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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속에서 뒤틀릴 아이들 영혼이 걱정”

강산21 2009. 4. 21. 14:19

“경쟁 속에서 뒤틀릴 아이들 영혼이 걱정”

기사입력 2009-04-10 18:08 


[한겨레21] [초점] 일제고사 불복종 선언한 한 교사의 편지 “무조건 암기하는 시대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지난 3월31일, 전국적으로 교과학습 진단평가 시험이 치러졌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의 모든 학생이 대상이었다. 지난해 10월 기초학력 진단평가, 12월 학업성취도 평가에 이어 세 번째 전국 단위 시험이다. 교사·학생들은 이 시험을 ‘일제고사’라 부른다.

같은 날, ‘일제고사 불복종 운동’도 전국에서 일제히 진행됐다. 현직 교사 145명이 ‘일제고사 폐지·불복종 선언’에 참여했다. 전국 시·도 교육청은 이 교사들을 조사해 징계할 계획이다. 지난해 12명에 이어 다시 한번 수십 명의 교사들이 교단을 떠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서울 ㅇ초등학교 ㄱ아무개 교사도 이번 불복종 선언에 참여했다. 그는 일제고사를 앞두고 두 차례에 걸쳐 학부모들에게 ‘담임편지’를 보냈다. 편지엔 일제고사에 대해 학부모와 소통하려는 노력이 절절히 녹아 있다. ㄱ 교사의 허락을 얻어 편지 내용을 발췌해 싣는다. 현재 그는 학교로부터 사유서 제출을 독촉받고 있다. 그에 대한 징계 수위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편집자

지난해 저희 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수업이 끝났습니다. 어느 학생이 집에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뾰로통한 얼굴이었습니다. 담임 교사인 저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 싶어 무슨 일이냐고 슬쩍 떠봤습니다. 우리 반 다른 친구와 다투었다고 했습니다.

학원에서 치른 시험 때문이었습니다. ‘레벨 테스트’를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나 봅니다. 자신은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같은 학원에 다니는 우리 반 친구가 그 사실을 자기 부모님에게 이야기했다는군요. 서로 자주 연락하는 두 아이 부모님이 그 문제로 전화 통화를 했고, 결국 그 학생의 부모님도 ‘레벨 테스트’ 결과를 알게 됐답니다. 두 학생 모두 성적으로는 우리 반 최상위권에 속했는데, 학원 시험 때문에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린 꼴이 됐던 것이지요.

선진화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과거 회귀

성장기의 예민한 아이들에게 잦은 시험과 성적 비교는,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과도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부정적인 자아관을 갖게 합니다. 저도 초등학교 때부터 시·도 단위 평가시험을 수시로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적순으로 자리를 배정하던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했던 생각도 나네요. 아마 부모님들께서도 그런 경험이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중학교·고등학교·대학교라는 산을 차례로 넘는 고난의 행군이었지요.

그러나 당시가 선생님들에게는 참으로 편안한 시절이었던 듯싶습니다. 교과서에 밑줄 긋기, 참고서 권유하기, 일정한 점수 이하 학생들 체벌하기, 학생 몇을 따로 불러 과외하기…. 저는 쪽지시험에서 틀린 개수만큼 발바닥을 맞았던 기억도 있습니다. 그런 선생님들 아래서, 없는 살림에 학원 보내는 것도 힘들어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다행스럽게도 저는 고만고만하게 공부를 하여 교대에 들어갔고 선생이 되어 교단에 섰습니다.

대학 시절 교육학 공부를 하면서 ‘입 닫고 무조건 암기식 교육’은 전근대적이고 후진적인 것임을 배웠습니다. 평가는 공부를 강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학생들에게 배움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하고, 교사 스스로도 가르치는 방법을 수정하게 하는 도구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교육학에서 ‘구성주의’라 불리는 이런 형태의 교수·학습관이 우리의 7차 교육과정에도 전면적으로 도입됐습니다. 이후 초등학교에서도 일제고사 대신 다양한 수행평가가 도입됐습니다.

