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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총선보다 중요하다

강산21 2006. 3. 3. 13:43
외국에서는 … 블레어 집권에 큰 몫 일본서도 참여 확산
지방선거, 총선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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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페스토의 출발점은 1834년 영국이다. 당시 로버트 필 보수당 당수가 이 개념을 처음 제시했다. 그는 "겉만 번지르르한 공약으로 순간의 환심을 살 순 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한다"며 구체화된 공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 후 1997년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매니페스토를 제시해 집권에 성공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블레어는 '25세 미만 청년 25만 명 고용' '5~7세 아동 학급 규모 30인 이하로 축소' '향후 2년간은 현재의 지출제한 틀을 넘지 않겠다'는 등의 세밀한 공약을 내걸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유권자 호응을 얻은 보다 큰 이유는 공약 하나하나에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안을 포함시킨 데 있었다. 그는 학급 규모를 줄이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키 위해 1억8000만 파운드가 드는 엘리트 교육제도를 단계적으로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또 일정 규모 이상의 이익을 낸 기업들에 추가로 세금을 거둬 청년 실업자를 25만 명 줄이겠다고 했다. 블레어의 매니페스토는 상당수 유권자의 마음을 노동당 쪽으로 움직이게 했다는 평가다. 이후 영국에선 '총선 전 2년여에 걸친 매니페스토 작성과 발표→선거와 당선(집권)→매니페스토 이행 여부 평가→차기 선거용 매니페스토 작성'으로 이어지는 순환구조가 일반화됐다. 언론도 각 정당이 내놓은 매니페스토를 비교.분석해 유권자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매니페스토가 꽃피우고 있다. 2003년 지방선거에서 이를 기치로 내건 정치 신인들이 곳곳에서 절대 열세라던 판세를 뒤집으면서 주목을 받았다. 14명 중 7명이 현지사로 당선됐다. 이후 매니페스토를 중심으로 한 각종 네트워크들이 생겨나면서 크게 확산되기 시작했다. 단체장들은 '매니페스토 단체장 연맹'을, 지방의원들은 '매니페스토 의원 연맹'을, 시민단체들은 지역별 '매니페스토 추진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2004년에는 전국 규모의 첫 매니페스토 검증대회가 열렸다. 제대로 된 공약을 내걸지 않는 정치인은 발붙일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돼 갔다.

결국 민주당에 이어 고이즈미 총리의 자민당이 같은 해 합류를 결정, 지방선거에서 시작된 운동이 국회의원(참.중의원) 선거로까지 확산됐다. 일본의 매니페스토 운동은 선거전에 내용의 적절성을 검증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당선 후 후보자가 실제로 매니페스토를 실천하는지까지 검증하고 있다. 2003년 지방선거에서 10개 항의 매니페스토를 제시한 일본 이누야마(犬山)시의 이시다 (石田)시장은 취임 1년 뒤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행정개혁추진위에 매니페스토 평가작업을 맡겼다. 점수는 ▶목적 달성도▶사업 효과도▶효율성▶실행 가능성 등 네 가지 기준에 따라 매겨졌다. 문화도시 건설 차원에서 추진한 시 제례(祭禮) 복원사업은 진척도와 효율성을 인정받아 100점 만점에 80점이란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건립장소조차 확정짓지 못한 쓰레기처리장 건설 공약은 낙제점(40점)을 받았다. 고분 정비공약은 67점, 초등학교 학급당 학생 수를 30명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은 73점으로 중간치였다. 이 내용은 2005년 3월 관보에 그대로 게재됐다. 매니페스토에 대한 일본의 평가는 이렇게 시험점수처럼 정교하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건 후보자 시절 워낙 구체적인 공약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국회 이현출 입법정보연구관은 "이 운동이 한국 정치개혁에 결정적인 공헌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승욱 기자 <s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