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푸른 소나무처럼 초등학교에 갈 나이가 되어도 집에 있어야 했던 나는 아침마다 언니 오빠들이 각자 학교와 직장을 향해집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 우울해졌다. '난 언제 학교에 다닐 수 있을까`….' 나는 세 살 무렵부터 언어 장애와 불편한 신체를갖게 되었다. 부모님은 안타까운 나머지 나를 감싸고만 키우셔서 나는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한 동네 아저씨의 소개로 장애인 학교에 들어가게되었다. 꿈에 그리던 공부를 하게 되어 기뻤지만, 생전 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 모든 일을 혼자 감당하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오뉴월에도 감기를 앓을 만큼 몸이 약했던 나는 몸이 아파 꼼짝 못하고 누워 있는 날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 몰래 울음을 삼키곤 했다.하지만 차츰 홀로 서는 법을 배우며 공부벌레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학업에 최선을 다하다 보니 어느새 2년이 금방 흘러가 버렸다. 배움의즐거움을 알게 된 나는 선생님의 권유로 컴퓨터를 배우기로 했다. 그러나 컴퓨터 학원에서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원장선생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울면서 떼를 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뒤 며칠 동안 슬픔과 서러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지내던 나는 다시 마음을다졌다. '복희야,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어쩌면 너는 남들보다 몇 십 번, 아니 몇 백 번 다시 일어서는 연습을 해야 할지몰라. 그래도 결코 포기하지 말자. 넌 할 수 있어.' 마침내 전화번호부를 뒤져 알아본 끝에 한 컴퓨터 학원에서 배우러 오라는연락이 왔다. 순간 나는 말할 수 없이 기뻤다. 다른 사람보다 배우는 속도는 느렸지만 조금씩 실력이 늘자 아버지는 큰돈을 들여 컴퓨터를 장만해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학원에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교문 앞에 이르러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느닷없이 승용차가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더니 나를 치고 달아났다.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나는 급히 근처 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장애인이라서 수술하기가 까다롭고위험하다며 입원을 거부당했다. 다른 병원 응급실로 가서 겨우 수술을 받았는데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몸 때문에 수술 부위가 좀처럼 아물지않았다. 꿰매면 또 터져서 여섯 번이나 꿰매야 했다. 바쁜 농사일 때문에 잠깐씩 다녀가시는 엄마 외엔 나를 간호해 줄 사람이 없어나의 병원 생활은 많이 쓸쓸했다. 특히 밤에는 극심한 통증을 견디기 힘들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고 또 울었다. 그땐 정말 너무 힘들어 삶의끈을 놓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그렇게 한 달 남짓 병원 생활을 하고 퇴원한 나는 다시 학교로 갔다. 그런데 5학년에 다니던어느 날이었다.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늦게 학교로 다시 갈 무렵 엄마가 그만 논두렁에서 미끄러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엄마를하루 종일 간호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간호하겠다고 나서자 온 식구들이 펄쩍 뛰었다. 나는 오빠 언니들에게 간절히 부탁했다. "엄마는 이 못난 자식 때문에 평생을 피눈물로 살아오셨어. 이제 내가 조그만 효도를 해드리고 싶어. 자신 있으니 제발 엄마를간호하게 해줘." 결국 가족들은 내가 하기 힘든 일은 도와 주기로 하고 승낙했다. 하지만 병실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첫날엔엄마의 대변을 받아서 겨우겨우 한 발을 떼는 내 걸음걸이로 화장실로 갔는데, 청소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기가 막힌 듯 엄마를 찾아왔다."아니, 아주머니는 간호할 사람이 그렇게도 없수. 저런 아이가 어떻게 간호를 한다고…." 그리고 계속 심한 말이 이어졌다. 그 날 나는 몹시속상해 하시는 엄마를 붙들고 제발 집으로 보내지 말라고 울며 매달렸다. 엄마는 그런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참고 계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마음을 더욱 단단히 먹었다.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이 날 보고 쑥덕거리고 비웃는 듯한 눈길이 느껴져도오히려 엄마를 불쌍하게 보는 것 같아 괴로웠지만 나는 꿋꿋이 참아냈다. '엄마, 저는요, 엄마의 은혜를 평생 갚아도 백분의 일도못 갚을 거예요. 제가 몸이 성하다면 더 잘 해드릴 수 있을 텐데….' 다행히 엄마는 건강이 많이 회복되어 두 달 가까이 지내던병원 생활을 끝내고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 즈음 나는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언니들한테는 물론, 설거지를 하러 가면 아주머니들께 "효녀왔네?"라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괜히 부끄러웠다. 어느덧 나는 스물한 살이라는 나이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게되었다. 그즈음 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시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에 차라리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기술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작가가 되려는 꿈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기로 결심하고, 어렵게 일반 중학교로 옮겨 지금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이제 얼마 있으면 지금까지 내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준 셋째언니가 결혼할 것 같다. 계속 언니 곁에 있고 싶지만 기쁘게 보내주리라 맘먹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며 늘 푸른 소나무처럼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나의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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