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그 사람...

다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서 <한홍구, 성공회대>

강산21 2009. 7. 21. 23:06

1. 그들은 상주였다

60년 전 백범선생을 보내드린 이후 이런 장례식은 처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치른 비통한 장례식이야 왜 없었을까만, 이번 장례식은 달랐다. 형식은 국민장이었다지만 사람들은 철저하게 국가가 차린 공식적인 분향소 대신 시민들이 세운 초라한 분향소를 찾았다. 광장을 뺑 둘러 친 차벽, 장례를 치르자마자 경찰이 짓밟아버린 분향소가 상징하듯이 이번 장례는 체제 밖에서 치른 장례식이었고, 국민장이라기보다는 민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슬펐고, 그의 죽음에 대해 더 큰 책임감을 느꼈다. 정부가 차린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에 가면 바로 조문할 수 있는데도 굳이 대한문 앞을 찾아 화장실도 변변치 못한 곳에서 너 댓 시간 씩 줄을 서며 조문한 사람들은 단순한 문상객이 아니었다. 그들은 상주였기에 자기가 지켜야 할 빈소가 어디인지를 잘 알았다.


며칠 동안 먹먹한 가슴으로 빈소 주변을 배회하며 느낀 것은 대중들이, 나보다, 진보적 지식인이나 진보진영의 활동가들보다 백배 쯤 더 슬퍼하고 백배 쯤 더 상처받았고 백배 쯤 더 가슴아파하고 백배 쯤 더 노무현이라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보진영은 결코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지 않았다. 진보진영은 노무현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제 노무현다운 정책을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진보진영으로서는 당연하고 이유 있는 바램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달랐다.


2. 개천에서 난 용, 노무현


대중들에게 노무현은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지금도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동네 입구에 플래카드가 붙는 현실에서, 노무현이 고시에 붙고,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이 되고,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세속적인 의미에서 더 이상 출세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 것이다. 개천에서 용이 났을 때 누가 좋아했을까? 당연히 개천이나 개천가에 사는 생물들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끝내 승천하지 못하고 추락했을 때 슬퍼한 사람들은 또 누구였을까? 그것도 개천이나 개천가에 사는 생물들이었다. 한국의 대중들은 개천에서 산다. 강남하고도 청담동에서 자라고 서울대학을 나온 장기하마저 찌질이 정서를 가질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개천에 살고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나면 개천에 사는 미물들은 자기 일처럼 좋아한다. 나는 비록 개천에 찌그러져 살고 있지만,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세상에서 내 새끼는 나같이 비루한 삶을 살지 않고 하늘로 솟구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희망은 개천의 구질구질한 삶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곤 했다.


한국은 개천에서 용이 많이 났던 사회였다. 한국은 오랜 과거제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등용문(登龍門)이란 말이 상징하듯 과거는 전통적으로 개천의 용들을 찾아내는 제도였다. 한국의 주류사회는 오랜 기간 개천에서 난 용들을 주류사회로 능란한 방법을 통해 포섭해왔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대부분의 개천에서 난 용들은 주류사회에 포섭되었다. 주류사회는 개천에서 난 용들이 개천 것들의 지도자, 개천 것들의 대변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끊임없이 개천에서 용이 나도록 하는 것, 그 용들이 주류사회에서 안착하는 모습을 보며 개천 것들이 기성체제를 뒤엎어버리기 보다는 좁게 열려있는 등용문을 통해 주류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승천'으로 여기게 하는 것은 어쩌면 2천년 동안 겨우 두 번의 왕조교체밖에 허용하지 않은 한국의 주류엘리트들의 체제유지의 '지혜'였는지 모른다. 현대한국에서 주류사회가 개천에서 난 용들을 포섭해 들이는데서 주요한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집단은 '마담뚜'들이다. 개천에서 난 용들은 대개 빵빵한 처갓집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의 처갓집은 대학진학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노무현의 집보다 훨씬 더 사정이 열악했다. 그 시절 대한민국에서 가장이 빨갱이에 장기수에 장애인이었으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노무현은 개천에서 난 용이었으되, 주류사회에 포섭되지 않은 보기 드문 존재였다. 노무현은 진짜 비주류였다. 물론 비주류에서 대통령이 되거나 크게 된 것이 노무현이 처음은 아니다. 김대중도 비주류 출신 대통령이었지만, 그는 오랜 기간 비주류 안에서 주류였고, 대통령 후보만 26년을 지냈다. 김근태도 운동권 출신이었으니 한국사회에서 비주류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운동권 내에서 주류였고, 게다가 KS마크였다. 이들은 비주류였지만 족보가 확실한 비주류였다면, 노무현은 주류의 입장에서 볼 때 그야말로 '어디서 굴러먹던 개뼉다귀'인지 모를 존재였다. 노무현은 정치에 입문한 지 채 15년이 되지 않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15년 동안에도 승승장구한 것이 아니라 선거에서 세 번이나 떨어졌다. 그런데 선거에서 떨어질 때마다 그는 큰 인물로, 전국적인 인물로 성장했고, 한국 정치인 중 처음으로 팬카페를 갖게 되었다. 대중들은 그가 반칙하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스스로 정한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 것에 주목했고, 반했고, 또 열광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대중들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깊은 슬픔 속에서 여기저기서 흔히 들려오는 말, "그가 있어 행복했다"는 말처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반칙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개천에서 난 용이 나왔다는 사실은 대중들에게 행복의 원천이었다. 대중들은 그 사실을 그가 떠나가고 난 뒤에야 새삼스럽게 절감했다.


