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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전우섭목사 /인내·사랑·용서로 숱한 난관 극복

강산21 2007. 5. 23. 01:19
[역경의 열매] 전우섭 (1) “우섭이를 당신의 종으로…”

8월 한달 동안 서울 사랑의교회 권사회 주최로 다비타공동체를 돕기 위한 서양화가 박영 선생 초대전이 열렸다. 나는 후원 출품된 그림 22점이 모두 판매됐다는 사실보다 지난 17년간 펼쳐온 다비타 사역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이 생겼다는 사실이 눈물겹도록 감사했다. 내겐 그 17년이 참으로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자 하나님의 사랑과 기적을 체험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에 주소를 둔 우리 다비타공동체는 이 땅에서 소외된 성매매 여성,기지촌 여성,동성애자,에이즈 환자,이중문화 자녀들을 위한 쉼터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이곳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해가는 공동체로 교파에 관계 없이 복음과 선교,화해와 일치,고백과 순종,나눔과 섬김,노동과 청빈의 정신을 추구한다. 단체 이름은 사도행전 9장36절에 등장하는 ‘착한 일과 구제에 앞장서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인 다비타’에서 따온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변화시켜 일하게 만드시고 또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증거가 바로 ‘나’다. 세상에 묻혀 흘러가던 한 영혼을 깨뜨려 진정 이 땅의 낮고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한 사역에 헌신하도록 강권적으로 이끄셨다. 나는 참으로 거칠고 투박하며 힘들게 살아왔지만 성령의 강한 은혜가 나와 우리 다비타공동체를 한결같이 지켜주셨기에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올해 46세인 내 어린 시절은 목사였던 부친에 대한 반항심과 불량스러운 생활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다. 주로 달동네만 찾아다니며 교회 개척을 하신 아버님은 가정을 돌볼 경제적 능력이 없으셨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겨야 했다. 그러다가 초교 5학년 때 아버지가 시무하시던 교회가 갑자기 분열됐다. 거기에다 우리 가족은 사택을 내주고 말 그대로 길거리로 나앉았다. 어머니의 보따리장사로 끼니는 해결했지만 이때부터 고생은 더 심해졌다.

나를 반항아로 만든 것은 주위에서 걸핏하면 ‘목사 자식’이라고 평가하는 것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내가 목사 아들이란 것 때문에 힐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목사 아들이 그것밖에 못하냐?” “목사 자녀는 뭐든 모범이 돼야 해.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면 안되지.”

나는 그때마다 아버지가 목사지 내가 목사냐고 대들었고 혈기를 부렸다. 또 교인들의 이중적인 모습과 뒤에서 쑥덕거리며 정죄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신앙에 회의를 느꼈고 예배도 형식적으로 드리거나 빼먹기 일쑤였다. 이런 여러 가지 반감들이 나를 문제아로 만들었다. 나는 동네 패싸움에 빠지는 법이 없었고 ‘독사’란 별명처럼 싸움이 붙으면 끝까지 달려들어 항복을 받아냈다. 불량 친구도 많았고 중학교 때 이미 술과 담배를 입에 댔다.

우리 집안은 증조부 때부터 4대째 신앙을 이어온 뿌리 깊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초기 선교사에게 복음을 받아들였고 할아버님은 장로이셨다. 이런 집안에서 내 존재는 커다란 골칫덩어리였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불량 친구들과 어울리며 못된 짓을 일삼았다.

이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새벽마다 기도의 제단을 쌓는 분이 계셨다. 바로 어머니였다. 매일 새벽예배 시간이면 어머니의 낭랑한 기도 소리가 어김없이 들려왔다.

“하나님,우리 우섭이를 지켜주시고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섭이를 당신의 종으로,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옵소서.”


◇전우섭 목사 약력 △연세대,장신대대학원 졸업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상임대표 역임 △‘공동체론’ ‘성매매 여성의 사회 통합 연구’ 등 저서 다수 △다비타공동체 대표

[역경의 열매] 전우섭 (2) 고교때 주님영접후 모든것 달라져

나는 인문계 고교에 진학하지 못할 만큼 성적이 하위권이었지만 교육행정이 바뀌는 바람에 간신히 인문계 고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차츰 싫증났던 터라 부친이 목회하는 교회 학생부를 기웃거렸다.

이 무렵 아버지는 목회의 전환점을 맞으셨다. 강한 기도의 능력을 받으셨고 교회 내에 여러 기도 모임을 만드셨다. 교회 전체에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분위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이 뜨겁게 기도하고 방언까지 하는 것을 목격하고 놀랍다는 생각에 학생 기도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방언의 은사를 체험하게 되었다. 온몸이 떨리며 내 의지와 상관 없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한 언載?내 입을 통해 쉴새 없이 쏟아져나왔다.

신기하게 여기며 기도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던 어느 날,기도 중에 아주 희미하지만 이상한 음성이 내 마음 속에서 울려나왔다.

“너는 앞으로 소외된 곳에서 일하게 될 것이다. 이들 중에서도 특히 성(性)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마귀가 가져다주는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여겼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음성이 시간이 흘러 사실로 드러나면서 성령이 말씀해주셨음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며 이루시는 분이시다.

내가 교회생활에 열성을 보이자 그동안 사귀어왔던 불량 친구들은 저절로 떨어져나갔다. 나는 기도에 재미를 붙였다. 저녁마다 기도 모임에 참석했고 도봉산기도원 삼각산기도원 등에 산기도도 많이 다녔다. 기도생활을 열심히 하자 저절로 공부에도 최선을 다하게 됐다. 금방 우등생이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머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생활이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주님을 만나고 만나지 않고의 차이였다.

