 등록할 수 없다”며 “사교육기관은 공교육과 달리 입시 결과가 중요하기 때문에 교육 효과가 있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광명에서는 학교의 서열이 학교에 소속된 학생의 발전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일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사에게 무거운 고교 입시에 대한 부담을 떠안긴다. ㄱ중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이경수 교사는 “시험을 치른 뒤 0.5점 때문에 교사에게 따지는 아이들을 볼 때면 꼭 ‘교통사고 피해자’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고입 전형 총점 300점 중 1, 2, 3학년 내신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점으로, 연합고사 100점보다 크다. 학생들은 매시험마다 소수점 이하 점수까지 신경써야 할만큼 피가 마를 수밖에 없다. 대학 입시에 내신 반영 비율이 확대되면서 올해 고3 수험생이 겪은 고충을 비평준화 지역의 중학생들은 이미 겪고 있었던 셈이다.

 

광명의 중학교에서 벌어지는 내신 경쟁은 평준화 지역의 특목고 입시 열풍과 비슷한 양상이다. 하지만 특목고 입시는 일부 상위권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일이다. 제도 탓에 중하위권 학생들까지 ‘꼴등 학교’에 가지 않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비평준화 지역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3 학부모 한미주(44)씨는 “광명에서는 이사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상위권부터 하위권까지 어쩔 수 없이 고교 입시에 매달려야 한다”며 “능력있는 부모들은 고교 진학 전에 다 빠져나가는 것 같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아이한테 죄스럽다”고 했다.

 

“평준화 지역 중학생들은 수능이나 논술 대비하면서 폭넓게 공부하는데 우리는 단지 고등학교 들어가려고 이렇게 애쓰는 게 너무 아까워요.” 중3 수험생 계민지(15)양의 말이다. 학생들에게는 문이 좁은 ‘명문고’보다 성적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이 필요해 보인다. 교육문제의 해법을 고민하는 대선 후보들이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 고교평준화 도입 논란들 보니

평준화로 학력 떨어졌다던 울산

2년뒤 대입 합격자는 되레 늘어

 

고교평준화 제도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1974년 도입된 후 30년이 지났지만 전체 일반계고교의 40%(526개교)는 비평준화 지역에 속해 있는 사실이 이를 그대로 말해준다.


현재 평준화를 전 지역에서 실시하는 곳은 서울을 비롯해 부산 등 6개 광역시 그리고 제주도 뿐이다. 강원과 충남은 전 지역이 비평준화다. 이들 중 2000년 이후 지역이 자발적으로 고교평준화를 채택한 곳은 울산과 경기 7개 시를 포함해 모두 15곳이다.


평준화를 둘러싼 가장 대표적인 논란은 학력의 ‘하향평준화’ 가능성이다. 지난 2000년부터 고입제도를 평준화 체제로 바꾼 울산 지역에서 벌어진 논란이 가장 대표적이다. 2005년 11월 울산시 교육위 소속 김동규 위원이 시 교육청에 대한 행정사무감사에서 그 해 9월 울산 지역 일반고 학생들이 치른 수능 모의고사의 평균 점수를 문제삼았다. 인문계는 전국 평균보다 16.6점이 낮고 자연계는 7.2점이 낮게 나왔다는 게 이유였다. 특히 상위 30% 학생들의 평균이 전국 평균 보다 23.6점, 12.6점 낮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평준화로 인한 학력저하 현상이 기정사실화되는 듯했다.

 

“분석결과 학력저하 근거 없어”

그러나 울산 지역의 2007학년도 대학 입시 결과는 상반된 결과를 보여줬다. 올해 서울 지역 4년제 대학에 합격한 학생은 1413명으로 지난해 1250명보다 13% 늘어났다. 서울대 합격자는 5명이 줄어 62명에 그쳤으나, 연세대와 고려대 합격자는 153명으로 지난해 139명보다 10% 정도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오히려 ‘상향평준화’에 가깝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의뢰로 연세대 강상진 교수팀이 일반계고교 126곳 8588명을 분석한 결과도 평준화가 학력 저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이 연구에서 중소도시만을 비교 대상으로 했을 때, 평준화 지역의 학생이 비평준화 지역에 있는 학생보다 언어영역 6.79점이 높았다. 외국어 영역도 6.13점 높았다.