개천에서 난 다른 용들과 달리 노무현은 주류사회에 눈을 깔지 않았고, 무릎 꿇지 않았다. 노무현은 당당하게 주류사회의 비도덕성을 질타했고, 지배 권력에 짓눌린 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온 우리들의 비루함을 떨쳐버리자고 호소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늘 나서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라고 가르쳤다고 고백했다. 그저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눈치껏 살라고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그가 변호사가 되어 80년대에 데모하는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을 때, 노무현은 여전히 학생들의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여전히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노무현은 젊은이들에게 정의롭게 살라고 가르치지 못하는 사회,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이제는 고쳐야 한다고 외치다가 죽었다. 아니 죽임을 당했다. 노무현은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이야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외치다가 죽었다. 노무현은 “우리 아이들에게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하나의 증거를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고, 그 자신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가 죽었다.


3. 광주의 아들, 바보 노무현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지역감정에 맞서 싸운 정치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은 왜 지역감정과 맞서 싸웠을까?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노무현은 왜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3당합당 때 YS를 따라가지 않고 "이의 있습니다"라고 소리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것은 노무현이 광주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출생지가 어디냐와 상관없이 노무현은, 그리고 80년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광주의 자식이 되었다. 정치적인 의미에서 광주의 아들딸이라 함은 광주 출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광주, 80년 5월의 광주 때문에 인생의 행로가 어긋나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광주의 아들딸들이었다. 노무현도 뒤늦게 광주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부산에서 돈을 제일 많이 번 변호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광주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버린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사람들은 2천 명은 희생되었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조사해보니 80년 5월 당시에 희생된 분들의 숫자는 2백 명 남짓이었고, 행방불명된 분들과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들을 합쳐도 5백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광주의 희생자 수가 처음에 우리가 예상했던 것만큼 많지는 않았지만, 2백 명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이다. 단 한 명도 죽어서는 안 되는 순간, 학살자들에 의해 하나하나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많은 분들이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 또 이런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굴곡진 한국의 현대사에서 2백 명, 3백 명 죽어나간 곳이 어디 광주뿐이었던가? 당시의 광주 인구는 30만 명이었는데, 1948년 제주 4·3사건 당시에는 인구 28만의 제주도에서 정부가 공식 확인한 바로도 3만5천 명이 죽었다. 하루 저녁에 2백 명, 3백 명이 죽어나간 곳이 제주도에는 널려있다. 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과정에서 마을마을마다 골짜기골짜기마다 2-3백 명이 죽어나간 곳은 부지기수이다. 그런데 왜 광주만이 특별했던 것일까? 다른 죽음은 슬퍼할 수도, 추모할 수도, 기록할 수도, 기억할 수도 없었는데 왜 광주의 죽음은 광주와 개인적인 인연이 없었던 많은 젊은이들의 인생을 비틀어버린 것일까?