또 사회 정의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면서 힘 있는 자의 횡포,분배의 모순,부정부패 등이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사회 문제에 관심 있는 청년들과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몸으로 부딪치며 실천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보육원 빈민촌 철거촌 입양기관 등을 찾아다니며 일을 도왔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웃이 무척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보육원을 방문했다가 너무나 불쌍한 아이들을 보고 그 가운데 2명을 입양하겠다고 나섰다. 원장은 “고등학생이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며 “입양을 정 원한다면 부모님 동의서를 받아오라”고 했다. 결국 만류하는 부모님을 설득해 19세 나이에 두 아이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대학에 들어가려면 예비고사를 치러야 했다. 나는 이를 무난히 통과한 뒤 대학에도 합격했다. 부모님의 기쁨은 대단했다. 사람 구실을 못할 것 같았던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각종 사회문제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사회의 그늘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대변하는 일에 열심히 뛰어다녔다. 공부보다는 데모대에 합류하고,기득권층에 대해 무조건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이런 내게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다. 군입대였다. 논산훈련소를 거쳐 경기도 화천 육군 부대에 배치받았는데 여기서 다시 새로 창립된 특공연대로 차출됐다. 특수부대 성격을 띤 이곳에서는 매일 강도 높은 훈련이 이어졌다. 모두 고된 훈련으로 악에 받쳐 있었다. 이런 내게 엄청난 사고가 일어났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3) 행군중 큰 부상 기도로 완치

군대의 특수훈련 중에 산악행군이 포함돼 있었다.총과 배낭,무거운 철모를 쓰고 산비탈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일은 정말 고통스러웠다. 인내의 한계가 오자 내게 잠재돼 있던 옛 기질이 불쑥 튀어 나왔다. 철모와 배낭을 던지고 혈기를 부린 것이다. 그러자 고참이 건방지다며 곧장 발길질과 함께 개머리판으로 내 가슴을 내리쳤다.

나 역시 화가 나 있던 차여서 악을 쓰며 고참에게 곧바로 대들었다. 그런데 싸움이 본격화되려는 순간 내가 미끄러지면서 옆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5∼6m 이상되는 낭떠러지 밑은 날카로운 돌들이 솟아 있었다. 나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의무대에 의해 간신히 구조됐지만 내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강원도에서 진해 통합병원까지 긴급 후송됐다. 엄청난 통증을 느끼며 의사의 진단을 들었다.

“전 일병은 지금 팔뼈가 으스러져 버렸고 가슴에 상처가 깊고 갈비뼈도 여러곳 금이 갔습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고 심한 경우 팔을 절단할 수도 있습니다. 가슴 상처가 깊어 덧나면 생명이 위독합니다.”

군의관의 말투에서 졸병의 생명쯤은 우습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했다. 누가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면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된다고 했던가. 정말 명언이었다.

“하나님,저 군대에서 죽기 싫습니다. 어렸을 때 나쁜짓은 좀 했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에는 열심히 기도도 하고 봉사활동도 했지 않습니까. 살려주세요. 전 장가도 안갔잖아요. 병을 낫게 해주셔서 제대만 시켜주시면 어머니가 기도하신 대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나는 목사만은 절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렇게 위급한 상황이 되니 하나님께 기도하며 매달리고 있었다. 병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의 잘못을 회개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받아주셨다. 상처가 쉽게 아물어 수술도 하지 않아도 됐거니와 팔의 뼈도 정말 희안하게 제자리를 찾아 연결되어 붙었다. 나는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셨다는 기적을 몸으로 느꼈다. 목숨도 위태롭다던 내가 4개월만에 정상적인 몸으로 퇴원했다.

인간은 얼마나 간사하고 어리석은지 모른다. 이렇게 매달려 기도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건강해지니 그 간절했던 기도를 전부 잊어버렸다.

제대 후 내가 전공한 병리의학 인턴코스를 밟기 위해 국립의료기관에 다닐 때였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도 나는 주님을 잊은 채 동료들과 어울리며 쉽게 세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어느날 하나님은 내게 엄청난 사건을 통해 제2의 거듭남을 갖도록 이끄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하기 이를데 없다.

그날도 나는 병원 선배들과 술자리를 가지다가 한 선배가 이끄는 다른 술집으로 무조건 따라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곳은 즉석에서 성매매도 이루어지는 술집이었다. 유난히 어려보이는 한 소녀가 내 파트너가 되었다. 20살이라고 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됐을까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얼마후 선배들이 파트너를 데리고 사라졌고 둘만 남게 되었다.

나는 몇가지를 질문했으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그 소녀는 대화 자체를 꺼렸다. 그런데 그 소녀가 바로 나로 하여금 주님과 잃었던 끈을 다시 찾게 했으니 나의 특수목회 사명은 처음부터 남달랐던 셈이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4) 15세 소녀가 바꿔놓은 목회인생

나는 술집에서 만난 소녀에게 정말 믿기 힘든 과거를 들을 수 있었다. 실제 나이가 15세라고 밝힌 소녀는 너무나 가난한 집안에서 아버지에게 맞기만 하다가 가출해 결국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포주가 무조건 빚을 지워 성매매를 강요했고 이런 생활이 죽기보다 싫어 도망쳤으나 항상 붙잡혀 다시 끌려오곤 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꾸 도망치자 포주가 불에 달군 쇠젓가락으로 그녀의 팔과 등을 지졌다는 것이다.