 

전교조 울산지부 조용식 사무국장은 “최근에는 중3이 치르는 연합고사 최하위 점수가 낮아졌다는 것을 근거로 평준화 제도를 공격한다”며 “학생들의 전반적인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연합고사 평균 점수가 필요한데 교육청이 공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사교육비 부담증가는 전국적 현상

‘사교육비 부담 증가’ 주장 역시 여전히 논란의 가운데에 있다. 2005년 울산에서 학력저하 논란이 일었을 때, 한국교원노동조합(한교조)은 2000년 평준화 실시 이후 3년만에 입시전문학원이 두 배 이상 증가한 것을 들어 평준화가 사교육비 부담을 크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울산 지역만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평준화, 비평준화를 가리지 않고 전국적인 사교육 확대 현상으로 풀이된다. 지난 8월 한국개발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1998년부터 2003년까지 가계의 사교육비 지출은 연평균 25%씩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광명시 평준화를 위한 시민연대 양두영 사무국장은 “학력 저하나 사교육비 부담 증가 등 평준화 관련 쟁점들은 연구 결과에 의해 모두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며 “이제 문제는 평준화 지정 권한을 가진 교육 당국자의 책임있는 자세”라고 했다. 현재 광명과 의정부, 안산 등 비평준화 지역 시민들은 경기도 교육감에게 ‘평준화 적합성’ 검사를 실시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양 사무국장은 “적합하지 않다는 결과가 나와도 수용하겠다는 입장이지만 도교육청은 움직임이 없다”고 했다.

 

■ 우리아이 입시 또 어떻게 바뀔지…

내가 찍을 대선후보, 어떤 복안 가졌나

 

유권자의 1/3은 학부모다. 2002년 대선 당시 유권자 비율을 보면 20대 23.2%, 30대 25.1%, 40대 22.4%, 50대 이상이 29.3%를 이룬다. 초중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의 연령이 30대 후반에서 40대라고 볼 때 교육 정책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학부모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30%를 차지하는 셈이다.


각 당이 대선 후보를 결정하면서 교육 관련 공약도 속속 발표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 아이 교육을 위해 어떤 복안을 갖고 있을까. 특히 논란이 되는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일까?

 

먼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선거 공약을 아우르는 대전제는 ‘사교육비 경감’이다. 그 방법 중에 일순위로 꼽히는 것이 학생이 자신의 적성과 흥미를 살려 진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고교를 신설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라는 공약이다. 이를 위해 농촌지역, 중소도시, 대도시 낙후지역에 150개 기숙형 공립고교를 지정하고 전문계 특성화 고교인 ‘마이스터 고교’ 50개를 육성하며 창의적인 교육을 위한 ‘자율형 사립고’ 100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겨난 300여개의 고교가 ‘명문고’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고교 평준화 정책의 근간이 흔들릴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 후보쪽은 “평준화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고 다양성과 수월성으로 보완하겠다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힌 상태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교육 공약은 “사교육비 해소, 공교육 강화, 차별없는 무상교육 실현”으로 압축된다. 특히 전국민의 교육 평등을 위해 고교평준화 정책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을 공교육 강화 정책의 핵심으로 꼽고 있다. 고교서열화와 학교 간 격차가 심각하다는 문제의식이 바탕이 됐다. 또한 본래의 설립 목적을 상실한 외고 및 자사고를 폐지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는 ‘생기 있는 학생, 활기찬 학교’를 위한 교육 관련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학생들의 행복권을 지켜주겠다’는 목표 아래 0살부터 고교까지 교육과 보육비를 국가가 전액 지원하는 무상교육 도입을 내걸었고, 국공립초교에 종일학교와 종일도서관을 개설한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고교평준화 정책에 대해 정 후보 쪽은 “고교평준화는 민주주의나 대통령제처럼 되돌릴 수 없는 흐름이 됐다”며 “대선후보들의 교육 공약을 둘러싼 논의에 있어 평준화는 더이상 쟁점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창조한국당(가칭) 문국현 후보는 공교육 강화의 방안으로 자율형 공립학교, 이른바 ‘차터 스쿨(charter school)’을 제시했다. 공립학교에 대한 국가의 투자를 강화해 자율적인 교과운영 등을 보장하고, 기존 자립형 사립고 못지 않은 공립고교 300개를 만들겠다는 생각이다. 평준화 정책에 대해서는 ‘상향 평준화’가 기본 방향이다. 학생 개인의 성적이 아닌 학교의 성적을 매기는 국가학력평가를 실시해 성적이 저조한 학교에 대해 맞춤형 지원이 가능하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민주당 이인제 후보 교육 공약은 상향식 평준화 교육, 수월성 교육, 특성화 교육을 병행 추구한다는 게 기본방향이다. 기존 평준화 제도에 대한 보완 성격이 강하다. 1학년은 국민공통교육과정을 이수하고 2학년부터 입시 교육과 특성화 교육으로 이원화한 새로운 인문계고 운영방안도 갖고 있다. 특목고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해 제도적으로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대선후보들의 교육 공약을 평가하고 보완하는 ‘교육대통령을 위한 국민의 선택’ 송인수 운영위원장은 “평준화를 허물겠다는 입장을 가진 후보는 없다”며 “다만 평준화 보완을 위해 내놓은 공약이 보완보다 폐지의 효과를 낼 수 있어 문제가 되는 상황”이라고 했다. 각 후보들의 ‘좋은 고교’ 만들기 움직임에 대해서는

 

“입시경쟁에 매몰되기 쉬운 사립고를 확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대안적 교육이 가능한 자율학교 등을 늘리는 것은 공교육 체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도 있다”고 했다.

진명선 기자 tora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