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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세상]②'돈없어 굶는이 없는 세상그리며…' 문인근씨

강산21 2002. 6. 26. 15:26
[따뜻한 세상]②'돈없어 굶는이 없는 세상그리며…' 문인근씨
문씨의 가게 입구에 놓여진 기부금 모금함엔 손님들의 정성이 모이고 있다


문인근씨 내외가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돕자'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웃의 시기와 질투에서부터 관공서의 트집까지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이 녹녹한 것만은 아닌 듯 하다. 자신이 불우한 이웃을 돕는다는 사실이 어떻게 해서 알려지면서 주위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서울 구로구에서 숯불닭바베큐 전문점을 운영하는 문인근(사진.54)씨의 경우가 그런 경우다.

"제가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제가 그 처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더군요. '장삿속이다' '수입의 1%를 남을 위해 돕는다는데 과장된 것 아니냐'는 등 비아양 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문씨를 취재하는 것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문씨의 부인과 자식들이 한사코 인터뷰를 말렸다. 남을 돕는 것을 색안경을 쓰고 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기사화되어 더욱 알려지면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을 따가운 시선이 걱정이었다. 그러나 더욱 참기 어려운 것은 관공서의 불평등한 조치였다.

"작년에는 구로구청과 인근 파출소가 못 살게 굴더군요. 위생검열이나 뭐다 하면서 냉장고에 먹다 남은 떡국용 떡이었었는데 '왜 닭집에 떡이 있냐'는 등 트집을 잡더군요. 위생검열이라면 다른 점포도 검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포는 그냥 넘어가더군요. 위생검열로 정당한 지적사항이 나오면 시정할 용이가 있습니다. 다만 공평하게 검열을 해달라는 것입니다."

"아픈 과거 되물림 않고파"

이 같은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관공서의 트집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우한 이웃 돕기를 멈추지 않는 것은 자신의 과거때문이다. 돈이 없어 굶기를 밥 먹듯이 했고 학업도 포기해야만 했던 자신의 과거를 되물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한마리에 1만원하는 닭바베큐를 팔아 생긴 수입의 1%를 불우한 이웃을 위해 쓰고 있는 문씨는 그러나 자신이 남을 돕고 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고 말한다.

"내가 돈이 있어 불우한 이웃을 위해 돈을 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손님들이 음식을 주문한 것에서 1%를 기부하는 것이므로 손님들이 기부하는 것입니다. 손님들에게 감사할 뿐입니다."

문씨는 현재 밥 굶은 사람들, 음성 꽃동네, 독거노인 등 여러 사람들을 돕고 있다. '아름다운 재단(www.beautifulfund.org)'을 통해 수입의 1%를 기부하는 것은 물론 개인적으로 더 많은 불우한 이웃을 돕고 있다. 한달 평균 50만원 이상의 돈이 그들을 위해 쓰여진다. 돈 얘기를 꺼내자 그는 손을 내저었다.

"돈 얘기는 하지 맙시다. 돈 있으면 남을 돕지 못합니다.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자신이 없어 봐야 그들의 처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남 돕다가 오해까지 받으니 속상합니다"

그는 이제 개인적으로 남을 돕겠다는 생각보다 재단 등 단체를 통해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고 말한다. 그럴만한 내막이 있었다.

문씨는 지난 1998년 난곡마을에 살고 있는 김모 학생의 가정이 어렵다는 사정을 접하게 됐다. 당시 그 학생의 어머니는 영양실조 상태였고 언니와 동생은 심장병을 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게에 닭은 납품하는 사람이 난곡근처에 살고 있어 그를 통해 돈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돈을 주고 생필품을 사서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난곡인근에 있던 문구점, 수퍼마켙 등도 하나 둘 생필품을 내놓았습니다."

어느날 1년만에 집을 찾은 그 가정의 남편이 집안에 놓여있던 라면과 생필품을 보고 부인을 오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돈이 없어 굶고 있어야 할 가족들이 끼니를 굶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부인의 부정한 행동으로 돈을 마련했다고 오해를 한 것이다.

"저는 그 부인 얼굴도 한 번 보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사정을 듣고, 오토바이도 잘 오르지 못할 정도로 비탈지 곳에 살고 있는 그 가정에 생필품을 전해준 것뿐인데... 그 부인은 남편으로부터 심한 구타까지 당했다고 합니다. 남을 돕다가 오해까지 받게 되니 정말 안타깝고 서운합니다."

결국 문씨는 그 가정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앞으로 재단이나 단체를 통해 불우한 이웃을 돕기로 결심했다.

돈없어 굶고, 공부하지 못하고,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그리며...

남을 돕는 그의 선행은 3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0년대 고향땅 전라도를 떠나 서울로 상경한 그는 을지로의 한 예식장 제과부에서 잡일을 시작했다.

"그 당시 월급이 3천원이었는데, 사장님이 먹여주고 재워줘서 돈 쓸 일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문씨는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돕기 시작했다. 1970년대 불광동에 있는 신진공업고등학교에 재학중인 한 학생이 돈이 없어 졸업을 못할 지경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학비를 대주면서 평생 남을 돕기로 작정했다.

문씨가 4살이었던 6.25전쟁무렵, 그는 아버지와 동생을 잃었다.

"아버지는 우리 군인이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동생도 전쟁 통에 죽었고요. 제가 6살 나던 무렵 어머니는 누나를 데리고 집을 나가 재혼했습니다. 그 후 저는 할머니와 고모 손에 의해 자랐습니다. 그러다 다니던 중학교를 중단하고 16살 나던 해 서울로 돈 벌기 위해 올라왔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보낸 그는 돈이 없어 공부를 못하는, 밥을 굶는, 병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서러운 일입니다. 돈이 없어 공부를 포기하고 밥을 굶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씨 찾아 손 벌리는 사람 늘어

문씨가 없는 사람들을 돕는 사실이 점차 알려지면서 그의 가게를 찾아 손을 벌리는 사람들도 늘었다. 문씨는 이들의 손길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다.

"하루 4-5명씩 찾아옵니다. 그런데 한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에게는 단 돈 천원이라도 줘서 보내지만 젊은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젊은 사람은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문씨의 생각이다. 자신도 무일푼으로 젊은 시절을 개척한 경험이 있으므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는 못다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검정고시를 준비해 언젠가를 꼭 졸업장을 손에 쥐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돼요. 새벽 두시 넘도록 일하다 보니 시간이 없기도 하지만 내가 배우는 것보다 남을 돕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족들 모두 이웃돕기에 나설터

문씨가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서자 가족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가족들도 먹고 살기 힘든 판에 남 도울 여력이 어디 있냐는 것이었다. 1978년 결혼해 현재 같이 점포를 운영하고 있는 문씨의 아내도 처음에는 문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잦은 다툼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문씨의 아내는 "이젠 아이들도 아버지처럼 남을 돕는 일을 하겠다고 할 정도"라며 웃어 보였다.

문씨에겐 작은 희망이 있다.

"제가 기부하는 돈은 제 돈이 아니고 사회로 갈 돈인데 저를 통해 나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간 1천만원정도 기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는 그 반도 못하고 있지만...

그리고 헌혈증서를 모집할까 합니다. 손님들에게 생맥주 한잔 서비스하고 대신 헌혈증서를 받을 예정입니다. 모은 헌혈증서로 피가 없어 치료를 못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습니다."


<중앙일보 사이버리포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