중학교 3학년의 나이인 15세 소녀는 인생을 체념한 듯 얼굴에 전혀 표정이 없었다. 소녀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엄청난 분노가 솟구쳤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갑자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내면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바로 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귀를 의심했다. 고교시절 한창 기도할 때 들었던 느낌과 비슷했다.

“저는 부족한 신앙인입니다. 이들을 위해 사역을 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너는 이들의 아픔에 동참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이런 사람들을 많이 맡길 것이다. 아파하는 양떼들을 내게 데리고 오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할 것이다.”

이 음성을 들음과 동시에 갑자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나왔다. 그곳을 박차고 나온 나는 거리를 배회하며 그 소녀를 이렇게 만든 우리 사회를 저주하고 또 저주했다.

얼마를 울었을까. 나는 그 눈물이 그 소녀가 불쌍해 흘린 눈물이라기보다 나 스스로를 향한 회개의 눈물인 것을 깨달았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 주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것에 대한 회개이자 이제 주님이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눈물이었다. 이것은 결국 어머니의 나를 향한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 사건을 겪은 후 말할 수 없는 애통함이 전심을 휘감아 1주일 동안 호되게 아팠다. 웬일인지 눈물이 계속 흘려내렸다. 내가 죄인인 것과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슴 깊이 스며들며 끊임없이 눈물이 나왔던 것이다. 그리고 성령이 내게 말씀하셨던 사역의 비전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결국 손을 들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즉시 병원에 사표를 던지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했다. 나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매매 여성들을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가에 고민했다. 당시 관련 선교를 하는 분도 없었고 그 분야의 전문 선교단체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배울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을 내가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섭리를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었다. 아울러 서울 연신내에 있는 서부중앙교회에서 전도사로 교회학교와 중고등부를 맡아 사역했다.

그리고 미군기지가 있는 동두천의 경기여자기술학원을 소개 받아 주 1회 예배와 상담을 나가게 되었다.이곳은 성매매 여성들을 수용해 직업교육을 시키는 곳으로 웬만큼 마음을 강하게 먹지 않으면 그들에게 말조차 걸기 힘든 곳이었다. 사회에 불만이 많은 그녀들은 아주 거칠고 공격적이었다.

나는 상담을 통해 그들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두 많은 빚을 지고 있었으며 심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자포자기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약물 복용 및 알코올 중독자도 많았다. 나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기도하며 연구했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5) “아픔 함께” 동두천 기지촌으로

나는 먼저 전도보다 성매매 여성들의 아픔을 나눠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삶을 고통스러워하고 자학하는 그녀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 자체가 사치스러운 것임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라는 간판을 걸지 않고 쉼터 스타일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 무렵 동교동교회 음동성 목사,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사랑방공동체 정태일 목사,아바공동체 이윤식 목사 등 쟁쟁한 선배들과 공동체에 대해 밤새 토론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영향도 많이 받았다. 나는 적을 무찌르려면 적진으로 들어가야 하듯 가끔 찾아가는 선교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동두천 기지촌에 공동체를 만들어 본격적인 사역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서울올림픽으로 전국이 떠들썩하던 1988년 말. 나는 무작정 동두천 기지촌으로 향했다. 주머니에는 돈 10만원이 전부였다. 클럽과 음식점으로 흥청거리던 거리에서 그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방은 전혀 없었다. 어이없어 하는 중개인들의 표정을 뒤로 하고 거리를 헤매다 세놓는다는 쪽지가 붙어 있는 2층 집을 발견하고 무작정 들어갔다.

방 좀 보러왔다는 말에 주인은 몇 개나 필요하냐고 물었고 나는 어이없게도 많을수록 좋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방이 4개 있는데 모두 쓰라고 했다. 나는 그제서야 돈이 10만원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자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뭐 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다.

“이곳에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는 전도사입니다.”

“저도 교회에 다닙니다. 그럼 그 돈만 내시고 방을 모두 사용하세요. 귀한 일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고 싶네요.”

하나님은 준비하고 예비하시는 분이시다. 교회 집사인 주인 아저씨는 지금까지도 우리 사역의 든든한 후원자로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시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기적과 베풂의 손길이 있기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할 수 있는 것이다.

1989년 1월1일. 드디어 이 땅의 소외되고 고통 받는 여성들을 위한 다비타공동체가 문을 열었다. 나는 조그마한 방에 성화가 그려진 밥상을 펴고 가운데에 큰 성경책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매일 기도하며 묵상했다. 영감 넘치는 찬양을 24시간 틀어놓았다.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주위에서 어떤 도움도 없었기 때문에 가난한 나는 기도하며 그저 기다렸다. 내가 모든 것을 내려놓자 그때부터 하나님이 일하셨다.

나는 기지촌 여성들이 언제나 들어와서 쉴 수 있는 ‘평화의 방’을 가장 먼저 만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놀이방 공부방 상담실 등을 차례로 만들어나갔다. 그러나 이곳이 어떤 곳인지,무엇하는 곳인지 몰라 이용하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현장으로 무조건 뛰어들었다. 교회에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전혀 주지 않고 평범한 차림으로 성매매 업소에 들어가 성매매 여성들과 친하게 대화하면서 심심하면 공동체에 놀러오라고 말했다. 곧 의료팀이 오니 무료 검진도 받으라고 했고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조건 없이 나눠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예수 믿으라’는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쉼터가 있으니 그저 피곤하면 쉬러 오라고만 말했다.

