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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자연스런 가르침

강산21 2001. 5. 24. 10:52
경비아저씨 토니의 크리스마스이브새벽에겪은한일화
자연의자연스런 가르침


박호성 - 서강대 정외과 교수이며 정치사상을 전공했습니다. 저서로는 <평등론>과 수상집<인간적인 것과의 재회> 등을 펴냈습니다. 현재는 캐나다 밴쿠버 대학 객원교수로 있습니다.

여기 캐나다에는 울창한자연밖에 없다. 우리나라 같으면 험상궂은 군 초소가 버티고 서 있을 자리에, 전망용 벤치가 놓여 있다. 헌데 풍성한 자연과 함께 산 이들보다오히려 우리가 자연을 더욱 가까운 벗처럼 생각해 오지 않았던가. ‘코카 콜라’나 ‘달나라 로케트’가 아니라 ‘숭늉’이나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한 마리’,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훨씬 더 푸근하게 아우러지는 우리의 오랜 가락이 아닌가.
한때 나는 당차게도 ‘자연’을 사고팔아 눈깜짝할 새 일확천금을 벌겠다는 황홀한 꿈을 꾼 적이 있었다. 20대 후반, 유학 자금을 손수 마련하리라는 고귀한 환상을 품고 나는 조그만 화원을하나 만들어 나무 장사를 시작한 적이 있었다. 정원 기사들과 함께 시골까지 가서 나무를 뿌리째 파서 옮겨오기도 하고, 이따금 정원공사도 하고,또 비닐하우스 속에서 화분을 키워 팔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추운 겨울날 결국 일이 터져버렸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키우던 관엽 식물이,아홉 날 동안 정성껏 난방을 잘 해주다가 딱 하룻밤 불을 꺼뜨린 탓에, 몽땅 죽어버린 것이다. 우리 인간도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홉개를 잘해주다가 하나만 잘 못해도 온갖 욕설을 다 퍼붓지 않는가. 일확천금을 꿈꾸다 나는 결국 자연의 매를 맞았던 것이다. 물론 한 푼도 벌지는못했지만 나는 그 일로 인해 많은 것을 배웠다. 꽃을 사랑한다면서 그 꽃을 꺾어 꽃병에 갖다 꽂는 존재가 인간이며, 그리고 그 꽃이 시들면,그걸 여지없이 뽑아다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게 또한 인간 아닌가. 목이 탈 때 사람은 샘을 찾는다. 그러나 목을 축이고 나면 금세 샘에 등을돌린다. 황금 접시에 담았던 귤이라도 과즙을 짜내면 즉시 시궁창에 내던지지 않는가. 어쨌든 항문으로는 썩은 냄새를 내뱉으면서도 코로는 황홀한향기만 맡고 싶어 안달하는 존재가 인간 아닌가. 가령 출근하면서 현관문을 잠글 때는 이게 열리면 어쩌나 하고 속을 태우지만, 퇴근해 돌아와 그걸열 때는 거꾸로 이게 열리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걱정하는 딱한 주제가 바로 우리들 아니겠는가.
자연과 나의 첫 만남은 애절함으로 끝났다.초등학교 하급 학년 시절 내 성적은 밑바닥을 맴돌았다. 6·25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얻어먹는 일이 하도 막막한 탓에, 학교를 서너 달씩결석해야 했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고 물론 좋게 해석해줄 수도 있다. 여하튼 내 기억으로는 60여 명의 학급에서 57, 8등을거뜬히 쟁탈했으니, 특히 내 모친의 절망감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나를 간곡히 부르시더니 다음 학년 올라가서 제일 꼭대기몇 등까지 올라가면, 내 소원 하나를 꼭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약속 준수’야말로 우리 집 가훈 아닌가.
나는 아연 긴장했다. 얼마나환상적인 제안인가. 그러나 나에게는, 제기랄, 기적이 필요했다. 밑바닥에서 정상 부근까지가 얼마나 까마득한 길인가. 나는 예수님의 제자처럼 빌고또 빌었다. 내 간곡한 기도로 하늘도 뭉클했던지 결국 날 도왔다. 어느 날 나는 자격을 당당히 쟁취한 것이다. 학교에서 집까지가 왜 그렇게도먼지, 나는 로마 병정처럼 달렸다.
그때 우리는 여러 가난뱅이 살림집이 한데 뒤엉켜 비좁은 울타리 안에서 북적거리며 살고 있었다. 나는엄숙히 내 소원을 털어놓았다. 한 뼘도 안 되는 어두컴컴한 마당 한 구석을 가리키며, 저기다 꽃을 심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것이다. 갖고 싶은 게억수로 많았는데, 왜 하필 그놈의 꽃이 떠올랐는지….
꽃집이 어찌나 눈에 뜨이지 않았던지, 어머니와 나는 밤새껏 여기저기를 찾아다녔다.한참을 뒤진 끝에 가까스로 꽃을 사긴 샀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와 끙끙거리며 땅을 팠다. 그리고 좁고 어두운 마당 한 구석에 그 꽃들을 가지런히심었다.
다음 날 새벽 내 두 눈은 보초처럼 일찍 떠졌다. 그리곤 숨가쁘게 마당으로 내달음질쳤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밤새 집중폭격이라도 당한 듯 꽃이 죄다 말라 비틀어져 있는 게 아닌가! 몰사한 것이다.
그 시절 우리에게 우아한 꽃에 관한 나무젓가락 만한교양이라도 있었겠는가. 우리는 시장 어디에선가 병에 꽂는 꺾꽂이 꽃을 한 아름 사다가, 땅에 점잖게 심어놓은 것이다. 그 꽃들은 다만 임자를잘못 만난 죄로 애꿎은 타살만 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공들여 구한 아름다운 꽃이 메말라 죽자, 나는 그걸 뽑아내 주저 없이 쓰레기더미에처박아버렸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가장 모질게 버림받는 순간이었다.

월간 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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