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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평준화는 사회혁명이었다

강산21 2007. 10. 29. 11:41

고교평준화는 사회혁명이었다

유시민 의원이 말하는 ‘뺑뺑이 1기생’

 

2007 10/30   뉴스메이커 747호

 

                                                                     [소풍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맨 왼쪽이 유시민 의원]           

나는 하교길에 붕어빵을 사먹고 있었다. 그때 그 노점 트랜지스터에서 ‘바로 그 뉴스’가 흘러나왔다. 서울에 이어 대구도 고교 입시 제도를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씹고 있던 붕어빵이 튀어나오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학교가 많이 몰려 있던 대구 신천 근처 하늘은 중학생들이 기쁨에 겨워 던져올린 검정색 모자로 까맣게 뒤덮였다.

 

1974년 3월 막바지 어느 날 어스름 무렵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3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뺑뺑이 1기생’이 되었다.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감 만끽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두 해 전에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간만 나면 축구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 그래도 당시에는 대구 변두리에 있었던 수성초등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대륜중학교에 배정되어 가보니 그게 아니었다. 알파벳도 모르고 들어간 중학교에서 내 성적은 400명 가운데 70등 정도였다. 사립학교나 대학부속 초등학교를 나온 아이들이 상위권을 휩쓸었다. 그때도 사교육과 교육 양극화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3이 되었을 때는 겨우 30등 안으로 들어왔다. 가정 형편상 과외는 고사하고 학원 단과반에 등록할 여유도 없었기에 혼자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잘 오르지 않았던 터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정 방문을 오신 담임선생님은 어머니에게 10등 정도만 더 올리면 경북고에 턱걸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 며칠 후에 고교입시 폐지 뉴스가 나왔다. 내게 그것은 ‘입시지옥으로부터의 해방’을 알리는 복음이었고, 그 해방감은 ‘감격과 환희’를 안겨주었다.

 

나는 ‘뺑뺑이 1기생’으로서 신생학교인 심인고등학교에 배정되었다. 그리고 첫 학기에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전교 1등’이라는 것을 했다. 대구의 내로라하는 명문고 선생님들에게서 영어·수학 그룹과외를 받는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상 처음 만들어진 ‘평준화 학교’는 사실 제대로 된 학교가 아니었다. 선생님들은 중상위권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강의했다. 공부를 아주 잘하는 학생들은 명문대학 본고사에 대비해 과외와 학원수업을 받았다. 학업 성취도가 떨어지는 학생은 대부분 학교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학교수업을 따라가기에 바빠서 별 불만이 없었던 나도 이제는 다른 상황에 놓였다. 다 아는 내용을 가르치는 학교수업이 시간 낭비로 느껴졌다. 그래서 수업시간에는 그 과목 참고서를 펴고 혼자 공부했다. 밤에 독서실에서 자습하느라 잠이 부족했기에 수업시간에 참 많이도 잤다. 학교는 불법적으로 특설반을 만들었고, 교육청은 그걸 알고도 눈감아주었다. 선생님들도 학생들도 나름의 마음고생을 한 것이다.


         [유시민 의원이 학창시절 상을 받는 모습] 
‘사교육 번창’ 현상은 평준화와 관계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평준화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시장이 커진 것은 국민소득이 증가하고 학부모들의 지불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고교입시를 되살리면 사교육 시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강남 논술과외 시장에서 활약하는 어느 후배의 말에 따르면, 서울과 경기도에서 제일 좋다는 외국어고와 과학고 학생들이, 그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나 들어간 후에나 변함없이, 고액과외를 제일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학생들이 교실에서 잠을 자는 소위 ‘교실 붕괴’도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33년 전 고교평준화가 처음 이루어졌을 때부터 있었으며, 아이들의 다양한 수준을 반영하지 못하는 획일적 강의가 진행되는 학교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명문고 학벌은 공정한 경쟁 저해

 

‘뺑뺑이 세대’의 비애를 체험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과거 소위 ‘일류고교’를 다녔지만 ‘일류대학’에 가지 못한 친구들은 ‘공부 잘한 선배들’에게서 엄청난 냉대를 받았다. 하지만 신생학교나 이른바 ‘따라지 학교’를 나와 ‘일류대학’을 간 친구들은 도움을 받을 만한 선배가 전혀 없었다.

 

모교인 심인고등학교 ‘뺑뺑이 1기’ 가운데 7명이 서울대를 갔는데, 그중 5명이 사회계열이었다. 문과에서 제일 인기 있던 사회계열 신입생 가운데 1%였다. 다음 해에는 무려 22명이 서울대에 합격했다. 내 모교는 그렇게 해서 대구의 ‘신흥 명문고’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대학생활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고교 인맥의 도움을 받은 일이 거의 없었고, 내가 후배들의 든든한 인맥이 되어준 적도 거의 없었다. 정치를 하면서 동문들의 신세를 지기는 했지만, 모교 동문들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작았다.


그런 면에서 고교평준화는 하나의 ‘사회혁명’이었다.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사회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을 일부 유지하고 있는 ‘명문고 학벌’을 해체했기 때문이다. 정부 중앙부처 국장급 이상 고위관료, 대기업의 주요 임원, 언론계와 학계, 법조계의 중견 원로 인사들, 정당과 국회의 거물급 정치인들,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주요한 공공 또는 민간 권력기관의 상층부는 아직도 서울과 지방의 명문고 학벌이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다.

 

학벌은 합리적 의사 결정을 방해하고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며 정실인사나 부당한 특권 특혜를 만들어내는 정당성 없는 권력이다. 앞으로 10년 정도만 더 지나면 이러한 명문고 학벌은 거의 완전히 사라질 전망이다.

                                                                                                   [오른쪽이 유시민 의원]                 

고교평준화를 폐지하고 명문고를 부활시키는 정책은 평준화가 몰고 온 ‘사회혁명’을 거꾸로 돌리게 될 것이다. 평준화 체제를 비판하는 분들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다. 평준화는 ‘수월성 교육’에 부적합한 면이 있다. OECD 회원국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를 비교평가하는 PISA 보고서를 보면, 우리가 뛰어난 재능과 학습의욕을 지닌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시 명문고를 만드는 게 바른 처방은 아니다. 그보다는 평준화 학교 안에 주요 과목을 다양한 수준으로 가르치는 강의를 개설해 학생들 스스로 선택하도록 하는 게 더 나은 대안이다. 선생님들에 대한 보상은 수강생 수에 따라 지급하면 된다.

 

경쟁과 평가 그리고 그에 따른 보상이라는 시장의 원리를 한사코 거부하는 교원단체가 태도를 바꾸기만 한다면 이것이 제일 좋은 해법이 될 수 있다. 지금은 고등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둔 ‘뺑뺑이 1기생’ 아버지의 체험적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