그러나 주일예배에서는 그들을 위해 뜨겁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이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그 누구보다 필요합니다. 긍휼히 여기시고 당신의 살아 역사하심을 깨닫게 하옵소서.”
[역경의 열매] 전우섭 (6) 폭력배 위협에 두목 찾아가 단판

기지촌 여성들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고 다비타공동체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말 못할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고 주일에 함께 예배 드리는 인원도 조금씩 늘어났다.

기지촌 여성들은 미군과 1년 정도 동거하다가 헤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때론 미군 병사와 정이 들어 아이도 낳고 함께 미국에 들어갈 꿈에 부풀어 있는 여성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들은 막상 임기가 끝나면 아무 말 없이 혼자 귀국해버리거나 연락을 끊어 기지촌 여성들은 이중삼중의 상처를 입었다. 그들은 심한 배신감 때문에 약물이나 술에 절어 살다가 결국 폐인이 되곤 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나를 찾아왔다. 마음씨 착한 미군을 만나 새 출발을 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 미군이 빚을 모두 갚아주었는데 문제는 주인이 웃돈 500만원을 더 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 때문에 장사를 못했다는 것이 이유라는 것이었다. 당장 그곳을 나오고 싶은 데 갈 곳이 없다는 그녀를 위해 무작정 클럽을 찾아가 주인을 만났다.

내가 그 자매를 데려가겠다고 하자 주인은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어댔다. “당신이 뭔데 여기 와서 이러느냐”고 내게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다음 날 200만원을 만든 뒤 주인을 다시 찾아갔다.

“이게 제가 만들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제 그 자매에게 자유를 주십시오.”

“참 어이가 없구먼. 당신이 그렇게 말하니 내가 아주 나쁜 사람 같소. 좋소 나도 그년을 내보낼 테니 당신도 두 번 다시 이곳에 찾아오지 마시오.”

주인은 돈을 낚아채듯 받아쥔 뒤 탁자를 발로 쾅 차버리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그날부터 우리 다비타공동체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 미군 병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새 출발을 축하해주었다. 공동체의 사랑을 듬뿍 받은 그녀는 얼굴과 성격이 변하고 말투까지 변했다.

제법 기지촌 여성들이 공동체 교회에 많이 나오고 성경공부 모임도 활성화되던 어느 날이었다. 말 그대로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10여명이 불시에 공동체에 찾아와 나를 에워쌌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거나 협박을 하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형씨,조용히 이곳을 떠나시오. 왜냐고 묻지 말고 그냥 가시오. 우리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거요.”

그들은 난생 처음 보는 대형 사시미칼을 내 목과 옆구리에 갖다 댔다. 나도 싸움깨나 했지만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생각해보니 우리 공동체 때문에 기지촌 여성들이 늘 사먹던 히로뽕과 마리화나,대마초 등 각종 마약이 안 팔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매들은 수치심을 잊고 살을 빼기 위해 이 약들을 상용했던 것이다.

그들이 돌아간 뒤 한동안 멍해 있던 나는 ‘사역을 여기서 접어야 하는가’라는 나약한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결국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기도하자 담대함과 용기가 솟구쳤다.

나는 폭력배 두목을 찾아가 죽어도 이 일은 포기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나의 출연에 몹시 놀란 그들은 내가 사회운동을 해온 운동권 출신의 목사라는 것을 알자 의외로 기가 죽었다. 자신들도 부탁을 받아 나를 겁주었을 뿐이라며 너무 두드러지게 활동해 포주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나는 그들을 찾아갈 때 ‘죽으면 죽으리라’는 심정이었다. 하나님이 시키신 일인데 설마 죽기야 하겠느냐는 배짱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이 내게 기지촌에서 뿌리를 내리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눅 17:33)
 
[역경의 열매] 전우섭 (7) 신앙으로 이룬 가정… 짧은 시련

아내(손은수 사모)는 내가 전도사로 동두천에서 본격적으로 사역할 때 만났다. 나는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워낙 험난해 어떤 배우자가 함께 할 수 있을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혼기가 됐지만 겁이 나 데이트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선배 목사 한 분이 참한 자매를 소개시켜주겠다며 갑자기 커피숍으로 나오라고 했다. 내가 사양하자 마침 옆에 계시던 아버지가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전화기를 빼앗아 통화하시더니 덜컥 약속하고 앞장서서 커피숍으로 향하셨다.

평북 삭주가 고향인 부친은 월남한 뒤 충북 중원군 신니면이란 곳에 잠시 사셨는 데 그녀가 그곳 출신이었다. 그녀와 아버지가 신이 나서 고향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나는 멀뚱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누가 데이트하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부친은 평안도 특유의 사투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섭아,그만하면 됐다. 결혼해라.”

“아니 아버지 데이트도 안 해보고 무슨 결혼이에요?”

아버지는 그 자매가 신앙이 뜨거워 맘에 든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셨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동두천 사역 현장에 데리고 와 얼마나 힘들고 고생해야 하는 일인지 모두 보여주었다. 그녀가 질려서 나와 혼인을 포기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우섭씨,우리 빨리 결혼해요. 당신의 사역이 정말 하나님이 바라시는 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1989년 4월1일 많은 분의 축하 속에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아내의 내조와 도움으로 사역이 훨씬 쉬워졌고 효과도 커졌다. 그러나 아내는 아니었다. 공동체 식구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공동체 자매들은 따뜻한 사랑에 굶주려 있다가 조건 없이 나누어주는 나의 사랑에 만족해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결혼하고 아내가 들어오자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들이 받는 사랑을 빼앗긴다고 생각했는지 아내에게 무섭게 욕설하고 덤벼들기까지 했다. 아내는 여간 힘들어 하지 않았다. 더구나 우리 가족은 독립된 공간이 보장돼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살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더 심했을 것이다. 거기에다 재정적으로도 힘들어 아내의 패물도 다 팔아야 했다.

