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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의 기적

강산21 2006. 2. 3. 11:15
[순수영화 · 소설 자존심 지켜준다] 1만의 기적

영화 ‘메종 드 히미코’ 만명 돌파
영화관객 만명은 손익분기점
소설 만부, 작가 최저생계비 
 

 

지난달 24일, 카바레와 같은 건물에서 ‘동거’하고 있는 낙원동의 예술영화 전문 상영관 필름 포럼(구 허리우드 극장). 영화진흥위원회가 4억 원을 지원해 만든 개성적인 로맨스코미디 ‘달려라 장미’의 시사회를 막 끝낸 김응수 감독이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소박한 꿈이 하나 있습니다. 남들은 1000만 관객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정말 1만 명만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것도 요즘 현실에선 기적이겠지만.”


 

‘만 명의 기적’. ‘왕의 남자’가 1000만 명을 바라보고 코미디 ‘투사부일체’는 개봉 2주 만에 400만 명 운운하는 충무로에서, 소심하게 ‘만 명’이라니. 하지만 ‘예술’ 혹은 ‘다양성’(이런 단어는 영화흥행에서는 분명 핸디캡이다)이라는 수식어로 관객을 만나는 ‘비(非) 상업영화’에게 관객 ‘만 명’이라는 숫자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처럼 견고하다.

 

백두대간, 동숭아트센터, 스폰지 등 3대 예술영화 전문 수입·배급사가 지난 해 상영한 30여 편의 작품 중 1만 명을 넘긴 영화는 ‘토니 타키타니’ 등 겨우 4편(상영관 5개 이하 기준)이었다. (표 참조)


 

동인문학상 대산문학상 등 국내의 대표적인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 김연수의 소박한 꿈 역시 ‘안정적인 만 부 작가’다. ‘?빠이 이상’(1만1000부·2001년),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1만6000부·2002년)는 만 부를 넘겼지만, 지난해 8월 출간된 그의 최근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는 아직 8000부 수준. 오락상품처럼 수십만 부 가 팔려나가는 상업소설도 없는 건 아니지만, 순수문학 작가에게 1만부는 쉽게 넘기 힘든 고지(高地).

지난해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창비 등 3대 순수문학 전문 출판사들이 출간한 35종의 소설(장편·단편집 포함) 중에서 ‘만 명의 기적’을 이뤄낸 책은 1/3에 불과한 12편이었다(표 참조).


 

영화건 소설이건 ‘만 명’이라는 의미가


상업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관객 1만 명이 든다고 해 봤자 영화사에 돌아가는 총수입액은 3000만원 정도이고, 1만부의 인세(10%) 수입은 1000만원에 불과하다. 동숭아트센터의 정유정 대리는 “1만명은 홍보에 거의 돈을 들이지 않고 수입 외화를 개봉했을 때, 손익분기점을 겨우 맞추는 스코어”라고 했다.


 

이런 현실에서 창작자들에게 ‘만 명’이라는 숫자는 예술적 자존심이며, 그들의 작업이 ‘지적 마스터베이션’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이다. 소설가 김연수는 “만 부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 작가의 독자가 문학 내부의 이너서클을 벗어나 문학 바깥의 독자들에게도 소비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라면서 “개인적으로는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글을 재생산할 수 있는 작가들의 최저생계비 수준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예술영화를 ‘봐야’ 하고, 순수문학을 ‘읽어야’ 한다는 구호처럼 공허한 주장은 없을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집단적 계몽’의 당위성은 시효를 다한 지 오래이고, 관객과 독자들은 실뿌리처럼 갈라진 취향으로 각각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교양을 갈망하는 문화소비자들은 늘 존재하는 법. 원론적이지만 중요한 것은 좋은 작품과 합리적인 배급으로 이들의 허기를 채워주는 일일 것이다.


 

‘왕의 남자 800만명 돌파’ 못지 않게 놀라운 소식 하나가 설 연휴가 끝나고 들려왔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사랑받았던 이누도 잇신 감독의 신작 ‘메종 드 히미코’가 1월 26일 개봉 이후 5개의 극장에서 5일 동안 1만 248명의 관객을 돌파했다는 것. 설연휴 같은 기간 397개의 극장에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에 버금가는 성적이다. 2006년 ‘만 명의 기적’은 이미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