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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

강산21 2005. 12. 24. 12:45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

(이승우/소설가,조선대학교 교수)



잎이 다 떨어진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몇 알의 주홍색 감만큼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것도 없다. 색채 때문이기도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가난한 나뭇가지에 마련된 너그러움과 나눔의 정서를 읽는다. 다 따내지 않고 남겨두는 것은 식량이 넘쳐나서가 아니라 추워지고 눈이 내리면 먹이를 구하지 못할 날짐승들을 위한 배려이다. 까치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나눔과 포기의 윤리감각>

근면은 자본주의 시대의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부지런해야 하고 성실해야 한다고 배웠다. 자기 성취를 위해서도 그렇고 공동체에의 기여를 위해서도 그렇다. 우리는 근면과 성실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 물론 이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근면보다 더 큰 덕목이 있다. 우리의 부지런함이 타인의 몫을 빼앗기 위한 부지런함이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각성은, 오늘날과 같은 초경쟁시대에는 매우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혹시라도 나의 부지런함이 타인의 몫을 빼앗는 쪽으로 기능하지는 않는지 늘 경계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에서 생활할 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식구 수대로 하루치 식량만 챙기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남보다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이거나 미래를 대비하려는 마음 때문에 그 지시를 어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컨대 어떤이들이 하루치 식량 이상의 만나를 거둔 것이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았다. 또한 여호와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징벌을 받아야 했다. 누군가 내일치 식량을 위해 욕심을 부린다면 다른 누군가 오늘치 식량을 얻지 못해 굶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규정은 지켜져야 했다. 그들의 신이 하루치의 만나를 준 것은 은혜였다. 그러나 하루치의 식량만 거두라는 것은 법이었다. 은혜는 누려야 하고 법은 지켜야 한다. 문제는 대체로 하루치의 식량(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을 탐내는 데서 발생한다. 우리가 탐내는 일용할 양식 이상의 것, 그것은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이다.

우리는 제로섬(zero-sum)의 원칙에 대해 알고 있다. 누군가 이득을 보면 누군가 손해를 본다. 무엇이든 한쪽으로 편중되는 것은 나쁘다. 권력도 그렇고 부도 그렇다. 예를 들면 독과점. 한 업체가 시장의 몇 퍼센트 이상을 점유할 수 없다는 규정은 아마 최소한의 강제 조항일 것이다. 자동차부터 휴지까지, 큰 기업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손대는 것은 소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점에서 윤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한 가수가 연말에 시상하는 각 방송사의 각종 상을 휩쓰는 모습도 보기 좋지 않고, 한 탤런트가 이 드라마 저 드라마, 이 광고 저 광고 겹치기 출연하는 모습도 보기 좋지 않다.

이렇게 말하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쏟은 땀과 노력의 결실을 폄하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면, 게으름뱅이들에게 공연한 핑계거리를 제공해 준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면의 가치에 대한 무시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수 있는 정도의 높은 윤리감각의 제안이다. 적어도 우리의 지나친 경쟁심이나 출세에의 의지가 탐욕의 수단이 되거나 타인의 몫을 빼앗는 행위를 호도하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작용하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추수할 때 밭 모퉁이의 곡식을 남겨 두어야 하고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와 고아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며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신명기 24:20-21) 이 구절에 의하면, 추수할 때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두어야 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의무였다.

<내 것 가운데 일부분만이 내 것 일뿐>

내가 씨뿌리고 거름 주고 수확한 내 밭의 곡식이라도 그 일부는 내 것이 아니라는 이 생각은 참으로 참신하다. 내 것의 일부는 내 것이 아니다. 내 것 가운데 일부분만이 내 것이다. 이 생각은, 우리가 타인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가를 성찰하게 한다. 자발적인 이익의 포기에서 나눔이 나온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존재이고, 전체의 일부이며, 타인과 더불어 우리를 이룬다.

민통선 안 철원 평야에 재두루미를 비롯한 철새들이 벌써 떼를 지어 찾아왔다는 뉴스를 오늘 들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된 덕분에 이 지역은 언젠가부터 철새들의 천국이 되었다. 거기다가 해마다 찾아오는 철새들을 위해 올해 농부들은 벼이삭을 다 거두지 않고 남겨 두었다고 한다. 법이 은혜로 이월되는 아름다운 경지를 본다. 우리는 더불어 산다. 우리는 재두루미와 더불어 우리를 이룬다.

 


글쓴이 / 이승우
· 소설가 / 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 1981년 <에리직톤의 초상>으로 <한국문학> 신인상 수상
· 1993년 <생의 이면>으로 제 1회 대산문학상 수상
· 대표작 <구평목 씨의 바퀴벌레> <미궁에 대한 추측> 
            <일식에 대하여> <사랑의 전설> <식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