그것은 80년 5월 27일 새벽의 도청이 갖는 힘이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시민들은 무장을 하게 되었고,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 버렸다. 수천 정의 총이 풀렸건만 단 한 건의 강도사건도 벌어진 적이 없었던 해방광주, 그것은 민주시민들이 만든 진정한 대동세상이었다. 사람들은 이 대동세상을 맛보며 무척 행복해 했었다. 그러나 얼마나 불안했었을까? 계엄군이 다시 몰려온다면 해방광주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오늘 들어올지 몰라, 아니 내일은 들어올 거야 그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는 흘러갔고, 5월 26일 저녁이 되면 내일 새벽에 계엄군이 반드시 들어온다라는 것이 확실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만 총을 내려놓자고 했다. 중무장한 계엄군이 작심하고 들어오는데 시민군 2-3백 명이 카빈총으로 그들에 맞서 해방광주를, 아니 그저 도청이라도 지켜낼 수 있을까?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나 자신도  젊은 시절에는 총을 내려놓고 한 사람들을 패배주의, 투항주의라고 불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쉽게 부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라는 말은 현실에서 그리고 역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는 법이다. 그런데 결코 총을 내려놓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자기들이 도청을 지켜낼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도청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총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말할 수밖에... 어떻게 텅 빈 도청을 전두환에게 내주겠냐고, 그러면 먼저 돌아가신 분들은 뭐가 되냐고...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총을 들고 도청에 남았다. 산 사람을 더 생각한 사람들은 총을 내려놓자고 했고, 죽은 이들을 더 생각한 사람들은 계속 총을 들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는 시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우리를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폭도가 아닙니다. 계엄군이 도청으로 몰려옵니다." 계엄군도 방송을 했다. "광주 시민 여러분, 광주 시민 여러분, 도청이 폭도들에게 장악되어 있습니다. 이제 군은 작전을 시작하고자 하오니 무고한 시민들은 집에서 나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총소리가 났다. 총소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한 20분 남짓 울리던 총소리가 멎었을 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누가 있었을까? 일주일간의 대동세상 해방광주를 누렸던 광주 시민들이 그 밤 집에서 쿨쿨 잘 수 있었을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사람들은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것을 들었고, 또 총소리가 멎고, 고요가 찾아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청이 함락되었구나...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 " 그 잔인한 새벽에도 해는 어김없이 떠올랐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새 시대가 열렸다고, 구국의 결단을 내린 위대한 영도자가 출현했다고 떠들어댔다. 아마도 그날 새로운 말이 생겨났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말이...


광주의 자식들이란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이었다. 하도 오랜 세월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나서지 마라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우리 민족에게 이런 가르침은 역사적 DNA가 되어 우리를 규정해왔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새로운 DNA를 간직한 광주의 자식들은 돌연변이였는지 모른다. 저 험한 80년대에 광주의 아들딸들은 감옥 갈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 일 하면 학교 짤리고, 잡혀가 두들겨 맞고, 감옥 갈 것이 뻔한데 그런 일을 하는 젊은이들이 수천수만 명이 나왔다. 광주의 자식들에게 80년대는 계산기가 멈춰버린 시대였다. 이런 일을 하면 나에게 어떤 영향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던 시대, 셈이란 것을 할 수 없었던 시대, 광주의 자식들은 그런 팍팍한 세상을 살아야 했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그런 세월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들의 삶속에 광주의 죽음이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광주의 자식들은 아무도 "나는 총을 들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죽은 사람도 있는데..."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그 다음부터는 아무 생각 없이 필요한 일을 하는 거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에게 닥칠 불행과 불이익을 고려치 않고 바위를 향해 자기 한 몸을 내던지는 계란들을 바보라고 불렀다. 그 바보들 중에 노무현이 있었다. 대중들이 보기에 어떤 바보들보다도 노무현은 바보였다. 노무현은 광주의 자식들에서 맏형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종손이었다. 노무현은 광주의 자식이란 그 역사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준 바보였다. 계산을 할 줄 몰랐던 바보 노무현, 그것은 광주의 자식들네 집안 내력이었다.


