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그 사람...

임기 내내 보수신문과 ‘긴장’…되돌아본 ‘노무현의 길’

강산21 2009. 5. 25. 18:45

임기 내내 보수신문과 ‘긴장’…되돌아본 ‘노무현의 길’

기사입력 2009-05-25 08:45 
 
[한겨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언론과 밀월관계 거부…동력이자 걸림돌로

집권말기 모든 언론 대립각 권력누수 부채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른 정치인과 구별 짓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언론과의 관계설정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밟아온 언론과의 ‘안전한 밀월관계’를 거부하고 정치적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긴장관계’를 택했다. 특히 그가 정치 역정 내내 보여준 보수언론과의 치열한 공방은 그를 가장 ‘노무현답게’ 만든 동력인 동시에, 그의 정치 행보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조선일보>와의 악연은 정치 입문시기부터 줄곧 계속됐다. 그는 ‘요트를 소유한 자산가’로 자신을 묘사한 1991년 10월 <주간조선> 기사를 왜곡보도라 반발하며 법정 소송 끝에 재판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이듬해 3월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지방선거에서 경쟁후보들의 공격 자료로 활용되며 그에게 패배의 고배를 안겼다. 2001년 11월 조선일보의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를 거부한 그는 불매운동까지 선언하며 조선에 맞서는 ‘대담한’ 정치행보를 이어갔다.

<동아일보>와의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2002년 2월 인천지역 경선 합동연설에서 “동아일보가 내게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 소신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고 말해 동아와 대립했다.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도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세무조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정치인도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보수언론과의 싸움은 역설적으로 보수언론에 염증을 느끼던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보수언론과 타협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례란 점에서 의의가 크지만, 그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평가했다.

당선 후 노 전 대통령은 법·제도 개선을 통해 보수언론 중심의 공고한 언론구도에 균열을 시도했다. 2005년 1월 신문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제어하는 기틀을 놓았고, 신문유통원과 신문발전기금·지역신문발전기금을 만들어 작은 언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정책 혼선 등과 맞물려 그에게는 ‘언론개혁의 전도사’보다는 ‘언론과 무차별적으로 싸우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어졌다. 2007년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은 애초 의도와 달리 ‘참여정부 대 보수언론’의 전선을 모든 언론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4년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했을 땐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종원 선문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권력화된 언론은 견제하고 약한 언론을 키우며 새 언론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기자실 통폐합’에서처럼 기술적인 문제에서 신중하지 못해 ‘소탐대실’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서거 직후 나온 ‘노 전 대통령 언론관’을 평가하는 목소리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민언련은 서거 당일인 23일 성명을 내어 “수구족벌신문과 싸운 최초의 대통령”이라 표현하며 그를 애도했다. 반면 <조선일보> 24일치 사설은 “노 전 대통령 시절부터 홍위병에 가까운 세력들이 시민단체를 가장해 대통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언론에 전방위 공격을 퍼부었다”며 참여정부 시절을 가시 돋친 언어로 회고했다. 이문영 권귀순 기자 moon0@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