서로 다른 개성 북돋우는 일 어려워질 것

그런데 지난해부터 일제고사가 갑자기 부활했습니다. ‘선진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이상하게 학교 현장은 ‘무조건 암기’를 외치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게다가 이번엔 제 어린 시절에도 없었던 전국 단위 일제고사입니다. 이 시험을 한 번 치르는 데 200억원의 돈이 들어갑니다. 이 비용은 저소득층 아이들의 급식지원비나 환경이 열악한 학교에 대한 지원비 등을 줄여서 마련하고 있습니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학습 부진아들을 지원하기 위한 시험이라고 설명하지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지요. 내년부터 도입될 학교정보공개법에 따르면 일제고사 결과를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돼 있습니다. 일제고사 성적에 따라 학교장과 교원에게 인센티브를 주거나 적절한 조치를 하겠다고 합니다. 성적이 좋은 학교에는 더 많은 지원을 하고, 그렇지 않은 학교는 관리·감독을 강화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나 못하는 아이나 마냥 예쁘게 보아주고, 학생들의 서로 다른 개성을 북돋우려는 교사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것입니다. 대신 시험을 대비한 정답 찍기, 문제풀이식 수업이 활개를 칠 것입니다. 이런 경쟁적 풍토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과도한 경쟁체제 속에서 뒤틀어질 아이들 하나하나의 영혼이 걱정스럽습니다. 선생으로서 이런 현실이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일제고사의 심각성에 대해 공감하고 다른 선택을 하는 부모님들과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에서 한 가닥 희망을 봅니다. 3월31일, 전국의 아이들이 진단평가라는 이름의 일제고사를 치릅니다. 답안지 채점이 외부 기관에 맡겨질 예정이라 교사인 저조차도 아이들이 어떤 문제를 얼마나 틀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 5월이 돼서야 과목·영역별로 ‘도달’이냐 ‘미도달’이냐의 판정 결과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교육청에서는 이번 일제고사를 앞두고 각 학교에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준하는 시험관리 계획’을 세우라고 하고 있습니다. 학교 현관과 각 교실에 일제고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었습니다. 학교는 가정통신문을 두 차례나 발송했습니다. 학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을 위한 연수도 실시했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역사상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만, 학부모님들까지 동원돼 시험감독을 하게 됩니다. 교실뿐만 아니라 모든 층의 복도에까지 감독관을 배치한다는군요. 교장·교감 선생님으론 부족하여 교과 선생님들을 시험감독에 배치하고 게다가 ‘진지한 자세로 시험에 임할 수 있도록’ 복도에서도 감시하겠다는 것이지요.

수능에 준하는 시험관리, 누구 위해서?

도대체 무엇을 감시하라는 것일까요? 아이들의 부정행위를 감시하고, 이를 교사가 잘 감시하는지 안 하는지 감시하고, 또 그 감시를 잘하고 있는지 복도에서 감시하라는 것일까요? 한때는 책상 위에 올려놓는 가림판조차 학생들 사이에 불신을 조장한다고 하여 가림판 없이 시험 보는 학교를 본받으라 부추기더니, 이제는 학교도 선생도 믿을 수 없으니 학부모가 나서라 합니다. 아이들은 어른과 달라서 심리적인 환경에 따라 시험 결과가 달라집니다. 시험감독이 담임이 아닌 다른 교사로 바뀌고, 게다가 학부모님까지 와서 옆에서 들여다보니 과연 아이들이 긴장하지 않고 제 실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일제고사를 치르고 싶어하시는 학부모님들의 의사도 존중돼야 하고, 치르지 않겠다는 학부모님들의 의사도 마찬가지로 존중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월31일에 체험학습이나 다른 방식의 교육적 선택을 하고 싶으신 학부모님께서는 홈페이지(happyedu.jinbo.net)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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