4. 과거청산과 노무현


진보진영에게 노무현은 애증이 겹친 인물이었다. 진보진영은 노무현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 아니, 그것은 과도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노무현답게, 노무현이 여태까지 대통령이 될 때까지 해온 것처럼 꼭 그렇게만 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데 상황은 어그러져 갔다.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 라고 말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이라크파병, 미군기지 이전, 주한미군 성격변화와 재배치, 한미FTA가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노동자 편에 서서 싸우다 감옥에까지 간 인권변호사였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무현은 반노동적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언사로 노동자들을 비난했다. 급기야 한나라당과 정책상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대연정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진보진영으로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이미 권력은 청와대에서 시장으로 넘어가버렸다는 말로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표현했다. 진보진영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비판했다. 이 비판은 근거 없는 비판은 아니었다. 노무현은 급기야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말로 서운함을 드러냈다. 노무현에게 기대했던 진보적인 가치들은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사실 참여정부 시절 정권이 수구세력이나  조중동과 대립했던 문제들은 경제정책에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사문제, 언론개혁, 사립학교법 문제 등이 노무현과 수구세력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문제들이었다. 진보진영이 주장해온 여러 문제들 중에서 정책적으로 참여정부에서 실현된 것은 어쩌면 과거청산과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이 두 가지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대중 정부와 비교해 볼 때 시민사회에서 군사독재 잔재의 청산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김대중은 국고로 박정희 기념관을 짓겠다고 했고, 노무현은 포괄적 과거청산을 실행에 옮겼다.


과거청산은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근본문제였다. 대통령까지 지낸 노무현이 한국사회에서 끝내 비주류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과거청산 때문이었다. 2004년 가을 뉴라이트가 갑자기 등장한 것도 탄핵에서 살아 돌아온 노무현이 과거청산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청산의 과제를 진보진영만 제기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이른바 보수세력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 자체가 한국사회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무고한 시민을 안기부 지하실로 끌고 가 두 달, 석 달 씩 두들겨 패가며 조작간첩을 만들어 버린 일을 바로잡는 것이 어찌 진보만의 과제이겠는가? 이것은 진보와 보수를 떠나 인간의 도리일 뿐이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인터넷에서는 그와 관련된 동영상이 수없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영상들과 아울러, 그가 후보시절이나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연설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들이 높은 조회수를 보이고 있다. 앞서 이야기 하였듯이 “세상에서 어떤 부정이 있어도, 어떤 불의가 눈앞에 벌어지고 있어도 강자가 부당하게 약자를 짓밟고 있어도 모른척하고 고개 숙이고 외면했어야 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바로잡자는 것, 이것이 노무현표 과거청산의 기본정신이다. 노무현의 정신, 노무현의 가치가 꼭 진보적일 필요는 없었다.


한국사회는 1987년 이후 민주화의 과정을 걸어왔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에서 한국은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지만, 또 한편으로 그 민주화는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한국의 민주화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거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004년도의 탄핵은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민주주의 자체를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통령을 탄핵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형식민주주의가 최고로 보장되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과거청산이 없는 상태에서 그 과실을 누가 따먹었는가? 친일과 유신과 5공과 지역감정의 화신들이 탄핵결정서를 들고 헌법재판소를 찾은 한 장의 사진은 과거청산 없는 민주화가 초래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과연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었는가? 몇 년 전 유행했던 개그콘서트의 '같기도' 코너를 빌어서 얘기한다면 이른바 87년 체제하의 한국은 민주화가 된 것도 아니고 안 된 것도 아니다. 과연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었는가? 분명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었다.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을 만큼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었다. 이정도의 민주주의를 보여줄 수 있는 나라는 많지 않다. 필리핀의 대통령들은 여전히 봉건시대의 5대 가문이나 7대 가문이요 하는 집안에서 나오고 있고, 이웃 일본도 참의원의 대다수가 선거구를 누대에 걸쳐 세습받고 있다. 노무현을 낳은 한국, 오바마를 낳은 미국, 이런 민주주의는 가벼이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문제는 민주화가 과연 만족스러운 것일까? 여전히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지 않았다. 한국사회가 민주화되지 않은 정도를 이야기하라면 오히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같은 전직 대통령이 벼랑 끝에 가 자기 자신을 내던져야 할 만큼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지 않았다고...


5. 다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서


당선자 시절에 이명박은 전직 대통령을 우대하는 전통을 확립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불과 1년여 만에 전직 최고지도자의 자살이라는 5천년 역사의 처음 있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과정을 돌이켜보면 이명박이 전직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구나하는 점을 느낄 수 있다.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무려 530만표 차이로 압승을 거뒀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자랑해왔다. 530만표 차이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최다표 차이고,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 깨지지 않을만한 기록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전임자를 못살게 굴었던 것일까?