당시 우리는 지역 아이들의 탁아소 역할까지 했다. 하루종일 설거지하고 빨래해도 아무런 표시도 나지 않았다. 곱게 자란 외동딸인 아내도 결국 손을 들었다.

“여보,저도 이젠 지쳤어요. 돈 없어 살림이 힘든 건 괜찮아요. 일이 많은 것까지 참겠는데 정신적으로 시달리는 것은 못 참겠네요. 미안하지만 혼자 참고 인내하며 잘 해보세요.”

아내가 떠나간 날 나는 밤새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 욥의 심정과 같았다. 나는 이제 사역을 못하겠으니 이 일을 시키신 주님이 책임지시라고 떼를 쓰며 기도했다.

기도 응답은 이틀 만에 이뤄졌다. 장로이신 장인과 권사이신 장모가 아내의 손을 끌고 집으로 찾아오신 것이다. 일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정반대였다. 장인·장모님은 내 사역을 인정하시고 힘을 실어주셨다.

“전 목사님,앞으로 사모가 또 공동체를 떠나면 바로 전화주세요. 내가 전국을 다 뒤져서라도 데리고 올 테니까요. 그 대신 열심히 목회만 하세요. 만약 안 온다고 하면 부모와 자식간 인연을 끊겠습니다.”

이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되는 말씀인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 때문에 내가 이 사역을 펼쳐올 수 있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8) 미군클럽서 춤 배워 기지촌 여성 전도

나는 동두천 미군 기지촌 여성들과 대화하면서 그녀들의 마음에 음란의 영,탐심의 영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세계에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마치 마약 중독과 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족쇄가 된다는 것도 발견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답은 기도와 사랑을 쏟아내는 주님의 영권으로 부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수사역에 부름받은 이들이 단단히 무장하고 중보기도에 매달려야 한다. 어설프게 나섰다가는 오히려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나는 이곳 자매들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가 춤을 배우기로 했다. 미군클럽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전부다. 내가 클럽을 찾아가 춤을 춘다면 그들이 경계심을 풀고 이내 웃음을 터뜨린다. 양복 입고 점잖은 표정으로 “예수 믿으라”고 말씀을 전한다면 아마 물바가지를 안 뒤집어쓰면 다행일 것이다. 도를 넘지 않는 범위에서 이들과 비슷하게 웃고 행동할 때 마음 문이 열리고 전도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비타공동체에 부교역자가 오면 춤부터 가르쳤다. 황당해하면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 여긴 춤추는 것도 전도이자 영성이 될 수 있어. 괜히 난 이곳 사람들하고 다르다고 목에 힘을 주거나 경시하면 더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가 없어. 한없이 낮아진 사람들에겐 이보다 더 낮아져야지 뭐가 돼도 되는 거라고.”

나는 클럽을 찾아가 아가씨들에게 주스를 한 잔씩 사주면서 슬슬 이야기를 유도한다. 이때 옆에 있는 전도사는 재빨리 신상기록 카드를 만든다. 이렇게 어느 정도 신상이 파악되면 한 사람씩 놓고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화이트 데이나 생일,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찾아가 생일 케이크를 자르고 선물을 주면서 위로했다. 이렇게 서너 차례 하다 보면 감격의 눈물을 보이게 되고 다비타공동체 주일예배 시간을 먼저 물어왔다. ‘교회에 오라’고 하는 것보다 스스로 오겠다고 만드는 방법이 내겐 훨씬 쉬웠다.

많은 사람이 성매매 여성들을 터부시하고 고개를 돌린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고 여긴다. 불쌍하게 여길 뿐 그들을 애통해하고 사랑으로 전도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안된다고 미리 결론을 지어버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인간도 차별 없이 사랑하시고 구원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원하신다. 그 사명은 결국 주님의 거룩한 영으로 성화된 우리 크리스천이 맡아야 할 몫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거룩한 영, 성령에 취해 이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기 좋은 것,쉬운 것,폼 나는 것만을 해서는 안된다. 작은 일로 생색을 내서도 안된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가?

매년 고난주간에 다비타공동체에서는 두 가지 행사를 준비한다. 첫번째는 예수께서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것을 기념하는 세족식과 성 금요일에 고난의 십자가 행진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곳 주민과 기지촌 여성들에게 축제 같은 행사를 보여줌으로써 예수의 존재에 대해 한번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하자는 의도였다.

내가 발을 씻겨줄 때마다 자매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본다. 섬김의 본이 결국 사랑을 낳는 것이다. 로마 병사와 비슷한 차림으로 직접 채찍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독생자 예수,고난과 부활의 사건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9) 3년 내리 수해 “주여 왜 이런 고통을”

기지촌 사역이 점차 결실을 맺어가던 1999년 8월 초였다. 다비타공동체가 점차 선교 영역을 넓히고 있는 가운데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를 만났다. 비가 좀 많이 온다고 생각했는데 공동체의 한 자매가 내게 큰 소리로 외쳤다.

“목사님.우리 건물이 침수되고 있어요. 어서 피하세요.”

