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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 학살 안락사 인종차별…맹목적 과학숭배가 낳은 재앙

강산21 2006. 6. 15. 23:47

우생학 (優生學, eugenics)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우생학은 서구 사회에 지우기 힘든 흔적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우생학에는 ‘사이비과학’의 요소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이를 탄탄한 근거를 가진 과학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에 대한 믿음이 컸던 만큼 우생학이 가져오는 사회적 해악에 대해서 이들은 무관심했다. 이런 무관심 속에 미국은 차별적인 이민법을 통과시켰고, 서구의 각국은 “사회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로 수백만 명을 ‘거세’했으며, 독일 나치 정권은 장애인, 유태인 등 소수자를 무차별 학살했다. 우생학이 가져온 재앙은 사회와 정책이 과학을 무조건적으로 신봉하고, 또 과학자들이 권력의 정치적 요구에 맹목적으로 순종했을 때 그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던 비극이었다.

과학이 정치적 요구에 순종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에서 생존경쟁을 통한 자연선택이 생물 종의 진화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자, 사회 개혁가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진화의 생존경쟁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에 게으른 사람들이 소멸되는 것이 자연법칙의 순리라고 강조하면서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을 역행하고 그 결과 ‘허약한 성질’을 퍼뜨리는 국가의 사회복지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우생학은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났다. 우생학을 나타내는 영어 eugenics는 well(잘난, 좋은, 우월한)의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eu와 born(태생)의 의미를 지닌 genos의 합성어였으며, 따라서 eugenics는 글자 그대로 ‘잘난 태생에 대한 학문’(wellborn science)을 의미했다.

우생학이라는 단어를 만든 사람은 다윈의 사촌인 생물통계학자 프랜시스 갈톤이었다. 갈톤은 초기에는 “몇 세대에 걸쳐 결혼을 신중하게 함으로써 천재를 배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주장을 폈는데, 후기에는 “평균 이하 월급을 받는 사람들의 자녀 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부정적 우생학을 강조했다. 갈톤의 노력에 힘입어 영국에서는 1904년에 “국립 우생학 연구소”가 설립되었고, 곧이어 우생학교육학회와 학회지가 창간되었다.

독일의 우생학은 인종 위생학(Rassenhygiene)이라고 불렸다. 독일의 인종 위생학의 시조는 19세기 독일의 생리학자 솰마이어와 플로에츠였다. 이들은 당시 독일이 외국과 전쟁을 겪으면서 ‘국가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한 청년들은 전장에서 전사하고, 징집에서 면제된 약자가 고향에서 살아남아 2세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생학자들은 조만간 독일에 알코올중독자와 신체허약자만 남겠다고 한탄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생학이 허약자와 병자의 생식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의 우생학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의 전면에 부상했다. 독일 우생학자들은 혼전 건강검사를 의무화하고 보건증을 교환하는 보건정책 운동을 시작했으며, 아리안 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드러냈다. 몇몇 우생학자들은 독일 민족이 미래 지향적이고, 강인하며, 인내심이 많고, 철학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제일 우수하다고 설파했다. 이런 주장은 나치즘의 골간을 형성하는 데에도 중요한 몫을 담당했는데,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우생학의 주장을 나치즘의 핵심 원리로 <나의 투쟁>에 포함시켰다.

19세기 ‘잘난 태생에 대한 학문’ 태동
독일민족 우수성 강변 나치즘의 젖줄 구실
건강한 다음세대 위해 ‘가치 없는 삶’ 말살
미 의회 ‘IQ 낮은’ 아시아·아프리카 이민 제한
‘가난·무능력은 유전’ 기득권 보호논리로 악용


독일 우생학은 나치당이 정권을 잡으면서 가속화되었다. 1932년 프러시아 정부는 우생학 프로그램을 실시해서 ‘부적격자’를 자발적으로 거세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그 다음 해에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에는 강제 규정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는 30만 명의 허약자들이 거세 당했다.

우생학자들은 불치병을 앓거나 정신병자, 백치, 정신박약자, 불구아동의 삶을 “살 가치 없는 삶”으로 구분한 뒤에, 국가가 이들을 안락사 시킬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이렇게 시작된 유아 안락사는 대규모 학살의 전주곡이었는데, 나치 정권은 1940~41년 사이에 약 7만 명의 정신병환자들을 살해한 것을 시작으로 결국에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과 기타 “바람직하지 않은 성향”을 지닌 사람들을 제거했다.

미국의 우생학은 거세법의 통과와 인종차별적인 이민법을 가져왔다.

우생학기록국의 찰스 대번포트와 같은 우생학자들은 정신박약자와 같은 사람을 거세해야 한다고 오랫동안 주장했는데, 인디아나주는 1907년에 처음으로 정신병자, 백치, 강간범을 거세하는 거세법을 통과시켰다. 곧바로 이 법을 통과시킨 주는 1931년까지 30개로 늘어났다. 거세법은 미국에 한정된 것만도 아니었다. 독일은 1932~33년에,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주는 1933년에,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는 1934년에, 핀란드는 1935년에 같은 법을 통과시켰다.

“이탈이아인의 범죄형”

미국 우생학의 또 다른 특징은 인종차별주의와의 결합이었다. 대번포드는, 폴란드인은 배타적이고, 이탈리아인은 범죄형이라고 주장하던 인종차별주의자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생학자들은 생물학적으로 열등한 인종의 이민이 앵글로색슨의 미국을 위협한다고 역설했다. 이들은 동유럽, 유태인, 아시아, 아프리카로부터의 이민자들이 열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민자들의 낮은 아이큐를 공개했는데, 이는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들에게 영어로 아이큐 테스트를 했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의회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 앵글로색슨민족의 이민을 독려하고 대신 유태인이나 동유럽, 아시아나 아프리카 민족의 이민을 제한하는 존슨이민법(1924)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당시에는 미국 우생학의 승리로 간주되었지만, 지금은 사이비과학이 낳은 가장 대표적인 폐해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우생학자들은 가난이 열성 인자로부터 나오며, 이들의 무능력은 유전적인 것이기 때문에 개선될 수 없고, 따라서 오직 거세와 같은 우생학의 방법이 이를 해결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가정의 문제는 교육과 같은 사회적인 요소를 무시하고 사람들의 사회적 조건을 모두 유전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우생학의 주장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데 인색했던 지배계급이 선호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생학은 보통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와 친화성이 많다. 또 우생학은 “인간의 삶이 공동체나 전체 인류를 위해 도움이 될 때에 한해서 가치가 있다”고 강조하는데, 이것은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을 희생해야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강령과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개인의 권리와 행복이 ‘전체’의 이름으로 희생당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폐해다.

개인 권리 행복 짓뭉갠 폭력

사람들이 똑똑하고 건강한 자식을 원하듯이 한 사회가 똑똑하고 건강한 다음 세대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욕구로 보인다. 그래서 우생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우생학의 이론과 의도는 좋지만 거세나 인종청소 같은 실천 방안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생학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항상 강제적인 법령, 물리적인 구금과 강제적인 수술, 대중 선전, 특정한 사회 그룹의 희생, 정상과 비정상의 엄격한 구분과 유지가 필요했다는 것을 간과한 생각이다. 우생학은 항상 폭력을 동반했고, 20세기의 역사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홍성욱 ㅣ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과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