이명박이 530만표 차이로 상대방을 따돌렸다고 하지만 정작 그가 얻은 11,492,389표는 노무현이 얻은 12,014,277표에 비해 52만표가 적다. 이명박은 11,443,297표를 얻었던 이회창에 비해 겨우 4만8천표를 더 얻었을 뿐인데, 유권자 수가 260만 이상 늘어났던 점을 고려해보면 이명박의 득표율은 실상 이회창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은 530만표라는 어마한 표차를 벌린 것은 민주당의 정동영후보가 617만표를 얻는데 그쳐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이 얻었던 표의 절반밖에는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17대 대선의 결과는 이명박의 승리라고 하기보다는 민주개혁진영의 와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번 장례에서 조문객의 숫자는 5백에서 6백만을 헤아린다. 그 숫자는 지난 번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을 찍었다가 17대 대통령 선거에는 기권해버린 사람들의 숫자와 엇비슷하다. 이번 장례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이야기의 하나가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였다. 가장 슬프게 '지못미'를 외쳤던 사람들은 혹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을 찍었다가 그 다음 선거에서 투표장에 나가지 않은 사람들 아니었을까? 백만이 모인 촛불로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달은 사람들, 그러면서 슬픔에 겨워 '지못미'를 되뇌는 사람들이 대한문 부근에 써놓은 구호를 옮겨본다.


"평생 꼭 투표하겠습니다."

"평생 한나라당 찍지 않겠습니다."

"평생 조중동 보지 않겠습니다."

"평생 검찰이 한 짓 지켜보겠습니다."

"평생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대중들이란 참으로 무서운 존재다. 김수영이 노래한 것처럼 대중들은 바람보다 먼저 눕지만,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그런 존재이다. 대중은 늘 다시 일어난다. 길어야 10년이다. 한국전쟁은 조금이라도 민주와 민족과 자주를 생각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죽여 버렸다. 오죽했으면 고은은 "나 같은 게 살아서 오일장 장터에서 국밥을 다 먹는다"라고 노래했을까? 영국의 한 신문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야유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만 7년이 채 안 돼서 4·19가 일어났다. 그 4·19를 박정희가 탱크로 짓밟았다. 그리고 10년 만인 1971년에는 의사와 판사들이 파업을 하고, 노동자와 빈민은 폭동을 일으키고, 학생들은 데모를 하는 등 일 년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박정희에게 삼선개헌 이후 첫 임기를 시작한 1971년은 촛불에 데인 이명박 정권이 보낸 2008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견디다 못한 박정희는 비상사태를 선포한 데 이어 이듬해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단행했다. 모든 것을 짓밟고 동토의 왕국을 만들어 버린 유신체제는 꼭 7년 만에 박정희가 총을 맞는 것으로 끝이 나 버렸다. 박정희가 죽은 뒤 민주화냐, 독재유지냐의 싸움은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이 처절하게 진압당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없는 참담한 패배였다. 그 처절한 패배에서 백만 인파가 아스팔트를 뜨겁게 달군 6월항쟁을 만들어내는데 딱 7년이 걸렸다. 그 때 군사독재 정권을 끝장냈어야 마땅하건만 양 김씨가 싸우는 바람에 질래야 질수 없는 싸움을 지고 말았다. 간신히 살아난 군사독재정권은 민주화운동진영의 일부를 끌어들이는 3당합당을 통해 생명연장을 시도했다. 지금 한나라당의 의석은 170여석이지만, 보수대연합을 표방한 3당합당을 통해 출현한 민자당은 전체 의석의 2/3를 넘어 220석에 육박하는 거대 정당이었다. 이제 민자의 전성시대가 열릴 것이고, 민자당은 일본의 자민당마냥 최소 50년 동안 장기집권 할 것이라고 수구세력은 떠들어댔다. 그러나 3당합당이 있고 꼭 7년 만에 대중들은 정권교체를 단행해버렸다.