빗물이 다비타공동체 1층으로 걷잡을 수없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식구들은 급하게 몸만 빠져 나왔다. 멀리서 집이 잠기는 것을 바라보아야 했던 우리는 임시 수용소인 여자고등학교로 몸을 피했다. 가져온 게 아무 것도 없어 배고픔으로 하루 내내 떨고 있는데 적십자사에서 담요와 생수,컵라면을 나눠주었다. 수재민들과 줄을 서서 컵라면을 받으며 참으로 허탈했다. 지금까지 수재민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다가 직접 그 처지가 되고 보니 이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다. 기도 중에 이런 깨달음이 왔다.

‘우섭아. 뭐든지 그 아픔과 슬픔을 직접 느껴보지 않고는 그 고통을 만난 사람을 진정으로 위로해 주지 못하는 법이란다. 네가 만난 이 어려움을 통해 고통을 나누고 선교하는 방법을 배워라.’

물이 빠진 뒤 집으로 돌아가보니 모든 가전제품과 가재도구가 흙탕물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피해금액이 무려 7400여만원에 달했다. 암담하고 가슴이 미어졌지만 우리의 대안은 기도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정을 알게 된 많은 교회와 여러 곳에서 성금과 사랑의 손길,복구자원봉사단이 답지했다. 6개월여 만에 우리 공동체는 더 좋은 것들로 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우리는 수해를 계속 만나 비슷한 피해를 봤다. 비라면 진저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항의하듯 따졌다.

“하나님. 당신의 일을 하는 우리에게 왜 이런 고통을 3넌이나 연속으로 주시는 겁니까. 복을 주시지는 못할망정 왜 이런 아픔을 만나야 되는 것입니까”

이번에도 하나님은 깨달음으로 응답을 주셨다.

‘우섭아. 수해를 통해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웠느냐. 아무리 인간이 잘났다고 고개를 쳐들고 으스대도 자연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자연을 누가 섭리하고 운행하느냐. 너는 더욱 겸손히 나만 바라보고 내 안에서 감사와 기쁨을 느껴라.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지키고 힘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고통을 겪은 만큼 더 하나님의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기지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이중문화 자녀들,바로 혼혈아들이다. 이들은 탄생하는 순간 이미 험난한 삶을 예고받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단일 민족이라는 의식과 혈통과 족보를 따지는 유교문화가 어우러져 혼혈인들이 설 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사역 범위를 이 혼혈아들을 돌보는 데까지 확대했다. 얼마 전 미식축구선수인 하인스 워드가 한국을 방문하면서 혼혈인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지만 그전까지 이들에 대한 사회의 시선은 아주 냉담했다. 나는 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데 주력했다.

“너는 동양과 서양의 장점을 모두 가진 우수한 사람이야. 혼혈은 우성끼리 장점을 갖도록 태어나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너는 어떤 어려움도 헤쳐 나갈 수 있단다.”

나는 여러 기독단체들과 손잡고 혼혈아들이 정체성을 찾고 미국으로 입양되도록 주선했다. 또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시키는 데 최선을 다했다. 수많은 혼혈아들이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하며 생활하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주 안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길 기도한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10) 윤금이 사건 축소 ·은폐에 분노

다비타공동체 사역을 해나가던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언론에서도 크게 보도됐던 이른바 ‘윤금이양 살해사건’이다.

1992년 10월28일. 당시 우리 공동체에서 생활하던 윤금이(당시 26세)씨가 자신의 방안에서 잔인하게 살해된 것이다. 금이씨가 살해됐다는 한 자매의 말을 듣고 달려갔더니 차마 인간이 그렇게 잔인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가정형편 때문에 기지촌까지 흘러들어왔지만 순진하고 예뻤다. 우리와 함께 지내며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꽃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친구와 예전에 일하던 클럽에 놀러갔다가 그녀를 살해한 미군을 만나게 되었다. 싫다는 그녀를 집에까지 쫓아온 그는 강제로 성폭행을 하려 했고 반항하자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안 미군측과 한국 경찰은 사체 부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이틀만에 금이씨를 화장시켰고 피해보상금 60만원으로 무마하려고 했다. 범인인 케네스 마이클 이병도 붙잡았으나 주한미군지위협정에 따라 신병을 미군범죄수사단에 넘겨주고 말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미2사단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었으며 지역 택시기사들은 ‘미군 안 태우기 운동’을 벌였다. 나는 내가 본 현장과 그렇게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범인을 데려가버린 미군측의 어이없는 행위를 자세히 적은 보고서를 서울의 인권단체들에 나누어주었다. 곧바로 40여 사회단체들이 참여한 가운데 ‘윤금이양 사건에 대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됐고 내가 상임대표를 맡았다.

내가 일을 추진하다보니 미국의 눈치만 보는 연약한 한국 정부는 그저 시간만 벌자는 태도였다. 우리는 당장 마이클 이병을 인도받아 한국법에 따라 재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지쳐갔다. 미군이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있는데 그 까짓 사건 하나로 우호관계가 금이 가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많았다. 상인들도 장사에 방해가 된다며 미군 타도 시위 중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더 이상 힘의 논리에 희생되어서는 안됩니다. 힘들더라도 여기서 주저앉지 맙시다.”

윤금이양 사건은 2년을 끌었고 결국 여론에 밀린 미군은 범인을 우리 법정에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정 공방 끝에 15년형을 선고 받았고 현재 마이클 이병은 한국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윤금이양 사건을 처리하면서 깊은 좌절감을 맛봤다. 몰이해와 무관심의 벽이 높았기 때문이다. 교회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수많은 교회가 있고 훌륭한 목사님들이 많지만 정말 성경 속에 등장하는 ‘강도 만난 이웃’을 보면 고개를 돌리는 교회가 더 많았다. 홍보가 되고 자랑이 되는 곳에는 달려가지만 빛도 없고 소문도 나지 않으면 외면하는 게 현실이었다.

