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해 지는 연습 재수할때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 형편이 어려워 방한칸짜리 방에서 다섯식구가 잠을 자야 되었지요. 저와 함께 재수하던 친구는 너무나 가난하여 낮에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재수를하였답니다.. 함께 교회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기 위해 수중에 있는 돈을 탈탈 터니 친구와 나 합쳐서육백원 나왔지요 종종 애용하던 분식집 즉석 떡복이 일인분이 오백원 이었는데 라면사리를 주문해서 둘이 먹으면 한끼 식사는거뜬히 해결할수 가 있었답니다. 하지만 라면사리는 삼백원!1 도합 팔백원이어서 수중에 돈이 모자랐지만 그때 삼양라면은 시중에서백원에 팔았기에 라면하나를 몰래 사들고 가 떡볶이 일인분을 시켜놓고 즉석떡볶이가 나오면 라면을 얼른 집어넣었지요. 그때육백원이 우리에게 주는 포만감하면서 친구와 나는 무척이나 행복해 하며 배부르게 즉석떡복이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중에 우리가 대학들어가고 나서 졸업후 취칙하게 되면 그때는 우리 피자 한번 먹자" 물론 그후 우리는 피자뿐 아니라 여러다양한 음식을 사먹을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요. 하지만 가난할때 맘을 함께 나눈 친구라서 그런지 그 친구는 지금도 저에게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지요.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물질을 서로 나누고... 이러한 기쁨은 지금껏 체험한기쁨중에서 가장 큰 기쁨이지요. 그래서 였나 봅니다. 남들은 가난하게되면 그러한 가난이 지긋지긋하게 싫어진다고 하는데...저는 왠일이였는지 그때 가난함이 주는 신비로운 기쁨의 맛에 그 어린 나이?에 주님께 '가난하게 살고 싶습니다. 가난한 이와 함께 살아갈수 있도록 저에게 가난을 주십시요'라고 기도를 드렸지요. 하지만 취업후 그러한 가난의 맛?은 점차 잃어가고 있었지요. 물론 가난한 이들을 위해 후원은하였지만 저절로 자동이체에서 빠져나가게 하고 ... 그들에 대한 애닯은 맘으로 하지는못하였지요. 그리고 저에겐 그래도 어느정도 넉넉한 돈이었기에 물질을 위해선 거의 기도를 하지않았지요. 얼마전 급여가 일당으로 환산하게 됨에 따라 줄어들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화가났지요. 그래두 나름대로 남들이 알아주건 말건 나눔운동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는데... 억울했다고나 할까요? 게다가 일에대한역량과 권한도 예전보다 훨 줄어든것 같아 여러모로 맘이 편하지를 않았지요. 자꾸만 수동적으로 되어가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되고... 급기야는 딱히 갈데도 없는제가 때려 쳐부리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주님께 묻고 있지요. 이러한 일들을통해서 주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그리고 제가 깨달아야 될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한달 약 40여만원 정도받는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용할까 고민하며 예산을 세우는데... 참 이상하지요? 이상하게도 내 맘 아득한 곳에서 그동안 잊었던가난의 맛과 즐거움이 퐁퐁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낄수가 있었지요. 가난한 이웃,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 별반 이들에 대한아픔이 옅어져 갈즈음 이제는 가슴으로 돕고싶은 마음을 찾아간다고나 할까요? 오늘밤 전화가 왔지요. 이젠 까마득한 후배인 제가다니던 대학의 서클 CCC 의 01학번의 낯선 자매로 부터... 사랑방을 마련할려고 하는데 후원해 달라고 하는 내용의전화였지요. 넘넘 반가왔어요. 이렇게 모르는 선배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조차 심리적으로 무척이나 어려웠을텐데... 돕고싶었지요. 잃어버릴뻔 했던 가난을 통한 물질과 맘의 나눔의 기쁨을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싶은... 지난번찾아가는 통일교육을 할때 한 친구가 저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졌어요 " 우리나라에는 가난한 친구들이 많은데 왜 북한동포들을 도와야되나고..." 그때 전 이렇게 답하였지요. - life153.com 모닝커피에서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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