대중들은 늘 다시 일어나지만 그들이 일어나는 순간 역시 절묘했다. 대중들은 가장 암울했던 순간에 일어나곤 했다. 10·26사건이 일어나기 불과 몇 달 전인 1979년 1학기에는 서울의 주요대학에서 별다른 데모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8월 7일  YH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기습, 점거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다. 거기서부터 박정희가 총을 맞을 때까지 채 석 달도 걸리지 않았다. 6월항쟁이 있기 직전의 상황은 더 참담했다. 86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끝낸 군사독재정권은 운동권을 싹쓸이 한 뒤에 88올림픽을 자기들만의 잔치로 치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거의 매일 신문에는 00당 사건, 00동맹사건이 터져 나왔다. 이 시기의 건국대사태에서는 무려 1200명이 구속되어 단일사건으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구속자를 내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자 운동진영의 분위기는 삭막해졌다. 나는 그 당시 민청련의 기관지 '민중신문'의 기자로 있었는데 격주 간으로 발행되는 이 신문의 일면에는 그동안에 있었던 투쟁기사가 실리곤 했다. 그런데 그 때는 정말 쓸 게 없었다. 편집회의를 하던 중 기자들에게 정말 쓸 것이 없냐고 다그치던 편집장은 실내에서 100명만 모였어도 1면 톱으로 써줄텐데라며 한숨지었다. 그 다음 날인가 박종철이 죽었고, 딱 5개월 만에 백만 인파가 참여한 6월항쟁이 일어났다.


한국의 근현대사는 죽음을 헛되이 보내지 않는 역사였다. 한국전쟁 전후처럼 전부 다 죽여 버렸으면 모를까 한국의 대중들은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장식한 주요사건들은 다 죽음과 관련이 있다. 고종황제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과연 3·1운동이 일어났을까? 순종황제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6·10만세 운동은 가능했을까?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지 않았다면 4ㆍ19는 또 가능했을까? 광주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박종철의 죽음이 없었더라면 6월항쟁은 가능했을까? 우리의 역사는 죽음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현대사의 전개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를 지금 구체적으로 점칠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의 대중들이 그 죽음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역사는 대중이 흘리는 눈물만큼 변했다. 지금까지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고, 아직도 속으로 울고 있을 뿐이다.


광주의 죽음을 떠나보낸 사람들, 아니 떠나보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끼고 살았듯이 대중들은 오랫동안 '살아남은 자의 슬픔'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한 시대가 장엄하게 끝났음을 상징한다. 광주의 자식들이 몸바쳐 싸워온 민주화운동의 세대가 이렇게 끝난 것이다. 민주화운동이 추구했었던 개혁이 당대에 성공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치열했던 한 시대의 종언이 그저 속절없이 쓸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마치 10권짜리 대하소설에서 앞부분의 이야기를 이끌어왔던 주인공은 죽었으나 그 다음 세대의 이야기가 남아있기에 너무 일찍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한국 현대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다시 시작될 '살아남은 자의 슬픔' 시즌2는 광주에서 시작된 시즌1에 비해 훨씬 더 대중적으로 폭넓게 진행될 것이다.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꼈던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얼굴도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노무현은 지난 5년간 텔레비전에서 매일 얼굴을 보던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시대에 민주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인물이었고,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적인 죄책감을 주고 간 인물이었다.


이제 용은 죽었다. 개천에서 난 우리들의 용은 죽었다. 그러나 용의 죽음은 그 용을 낳은 시대의 종언을 의미한다. 용을 낳았던 광주의 시대, 민주화운동의 시대는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끝나버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등장했던 용은 어떤 영화보다도 극적으로 무대에서 사라졌다. 당대의 승부사답게 그의 죽음은 장소부터 범상치 않았다. 용이 추락한 곳은 부엉이바위였다. 부엉이는 지혜를 상징한다.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큰 눈으로 다 보고 그것을 여신에게 전해주는 부엉이. 슬퍼하는 부엉이는 결코 잊지 않는다. 용의 피가 튄 곳, 용의 비늘이 떨어진 곳에서 수백만, 수천만 마리의 부엉이가 날아오를 것이다. 용의 시대는 끝나고 이제 부엉이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우리들의 용은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죽었기에 부활할 수 있다. 이루지 못한 용의 승천은 이제 수백만 수천만 마리의 부엉이의 비상으로 실현될 것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노무현 추모 심포지엄 "노무현의 시대정신과 그 과제" 발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