나는 교회에서 설교할 때 항상 이 부분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일을 한다고 하면서 실상은 인간을 보고 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해보라고 권면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데도 인간이 좋아하는 일만 잔뜩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잘했다고 고개를 세우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다.

지금 강도 만난 이웃이 누구인지 한 번 뒤돌아보길 부탁한다. 그리고 조건없이,대가없이,칭찬과 우쭐함없이 감싸안고 사랑을 나누기를 부탁드린다. 주고 나누고 베푼 것은 즉시 잊어버리고 새로 도와야할 곳만을 생각해야 한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11) 국내 첫 에이즈감염자 쉼터 개소

1994년 3월 어느 날. 40대 남자가 전화를 걸어와 대뜸 이렇게 말했다.

“전 목사님이 소외된 자들의 인권을 위해 열심히 일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용기를 내어 전화했습니다. 저는 에이즈 감염자인데 저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역을 해주시면 안될까요?”

나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라 머뭇거리다가 전화를 끊었는데 그 남자가 며칠 후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성매매 여성들을 위한 쉼터 외에 에이즈 환자들을 위한 쉼터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고 이들과 함께 사역하다가 에이즈에 감염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도 앞섰다.

20년 경력의 요리사인 그는 술을 마신 뒤 몇 차례 사창가를 찾았는데 거기서 감염된 것 같다며 담당 부서 공무원이 자신을 찾아와 알려줄 때 하늘이 노랗게 보였다고 고백했다. 아직은 증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았지만 무섭다고 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모이면 힘이 될까 해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겠다고 한 뒤 그를 돌려보내고 기도를 시작했다. 그런데 눈을 감고 기도하는 순간 주님이 바로 응답하셨다.

“가장 낮은 곳에서 진정 아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해라. 내가 바로 네게 그 사명을 준 것을 잊었느냐?”

주님의 명령은 가장 빨리 실행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그해 6월 첫 주일에 대한민국 최초로 에이즈 감염자들의 쉼터를 개원하고 그 이름을 ‘희망 나눔터’로 정했다. 개원하는 데는 ‘에이즈 박사’란 별명까지 얻은 주혜란 박사의 관심과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의 안식과 자활,신앙생활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10여명이 모였는데 나중에 32명까지 인원이 늘어났다. 그리고 1년 뒤에는 ‘벼랑에 선 사람들’이란 책자도 내고 ‘에이즈와의 전쟁 선포식’도 가졌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지역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에이즈 환자가 드나들면 동네 집값이 떨어지고 이미지가 나빠져 장사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하기야 병원에서도 에이즈 감염자를 보면 피하기 바빴으니 주민들이 항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주민들은 내게 심한 욕설을 섞어가며 무조건적인 폐쇄를 요구했다. 건달을 보내기도 하고 와서 기물을 부수기도 했다. 이번에는 아주 끈질겼고 양보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달리다 못한 나는 결국 숨어야 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들었다. 서울 근교 기도원을 찾아다니며 기도에 몰입했다. 그때마다 들려오는 응답은 똑같았다.

“어차피 네 사역은 험난한 가시밭길이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어떻게 일을 하느냐.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라.”

또 한번 ‘죽으면 죽으리라’는 깡이 살아났다. 나는 하나님이 보호해주지 않으셨다면 군대에서 사고로,공동체에서는 폭력배들에게 몇 번이나 맞아죽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지금까지 많은 열매를 맺어오지 않았는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에 대한 신뢰만 있다면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나는 두려움을 내던지고 집으로 돌아와 당당하게 맞섰다. 이제 누구와도 맞설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강해지자 상대가 약해졌다. 이것이 바로 영적 싸움의 결과임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하나님의 보살피심에 감사하며 사역에 더 헌신할 것을 다짐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역 보너스를 내게 하나 더 얹어주셨다. 에이즈 환자 쉼터를 만든 내게 이번에는 성적 소수자,즉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바이섹슈얼 안드로지니 등 내가 몰랐던 이들까지 보내주신 것이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12) 인내·사랑·용서로 숱한 난관 극복

이번에는 게이라고 자기 신분을 밝힌 분이 동성애자들을 위한 쉼터와 예배 프로그램을 요청해왔다. 나는 일이 너무 많아 그 사역은 맡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모든 사역은 하나님이 힘을 주시고 여건을 만들어 주시는 것인데 인간인 내가 함부로 판단하고 결정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 결국 하나님은 그것도 다비타공동체의 사역임을 깨닫게 하셨다. 1996년 11월 마지막 주에 ‘로뎀나무 그늘’이란 크리스천 동성애자 모임이 만들어졌다. 이 역시 국내 최초였다.

자신의 성에 대한 정체성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 이들은 정말 안타깝고 불쌍한 존재들이다. 문제는 사회가 이들을 정죄의 대상으로 본다는 ?있다. 이들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독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로 우리와 똑같이 사랑 받아야 할 대상이다. 편견을 버리고 더 따뜻하게 대해줘야 한다. 이런 성적 소수자들은 다양한 치유 방법을 통해 회복될 수 있다. 이들에게 주님을 더 뜨겁게 만나게 해줘야 한다.

