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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회폐단 따지는 ‘이계심’이 필요해

강산21 2008. 2. 2. 19:42

사회폐단 따지는 ‘이계심’이 필요해
* 이계심(조선시대 곡산의 백성)
한겨레
» 고금변증설
고금변증설/
 

다산 정약용은 1797년 황해도 곡산 부사로 발령이 난다. 당시 그는 승정원 동부승지로 있었다. 승정원 자리는 청직 중의 청직이고 요직 중의 요직이다. 임금을 가까이서 모시는 승지 자리에서 외직으로 나가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정약용을 외직으로 내보낸 것은 정조가 따로 궁리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다산은 정조의 지우를 입어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그의 재능과 출세를 시기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소인배들은 다산이 과거 서학을 공부했던 것을 꼬투리 삼아 기회가 있으면 다산을 공격하였다. 봄날 살얼음판을 디디듯 위태위태한 다산의 처지를 머리 좋은 정조가 모를 리 없다. 때마침 곡산 부사 자리가 비자, 다산을 그 자리로 보내며,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번에 올린 상소는 글이 좋고 마음씨가 밝았으니 쉽게 쓸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올려 쓰고 싶지만 이러쿵저러쿵 하는 소리가 많으니 왜 그런지 모르겠구나. 한두 해 늦더라도 해로울 것은 없다. 장차 부를 것이니 모쪼록 서운하다 생각하지 말거라.”

 

지난번 상소 운운하는 것은 바로 서학을 배운 데 대한 다산의 해명을 말한다. 서학을 빌미 삼는 소인배들의 사정권에서 다산을 빼내고자 하여, 정조는 다산을 외직으로 발령을 냈던 것이다. 그러고는 혹시라도 다산이 자신을 내치는 것으로 오해할까 생각해 신신한 당부를 마지않았던 것이다.

 

감읍한 다산은 곡산에 부임한다. 천재는 내직에 있을 때나 외직에 있을 때나 똑같이 능력을 발휘한다. 유능한 행정관 다산은 곡산의 민폐를 개혁하고 선정을 펼친다. 그런데 다산의 선정에 백성 한 사람의 이름이 끼어 있다. 이계심이란 사람이다. 다산 자신이 쓴 자찬 연보에 의하면, 이계심은 곡산 백성으로 ‘본성이 백성의 폐단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산 바로 앞의 곡산 부사 재임 중 교활한 아전이 포수의 보인에게 받는 군포의 대금으로 900냥을 징수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자자하였다. 원래 200냥이었으니, 900냥이면 네 배 반이다. 어찌 원망이 없겠는가. 이계심은 백성 1천여명을 이끌고 곡산 관아로 들어가 따지고 다투었다. 조선시대 관청 것들은 백성들 때려잡는 데 이골이 난 인간들이다. 익은 솜씨로 이계심을 잡아 꿇리고 매를 안기려 하자, 백성 1천명이 이계심을 에워쌌다. 아전과 관노가 몽둥이로 백성들을 마구 치자 백성들은 흩어졌고, 이계심 역시 섞여 달아났다. 수령은 감사에게 보고했고 마침내 체포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이계심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곡산 부사로 부임한 정약용의 선정 뒤에는 부당한 착취에 대해 백성과 함께 당당히 싸우는 이계심이 있었다. 이계심이 있었기에 다산은 곡성의 민폐를 개혁하고 민족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 졸업시즌에 학생들은 실업의 고통에 허덕이고 있다. 문제는 이를 사회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능력 문제로 보는 시선이다. 실업을 개인 탓으로 돌리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이계심이 되지 않는 한 실업은 영원할 것이다. 우리가 받고 있는 대부분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다산이 곡산 경내에 이르자 한 사내가 길을 막는다. 이계심이었다. 그는 백성을 병들게 하는 조항 10여 조를 쓴 문서를 갖고 있었다. 옆에 있던 아전이 그를 체포해 오라를 지우고 칼을 씌워 가자고 하였으나, 다산은 “그럴 필요가 없다. 자수한 사람이 어찌 달아나겠는가?” 하고 풀어준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덧붙인다. “관청이 부패하는 것은 백성이 자기 이익을 위해 폐단을 따지면서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억울함을 드러내어 항의했으니,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할 것이다.”

 

다산의 처사는 놀랍다. 보통 백성들의 저항이 일어나면 관에서는 저항의 이유에 설령 공감한다 해도 체제의 동요를 우려해 일벌백계의 의미로 주모자를 무거운 형벌에 처하는 것이 예사다. 어떤 농민 저항에도 예외가 없었다. 그런데 다산은 도리어 “너 같은 사람은 관청에서 천금을 들여서라도 사들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연 다산이다. 이계심을 석방한 뒤 다산은 문제가 된 세금을 공정하게 받았다. 백성들이 억울함을 풀고, 여론이 좋아졌음은 물론이다. 다산의 선정은 어디서 온 것인가. 또 다산은 어떻게 곡산 백성의 고통을 절절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아마도 이계심이 써서 바친 글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다산이라 하면 교과서에 실어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치고 국민 모두가 민족의 스승으로 떠받든다. 다산에 대해 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한데 어쭙잖은 생각이지만, 다산을 존경하는 것만큼이나 이계심과 같은 사람도 주목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가당치도 않은 착취에도 그저 입을 다물고 있거나, 부당한 권위를 맹종하여 홀로 웅얼웅얼 불평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당당히 싸우는 이계심이야말로 다산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람이 아닐까.

 

대학의 졸업시즌이 다가왔다. 졸업을 해도 많은 학생들은 학교를 벗어나지 않고 취업공부에 몰두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니 웰빙이니 명품이니 하는 말이 넘쳐나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 앞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이끌고 나가야 할 젊은이들은 실업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학 도서관은 오직 토익과 영어회화에 골몰하는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과연 이렇듯 개인의 능력을 기르기만 하면 실업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달리 생각해 보면, 실업은 개인의 능력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문제다. 풍요와 실업의 공존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 강명관의 고금변증설
문제는 실업을 사회문제로 보지 않고 개인의 능력문제로 돌리는 담론이 만연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은 늘 자신의 토익점수와 영어회화 실력이 낮다고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만약 모든 젊은이가 토익에 만점을 받고 영어회화에 능통해졌다고 하자. 그럼 모두에게 원하는 만족스런 일자리가 주어지겠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또다른 능력을 요구할 것이다. 실업을 개인의 능력문제로 돌리는 담론을 유포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이계심이 되지 않는 한 실업은 영원할 것이다. 어디 실업문제만 그러겠는가. 우리가 받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이 풀리지 않을 것이다.

 

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출처 : 참여시민네트워크
글쓴이 : 김성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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