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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 <청춘의 독서>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강산21 2017. 12. 16. 13:56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 2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룬다. 놀랍도록 맑은 영혼을 가진 지식인으로 리영희 선생을 일컫는 유시민은 <전환시대의 논리>에 실린 기자 풍토 종횡기라는 부분을 책에 길게 전재한다.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읽어도 독자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자기의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밝힌다, 그 부분을 다시 한번 인용해서 소개 한다.

 

기자는 수습 또는 견습이라는 미완성의 자격으로서도 출입처에 나가면 위로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은행 총재로부터 아래로는 국장, 부장, 과장들과 동격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들이 취재 대상의 하부층과 접촉하는 일은 오히려 드물다. 장관이나 정치인이나 사장, 총재들과 팔짱을 끼고 청운각이니 옥류장이니 조선호텔 무슨 라운지니 하면서 기생을 옆에 끼고 흥청댈 때, 그 기자는 일금 18000원 또는 고작해서 일금 32000원이 적힌 사내 사령장을 그 날 아침 사장에게서 받을 때의 울상을 잊고 만다.

점심은 대통령 초대의 주식, 그것이 끝나면 은행 총재의 벤츠차에 같이 타고 무슨 각의 기생 파티에서 최신 유행의 트로트 춤을 자랑하고 이튿날 아침은 총리니 국회의장의 자네만 오게라는 전화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참석하는 꿈이 남아 있다. 이런 기회는,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지만 출입처에 나간다는 기자에게는 반드시 있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 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 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신을 소리 높여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 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의 동화 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된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는 특집 기사가 매니큐어의 예술이니 바캉스를 즐기는 법따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 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따위가 아무 저항감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342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많은 농촌에서 일생 동안 의술이라는 현대 문화의 혜택을 거부당한 채 죽어가는 백성이 왜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사회의 체제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리 없다. (......)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진 자와 지배하는 자는 대연각의 음밀한 방에서 나오면서 이 기자 등을 다정하게 두드린다. “역시 이완용 기자가 최고야, 홍경래 기자는 통 말을 알아듣지 못한단 말이야.” 그러고는 득의만면해서 돌아서는 이완용 기자의 등 뒤에서 눈을 가늘게 하여 회심의 웃음을 짓는다.

국민의 소시민화, 백성의 우민화, 대중의 오도라고 말하는 학생들의 비난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부인할 용기를 가진 기자가 몇 사람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리영희, <전환시대의 논리> 379-3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