그들을 위한 사역이 본격화되면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내부적으로 서로 갈등하고 싸우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다독거리고 참을 수 있었다. 문제는 외부의 공격이었다. 나는 한국동성애자단체협의회가 창립된다는 것을 알고 집회에 찾아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언론에서는 내가 그 집회에 참석한 것을 흥미 위주로 보도했다. 개신교 목사가 동성애자들을 옹호하고 인정한다는 시각으로 해석했다.

언론은 내가 그동안 그들을 상대로 사역해왔던 것은 전혀 도외시하고 일방적으로 매도했다. 또 교회와 신앙인들도 나를 비판했는데 정도가 더 심했다.

“동성애는 창조 질서에 대한 도전이며 하나님의 형상 파괴입니다. 이들을 인정하는 것은 교회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봐주고 보호해줌으로써 도대체 몇 명이나 구원시키고 변하게 했느냐고 따지듯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구원과 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제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받은 사명은 이들을 잘 돌보고 사랑하는 것,바로 거기까지입니다. 그 다음은 주님의 영역입니다. 몇 명이 구원됐느냐보다 얼마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들에게 실천했느냐가 제겐 더 소중한 과제입니다.”

물론 나도 성매매자 에이즈 환자 동성애자 마약·약물중독자들에게 그것이 죄임을 가르치고 지적한다. 그러나 결코 정죄를 위한 정죄는 하지 않는다. 내게는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이들의 아픔이 그대로 전달되는 애통함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서 누구를 정죄할 수 있을까.

그동안 공동체 사역을 하면서 숱한 문제와 어려움에 봉착했었다. 그럴 때 다급해 하고 걱정하며 스스로 해결하겠다고 나서면 해결되기보다는 더 악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평안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오히려 문제가 쉽게 풀렸다. 그 열쇠는 오직 인내와 사랑,용서다.

1998년 1월,개척교회만 세워 목회하셨던 아버님이 소천하셨다. 아버님은 내게 세 가지를 유언하셨다. 당신이 30년 동안 사용했던 목사 가운을 내게 선물로 주겠다는 것과 장례예배 이름을 ‘천국 환송 축하 기념 예배’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또 모든 장기를 세브란스병원에 조건 없이 기증하셨다. 아버지와 나는 서로 급한 성격 때문에 많이 부딪쳤지만 평생 외길로 지켜오신 아버지의 신본주의 목회철학은 무엇보다 내게 큰 유산이 되었다.

[역경의 열매] 전우섭 (13·끝) ‘나’ 를 포기해야 진정한 공동체

나는 이 다비타공동체를 시작하면서 순교한다는 각오로 4가지 서류를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만을 하겠다는 다짐의 유서와 안구 등 시신기증서약서,평생 내 재산을 갖지 않겠다는 무소유 서약서,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는 신앙고백을 담은 서약서였다. 나는 이 4가지 서약서를 늘 양복에 넣고 다니며 내가 흔들릴 때마다 꺼내서 보곤 했다.

나는 신앙인들이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싫어한다. 입으로는 천사의 말을 하지만 행동은 세상을 쫓는다. 신앙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신앙이다. 고상한 척 이곳에 위문을 와서 에이즈환자,동성애자를 만나면 기절할 듯 놀라는 분들을 많이 본다. 자아가 죽고 생각이 죽고 고집도 죽고 성격도 죽어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를 4대째 믿어온 우리 집안의 표어이자 우리 공동체의 표어는 ‘십자가를 지고 가라’이다.

예수님은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셨다. 예수가 만난 대다수의 사람들이 죄인들과 힘없고 고통받는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자기 것이 많이 있을 때 나누는 것은 생색이다. 오히려 부족할 때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인생을 걸어야 한다.

많은 분들이 공동체 개념을 물어온다.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을 궁금해 한다. 물론 여기도 갈등과 분열,아픔이 있다. 그러나 공동체는 먼저 나보다 수준이 낮거나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운데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지는 것이다.

또 매일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의 욕망,나의 뜻,나의 행동,나의 물질 등을 매일매일 매순간 포기해 나가는 것이다. 나를 텅비워 둘 때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영이 채워지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적인 능력과 권세가 있더라도 세속적 욕망을 놓지 못하면 참자유,참해방을 얻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매일 십자가에 못박아야 하는 것이다. 나는 항상 식구들에게 이렇게 강조한다.

“공동체는 복지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수입니다. 영적 삶과 기름부음,은사가 없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그리고 부단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24시간 매일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사역해온 다비타공동체 17년의 사역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지만 동시에 영광의 길이기도 했다. 이 일에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고 뽑힘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의 거창한 계획이나 비전보다 내게 주어진 사명을 주님께 순종하며 최선을 다하는데 더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얼마전 사랑의교회 권사님들이 화가이신 박영 선생님의 작품 22점을 기증받아 전시회를 열어주셨다. 작품이 모두 팔려 우리가 새로 건축하고자 하는 다비타공동체 건축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현재 2개 건물 200여평의 자치 건물을 신축 중인데 이곳으로 옮기면 우리의 사역이 훨씬 더 커질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꼭 필요한 일이라면 반드시 채워주신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다비타공동체는 기지촌여성,성매매여성,에이즈감염자,마약·알코올중독자,성적소수자,가출청소년들을 위한 사역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오갈 데 없어 이곳을 거쳐간 공동체 식구는 대략만 잡아도 2000명이 넘는다. 너무 사역이 힘들어 두 손을 들려고 하다간 결국 다시 무릎을 꿇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앞으로도 내게 주어진 길을 어떤 상황이라도 이기며 사명을 다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끝으로 여러분의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다(다비타공동체 tabitha.or.kr·031-861-0955).

정리=김무정 기자 k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